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 *
잠룡전(潛龍戰).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 하늘로 비상하지 않은 용들을 위한 잔치다.
이미 그 명성을 전 무림에 쩌렁쩌렁 떨치고 있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은 당연히 제외.
아직 이립(而立)에 이르지 않은 파릇파릇한 청년들만이 참석할 수 있으니, 온 무림의 창창한 젊은 무인들이 다 모인 행사가 바로 잠룡전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인원은 무시무시하게도 많았다.
“참가번호 일 번부터 백 번까지는 이 앞으로 모여주시오!”
“그다음 조는 대기해 주시오!”
“응? 천 번부터는 어찌하냐고?”
“그건 아마 오늘 저녁이나… 시간상 여의치 않으면 내일부터 진행될 것이니 기다려주시오!”
본선은 물론이고 예선을 진행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릴 지경이었으니, 잠룡전 진행 위원회에서도 몰려드는 접수증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뒤 꾀를 내보였다.
“자, 일차 예선의 시험 과목은 간단하오. 다들 눈앞의 바위를 세 걸음 앞으로 옮겨주시면 되오.”
그건 바로 바위 옮기기.
어지간한 사람 키만 한 바위를 다른 장치의 도움 없이 홀몸으로 옮기는 게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건, 내공 양을 시험하는 것이구나.’
거대한 바위 앞에 선 패왕보의 후계자, 구중보는 출제자의 의도를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면… 온갖 영약을 먹고 자란 대문파 후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시험일 텐데…….’
구중보.
그는 섬서 백 대 고수의 일 좌인 패왕권 구일엽의 아들이자, 패왕보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이번 정천맹의 개파 대회와 함께 열린다는 잠룡전에 참전하기 위해 출전했으며, 자신의 가문인 패왕보의 위명을 드높이고자 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맞이한 첫 관문부터가 크나큰 난관이었다.
‘우리 패왕보가 섬서에서 그저 그런 문파는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후계자들이 밥 먹듯 영약을 먹고 자라는 다른 대문파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즉, 내게는 너무나 불리한 시험이구나…….’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아비인 구일엽이 힘들게 힘들게 구해 온 영약을 먹으며 다른 이들보다 나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으나, 그게 이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릴 정도의 내공을 쌓아주지는 못했다.
그나마 기초 체력이 검객이나 도객보다는 나은 권사라는 점에서 이점이 있기는 해도, 그간 단련해 온 방식이 이런 무식하게 큰 돌덩이를 옮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아니야!! 나약한 생각 따위는 하지 말자!’
그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약해지려는 자기 자신을 다 잡았다.
‘나는 패왕보의 후계를 잇는 남자다. 더군다나, 하필 아버님께서 괴한에게 부상을 입고 온 시점에선 내가 함께 온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그 역임을 다 해야 해!’
자신의 명예가 이제 패왕보의 명예와 동일선상에 오른 시점에서, 구중보는 설령 인간 구중보가 못할 일이라도 패왕보의 후계자 구중보로서는 해야 한다는 위업을 두 어깨 무겁게 느꼈다.
“평가관님!”
“무슨 일이오?”
“혹시, 내공을 한 번 운기한 뒤 해도 되겠습니까?”
만전의 상태로 만든 뒤 심기일전의 상태로 도전한다.
그 전략을 세우기 전 한 손을 번쩍 들고 지나가는 평가관에게 묻자,
“풋― 마음대로 한번 해보시오.”
평가관은 같잖다는 듯한 반응을 돌려줬다.
그 반응이 심히 모욕적이었으나,
‘후, 다행이다.’
어떻게든 일차 예선을 통과해야만 하는 그에게는 수치심이든 모욕감이든 느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그런 방식으로 이 시험을 통과해 봐야 본선은 얼마 가지도 못할 거라는 비웃음을 듣는다고 해도, 그 일 차라도 통과하는 게 그에게는 최선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야심 차게 약식 운기조식을 마친 뒤 전신에 뜨듯하게 흐르는 내공을 바탕으로 거대한 바위를 움켜잡았다.
두 팔을 넓게 벌려 안듯이 해도 다 잡을 수 없는 바위를 향해 용을 쓰는 순간―
“…크흡?!”
어마어마한 중력이 그를 짓눌러오는 걸 느꼈다.
‘무, 무겁다!! 허리가 끊길 것 같아……!!’
이러다간 후계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신의 대에 패왕보의 명맥이 끊기는 게 아닐까 싶은 무시무시한 위기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 그 순간,
“아들아.”
흐릿해지는 의식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버지?!’
“너는 장차 패왕보를 잇는 다음 대의 패왕권이 될 것이다.”
그것은 회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줄곧 해오시던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그리고, 비록 이 모자란 아비는 부족하여 닿지 못했던… 섬서 십 대 고수에 그 이름을 올릴 것이다.”
고작해야 백 대 고수밖에 되지 못했던, 회한 가득 서린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이 아비가, 반드시 그리 만들어주마.”
그 속에서 다짐하던 아비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끄으아아아아아아아아!!”
구중보 일생일대 최고의 용력이 솟구쳤다!
“나는… 나느느느느으으으으은!!”
꾸욱……!
한 걸음,
“패왕궈어어어어언!!”
두 걸음,
“구중보다아아아아앗!!”
세 걸음―
콰앙!!
“쿠에에엑……!!”
“통과!”
난관을 넘어섬과 동시에 시험관의 합격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울혈이 치솟았지만, 그조차 달게 느껴질 만큼 기다리던 목소리였다.
‘해, 해냈다!! 내, 내가 해냈어!!’
인간 구중보가 자신의 한계를 한 걸음 넘어선 것이다!
그 성취감에 젖어 드는 그때,
“뭐야, 고작 이게 시험이야?”
나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으니,
“에휴. 별게 다 있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것은,
콰앙―
“끝이죠?”
“그, 그렇네…….”
힘겹게 두 팔로 바위를 안듯이 하여 옮긴 자신과는 달리, 한 손으로 퍽― 하니 밀어서 열 걸음 밖으로 굴려버리는 어느 참가자의 무심한 모습이었으니,
“자네… 이름이 뭔가?”
“저요?”
실로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참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사천당가 소속, 당불퇴요.”
* * *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도, 누군가에게는 식은 죽 먹듯 간단한 일이고는 했다.
이번 일 차 예선이 그러했다.
“대형이 분별력을 가린다고 해서 긴장 좀 했는데, 진짜 별거 아니네.”
“어허, 이놈 불퇴야. 말을 조심하거라.”
사람 크기만 한 바위 옮기기?
그건 당불퇴가 굳이 중단전의 힘을 발휘하지 않고서도 가뿐히 해낼 만큼 쉬운 시험이었고, 이 사항은 당지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야 새벽마다 약초를 캐고 다녔으니 쉬울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매일 새벽마다 몸에 수십 근 무쇠 족쇄를 매달고 절벽을 오르는 이들이다.
등에는 몸통보다 더 커다란 지게를 매고 다녀야 했는데, 그 안에는 항상 사천 주변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 기세로 캐고 다닌 약초가 그득 담겨 있었다.
‘약초라 한다면 가볍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유혼이 요구하는 약초 채집량을 달성시키려면 약초가 상하지 않는 선에서 바구니에 꽉꽉 눌러 담아야 했기에,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덕분에, 당불퇴는 물론 당지명 역시 가볍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고, 남들 곡소리 내는 일차 시험을 가볍게 통과한 그들은 심드렁하게 이차 예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이 차 시험을 시작하겠소! 삼 조 인원들은 모두 연무장 위로 올라와 주시오!”
“아, 제 차례네요.”
“잘 다녀오거라.”
그렇게 시작된 이 차 예선은 다인전(多人戰)이었으니, 연무장에는 대여섯 명도 아니고 무려 사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올라섰다.
‘참 무식한 방법이야.’
사십 명을 동시에 싸움 붙여 단 네 명만 합격시키는 시험이라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생존전(生存戰)이 아닐 수 없었다.
‘지명 형님은 이게 눈치 싸움이라고 했지?’
평소에는 비등비등한 상대라도, 일대일 대결이 아닌 다인전이 복잡하게 벌어지게 되면 어떤 눈먼 칼에 일격을 맞고 쓰러질 수 있다고.
체력을 온존하고 살아남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는 게 당지명의 조언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당연하게도, 당불퇴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시작하자마자 서른여섯 명 전부 쓰러트리면 되잖아.’
구석 끄트머리로 가서 가장 가까이 있는 놈부터 해치운다. 그걸 서른여섯 번쯤 반복하면 경기는 끝나 있을 것이고, 그전에라도 다른 이들끼리 싸워서 몇몇 줄어들어 있으면 빠르게 끝날 것이다.
‘그게 진정한 체력 보존이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한 당불퇴는 무대에 오름과 동시에 구석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비무장 밖으로 밀려나면 장외 패이기에 남들은 선호하지 않는 자리였으나, 당불퇴는 연연치 않았다.
그리고, 심판이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당불퇴는 자신의 첫 상대를 찾아보려 했는데,
“이놈!! 당가의 악적!!”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응? 대형이 여기 올라왔나?’
아주 당연하게도, 당유혼을 찾는 목소리인가 싶었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너를 여기서 만나게 되는구나!!”
웬 덜 자란 녀석이 자신의 앞으로 파바밧! 뛰어오더니 두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게 아닌가.
“…뉘신지?”
이런 취급 받은 건 또 처음인지라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그의 앞에선 청년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아니, 너에게는 그 정도의 죄책감도 없겠지! 나는 네놈의 비열한 암수로 몸져누우신 섬서 백 대 고수, 패왕권 구일엽의 아들 구중보다!”
쩌렁쩌렁 목소리가 비무대 위로 울려 퍼졌다.
다들 눈치만 보던 중 홀로 외친 목소리는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정작 몸져누워 있을 구일엽이 들었다면 사정없이 이불을 걷어찼을 외침을 뱉은 구중보는 오로지 당불퇴 하나만을 바라보며 존재감을 발했다.
“…비, 비열한 암수?”
억울하다. 진짜 너무 억울하다.
“야, 이 자식아! 날 언제 봤다고 네가 그런 모함이야?! 내가 우리 대형도 아니고!!”
그의 대형 당유혼이라면 모를까, 당불퇴는 평생 하늘에 부끄러움 한 점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다 자부했다.
언제나 정면 승부로 자신의 적수와 싸워 이겨 왔고, 뒤치기를 당한 적은 있어도 뒤치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에 항변했지만,
“이 오만한 악적아! 너는 진정 일주일 전 국밥집에서의 기억이 나지 않느냐?!”
“…국밥집?”
일주일 전이면 대충 휴가를 받았을 때인데?
“…아, 거기서 행패를 부리던 검수랑… 그, 권사?”
중년의 남성 두 명이서 자신의 단골 국밥집에서 행패를 부리다 자신이 중재한 것이 기억이 났다.
“야, 잠깐만. 그럼 내 잘못 아니지. 난 거기서 행패를 부리는 걸 중재한 죄밖에 없다고!”
“웃기지 마라! 우리 아버지께서 검을 빼 휘둘렀느냐, 본인의 주먹을 휘둘러서 탁자를 박살 내기라도 했느냐!”
“으응……?”
억울한 듯 외쳐도, 돌아오는 건 더 큰 외침뿐이었다.
“우리 아버지께 듣고, 그 당시 있던 식당의 다른 분들에게도 혹시 피해를 입혔을까 찾아가서 증언을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경쟁자이자 같은 섬서 백 대 고수 백학검객 장산해의 횡포를 말리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 무시무시한 암수를 가해 주변 탁자 및 기물을 박살 낸 것은 네놈의 소행이 아니냐?!”
…그, 그런가?
“아, 아니……. 그래도 당신 춘부장께서 기세를 흘려 다른 이들에게 핍박을…….”
“그거야말로 개소리다! 그렇게 따지면 네가 흘린 기세는 뭐냐? 막말로 네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강하다면, 네가 흘린 기세는 착한 기세고 우리 아버지께서 흘린 기세는 나쁜 기세냐?!”
“…….”
하나하나 쑤셔오는 언변이 어지간한 암기보다 예리하다.
당불퇴의 양심이라는 것이 마구마구 난도질당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