188화
여기저기서 이런 소요가 일어났지만, 대개 거대한 흐름 속 작은 와류는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듯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없었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결국 거대한 흐름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정천맹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개파 대회의 알림이었다.
정천맹(正天盟).
이미 그 업무를 시작한 지는 어언 한 달이 흘렀지만, 실제로 세외에 ‘우리가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는 건 바로 오늘 있을 개파 대회였으니, 그전까지 열심히 청첩장도 보내고 초대장도 보내고 한 보람이 있어 정천맹이 자리한 사천의 가장 큰 장원에는 비유상의 표현이 아니라 실로 터질 듯한 인파로 꽉꽉 차버렸다.
“드디어 시작이군.”
“그러게 말이야, 한 달 전부터 무얼 그리 열심히 준비 하나 궁금했는데 말이지.”
“에끼, 어디 준비할 게 한두 개이겠는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문파들이 합쳐졌으니 사천의 정천맹은 그 뿌리에 불과할 뿐일세. 과거 무림맹이 그러했듯 장차 각 성에 지부를 설치할 테고, 그러려면 인사 배치로 골머리 꽤 썩혔을 게야.”
“오호, 그렇구만!”
모인 인파들은 그들이 알아서 정천맹이 그간 걸어온 행보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을 내놔 주었고, 자신들이 한 달이나 사천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이유들을 알아서 대변해주었다.
그러한 행동의 안에는 당연 이번 정천맹의 탄생이란 새 흐름이 시대의 변화를 가져와 줄 것이며,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할 것이란 기대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한 몸에 품어 안은 이가 마침내 단상에 올랐으니, 청성파의 장문인이자 정천맹의 맹주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선 청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돌아보며 다부진 눈빛에 이채를 발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던가.
비록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 제관은 타인이 살포시 올려준 것이라지만, 그 무게를 버틴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정천맹이 크고 작은 문파 수십 개가 모인 곳이라면, 그 문파들 사이에서 알력 다툼이 나뉘어 쏟아지는 목소리는 또 수백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어르고 달래야 했다.
평소라면 감히 자신한테 목소리 낼 깜냥도 안 되는 것들이 깝죽거리는 걸 들어주는 건 물론이요, 평소라면 자신도 목소리 내기 어려운 이들이 단체로 몰려와 어르는 걸 달래주기까지 해야 했으니―
한 달, 결코 짧지 않았던 그간의 세월이 떠오르자 감정이 북받쳐 오른 청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찬연한 창천을 두 눈에 담았다.
“오오오…….”
“말씀하시려나 보다…….”
“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그 모습이 대중들에게는 대의(大意)를 품은 모습으로 보였으니, 장내는 퍽 숙연해졌고, 본의 아니게 발족식의 분위기를 잡아낸 청원은 다시금 고개를 내려 입을 열었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지에서 온 무림의 동도들이여, 굳은 길을 발걸음을 팔아 이 자리에 행사한 친우들이여, 사천 땅에서 함께 의기를 품어 일어선 가족들이여, 모두 반갑습니다. 부족하나마, 이 자리에 굳은 중책을 두 어깨 위에 지고 서게 된 청원입니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는 장중한 음색으로 대중에게 퍼져 나갔다.
“우선 죄송합니다만, 전 맹주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뱉어진 첫 말은 모두에게 의혹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맹주가 되고 싶지 않다니?’
‘그럼 다른 이를 맹주에 추대한다는 뜻인가?’
하나, 그 의문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기 전, 청원은 말을 이어 갔다.
“그건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그 누구 위에도 군림하거나 지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사천인이든, 사천인이 아니든, 무림인이든, 무림인이 아니든 모두를 돕고자 합니다. 우린 모두 서로를 돕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란 그런 겁니다. 서로의 불행이 아닌 서로의 행복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풍요로운 대지는 모두를 위한 양식을 내줄 수 있습니다.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탐욕은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켰고, 세계를 증오의 장벽으로 가로막았으며, 우리를 불행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신속함을 얻었지만 스스로를 가둬 버리고 말았습니다. 야만의 무리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도록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무공은 우리를 욕심 속에 버려놓았습니다. 서로 밥 굶지 않을 수 있도록 발달된 상행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영리함은 무정하고 불친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느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를 짓밟을 수 있는 더 나은 무공보다는 협(俠)이, 타인의 희생 위에 쌓은 부(富)보다는 의(義)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비참해질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수신(修身)으로서 한 문파의 장에 오른 이는 자신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를 만천하에 보이고 있었다.
“인간이 갈고닦은 무공으로 더 이상 인간이 짐승에게 위협받지 않게 되었고, 쌓아 올린 부로 곳간에 축척된 곡식은 더 이상 저희를 추운 겨울날 배곯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발전들의 본질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화합과 인간의 선량함과 전 중원의 형제애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 목소리가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수십만의 좌절하는 남성들, 여성들, 아이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가두는 어떤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그는 시대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제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겪는 불행은 그저 스쳐 가는 탐욕일 뿐입니다. 인류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조소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언젠가 증오는 지나가고 한낱 강한 힘으로 약한 이들을 짓누르는 독재자들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인류로부터 빼앗아간 힘 또한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인류가 목숨을 바쳐 싸우는 한 저희가 잃어버렸던 그 숭고한 가치는 다시금 돌아올 것입니다.”
지난 시대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부르짖고 있었다.
“무인(武人)들이여! 그대들을 경멸하고, 노비처럼 다루고, 그대들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과 삶을 통제하며, 한낱 도검(刀劍)처럼 다루고 사육하고 조련하여 화살받이로 만드는 이 극악무도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이런 비정상적인 자들에게, 포악한 짐승의 지성과 마음을 가진 금수 같은 인간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휘둘러 피를 묻힐 도검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아갈 방향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채 쏘아지는 화살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당신들의 마음속에는 중원인들에 대한 사랑이 숨 쉬고 있습니다! 증오하지 마십시오! 사랑받지 못한 자들, 비인간적인 자들만이 그럴 뿐입니다! 무인들이여! 한낱 힘으로 쌓아 올린 거짓 정의가 아닌, 협의(俠義)를 위해 투쟁하십시오!”
움켜쥔 주먹이, 주름진 손이, 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려졌다.
“그러니, 정천(正天)의 이름으로 그 힘을 사용합시다. 화합을 이룩합시다.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젊은이에게 미래를, 노인들에게는 안정을 제공할 훌륭한 무림을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극악무도한 자들 또한 이런 것들을 약속하며 권좌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전 거짓 하늘을 찢고, 올바른 새로운 하늘을 만들기 위하여 목놓아 부르짖었으니,
“독재자들은 스스로를 해방하면서 민중을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이제 그들이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싸웁시다! 무림를 해방시키고, 문파 간의 경계를 없애어 탐욕과 증오와 배척을 근절하도록 함께 투쟁합시다. 이성이 다스리는 세계, 무공의 발전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무인(武人) 여러분! 협(俠)과 의(義)의 이름으로, 하나 되어 단결합시다! 진정한 옳은 하늘(正天)을 위하여 투쟁합시다!!”
협의의 가치란 게을리 바닥을 뒹구는 나타협의(懶惰俠義)의 시대를 넘어, 세상의 모든 집단이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앞다투는 만가쟁패(萬家爭覇)의 시대를 찢으며, 그 새로운 시대가 개막을 알렸으니―
“정천맹 만세!!”
“협의를 위하여!!”
바야흐로, 협의로서 올바른 하늘을 맞이하게 된, 협의정천(俠義正天)의 시대가 웅지를 펴고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 * *
“그 양반, 이빨 한번 잘 터네.”
원래라면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개막식 잔치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길래 개파 대회까지 갔다가 청원 늙은이의 연설을 전부 보게 되었다.
과연 정치 하나로 한 문파의 장에 오르고 일개 성에서 최고위까지 다다랐던 인간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아주 사람들이 좋아 죽더만?’
목도 안 아픈지, 물 한 번 안 마시고 장대한 연실이 끝나자마자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주 장원이 다 폭발하는 줄 알았다니까?
‘벌써부터 새로운 시대가 왔니 뭐니 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변화를 바라는 것이야 인간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이겠지만, 이번 정천맹의 발족과 동시에 일어날 변화는 고작해야 산적 놈들 하나 토벌하겠다고 모인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녹림은 시작에 불과하겠지.”
누군가들의 짐작대로, 이제 정천맹은 전 무림에 그 지부를 뿌리내릴 것이다.
그건 녹림을 토벌할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연설에서 그 시발점을 알렸듯 그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이 넘치다 못해 터져버릴 듯할 힘을 외부로 분출하고는 싶을 테니까.’
무인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 아닌가.
반짝반짝하고 예리한 명검을 쥐면 한 번쯤은 휘둘러보고 싶듯,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막강한 힘을 세상에 한 번 쏟아내 보고 싶을 것이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힘이 힘을 불러 모으고, 부가 부를 불러 모으듯―
한번 그 구심점이 생긴다면 막대한 인력이 세상의 것들을 자신들에게 끌어당길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내가 어떻게 알 방법이 있겠냐고.
“역시, 인간의 탐욕이란…….”
기껏 탐욕으로 오염된 세상을 타파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자 모인 이들 역시 그 발걸음은 결국 탐욕의 발로일지니―
“뭐가 됐든, 내가 손해 볼 건 없잖아?”
인간 세상 뭐 하루 이틀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탐욕이든 욕망이든 우리 집 곳간만 잘 차오르면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
‘마교도 놈들만 잘 때려잡으면 되지.’
예상보다 더 큰 힘이 모였으니, 그 힘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짓수는 더더욱 늘어났다.
물론, 그 대가로 생겨나게 된 잡음은 더더욱 시끄러워지게 생겼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그건 이제 막 연설 끝낸 다음 돌아가서 그 중간중간에 섞여들었던 자극적인 문구에 뿔난 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청성파 할아버지가 해줄 거다.
‘제관을 쓴 자, 그 무게를 버티란 말이 있잖아?’
암, 그렇고말고.
“자, 그럼. 천천히 지켜봐 볼까.”
이제 곧 어린아이들 재롱 잔치가 시작될 것이다.
잠룡전(潛龍戰)이라는 두근두근한 잔치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