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 구중보 】
이건 좀…….
장내의 모든 시선이 같은 감정을 담고 당불퇴에게 쏟아졌다.
당불퇴 역시 아비를 해한 원수가 된 기분에 억울함이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항변하기엔 늘어놓은 사실들이 반박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당불퇴의 정신을 먼저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버린 구중보는 이윽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달려들었으니―
“이 악적 놈!!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다!!”
“어지럽네…….”
마냥 당해줄 수도 없는 노릇, 당불퇴는 재빨리 반응하며 손을 뻗었다.
차양십이수(遮陽十二手).
뇌명타(雷鳴打).
차양십이수의 열두 동작 중 쾌(快)를 상징하는 일수가 구중보의 명치를 두들겼다.
“컥!”
의기는 갸륵했으나 무예는 따라주지 않았던 구중보는 달려오다 말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허물어졌으니,
“…일단 좀 쉬고 있어라.”
그를 제압한 당불퇴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상대들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좀 미안하긴 한데,
“오늘 본 것들, 다 잊어줘야겠다.”
당가불퇴진무(唐家不退進武).
청야권(靑野拳).
사나운 권풍이 비무장 위를 몰아쳤다.
* * *
당불퇴의 비무장은 빠른 속도로 정리가 끝났다.
시작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당초 계획대로 일단 보이는 대로 전부 쓸어버린 덕에 네 명이 남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고, 살아남은 네 명 중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구중보도 포함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당지명은 ‘허허 역시 이놈의 가문, 성을 갈든가 해야지…’라며 다 포기해 버린 듯한 혼잣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차례에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계획대로 하면 된다.’
당불퇴에게 말했듯, 최대한 안정적이게 버티면 무사히 본선까지 갈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며 비무대에 올랐는데,
“…왜 하필 그대가 내 상대에 있는지.”
거기서 마주한 상대는 철검 한 자루를 한 손에 쥐고, 반대 손 자루에는 검집을 쥐고 있는 검객.
전에 봤을 때와는 또 괄목상대한 성장세를 보이는 진혁수가 그곳에 있었다.
“운이 좋군.”
진혁수 역시 당지명을 발견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말이오?”
“그대가 내 상대라는 것이.”
“하하…….”
당지명은 생각했다.
‘왜 내 주변에는 미친놈밖에 없지?’
얘도 예전에는 이 지경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기,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말인가?”
“우리의 목표는 본선으로 올라가고 이 비무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대 역시 사문의 명예를 빛내고 싶다면, 굳이 이곳에서 나와 승부를 결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싸우자, 응?
살살 달래보는 당지명이었지만,
“어떨 것 같소?”
“…뭐가 말입니까?”
“지금 내 모습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모습 같소?”
“말을 말아야지…….”
집안에도 미친 놈들이 가득한데, 집 밖에도 미친 놈이 있네?
미친놈들의 세상에 떨어져 버린 기분에 당지명이 좌절하고 있자니, 위로인 듯 아닌 듯 진혁수가 말해 왔다.
“그리고, 이건 당신을 위한 제안이기도 하오.”
“뭐가 날 위한다는 겁니까?”
“당신들이 따르는 그 남자가 만약 이 장면을 보고 있다 칩시다.”
“…그런데요?”
“당신이 날 놔두고 물러섰다는 모양새가 나오기만 해도… 과연, 그대가 무사할 것 같소?”
“젠장 할.”
정답이다.
백 일 동안 대형과 합숙했다더니, 진짜 우리 대형을 빠삭하게 깨우쳐버렸다.
“후우… 한 판 해봅시다.”
“바라던 바.”
당지명이 한숨을 내쉬며 투지를 일으키자, 진혁수는 기다렸다는 듯 환히 웃으며 자신의 검을 들었다.
“먼저 갑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다.
무공명(武功名) 미정(未定).
거미의 춤.
광란(狂亂).
아직까지도 그 이름을 짓지 못한 무공이 펼쳐지며 소매 폭에 감싸여 있던 은사들이 비무장 위를 가득 채웠다.
가만히 있던 무인들에게는 재앙이었고, 그 목표물이 된 진혁수에게는 죽음이 밀려오는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은사인가? 내공을 담아 절삭력은 도검과 같을 테니, 수십, 수백의 칼날이 몰려오는 것만 같군.’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도 담담히 그 현상을 분석해 낸 진혁수는 그 자리서 즉시 너풀너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적하만연(赤霞萬演).
은사가 비무장 한쪽을 가득 채우자, 진혁수는 반대편에서 붉은 노을을 만들어냈다.
그의 검무에 따라 붉은 기운이 연무장을 채워 갔고, 검기와 부딪친 은사는 더 이상 자신의 범위를 늘리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이걸 이렇게 막아낸다고?’
검기로 광범위한 지역을 막아내는 기예는 가히 검막(劍幕)의 광범위한 확장과 같았다.
은사라는 물리적인 도구의 도움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검기(劍氣) 하나만으로 비슷한 현상을 만들어낸 진혁수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탄이 흘렀다.
하지만 당지명이라고 마냥 감탄만 할 생각은 없었으니,
‘하면, 이건 어떻게 막아내는지 볼까.’
그의 손이 움직이며, 또 다른 선율을 만들어냈다.
무공명(武功名) 미정(未定).
서풍(西風)의 광시곡(狂詩曲).
폭풍도(暴風島).
카카가가각!!
더더욱 거칠고 빠르게 휘몰아치는 은사는 폭풍과 같았다.
오로지 자신이 선 자리를 제외하고는 사나운 은빛 폭풍이 몰아치니, 진혁수가 만들어냈던 붉은 노을 역시 갈가리 찢어발겨져야만 했다.
‘재밌군!’
그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진혁수는 미소 지었다.
‘내 검기를 이런 방식으로 찢어낸다고?’
확실히 효율은 저쪽이 더 좋았다.
은사라는 물리적인 수단이 있기에 더 적은 내공으로도 공간을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난번 장기 합숙의 결과 당가에서는 무지막지한 영약을 퍼먹는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내공 양에서도 자신이 밀린다는 결과를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방법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한점 돌파 전략을 이끌어 내는 것이겠지.’
내공을 갑옷처럼 두르고, 가장 약한 부위를 파고들어 본체를 공략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최선의 방법을 수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잖아.’
쉬운 길을 택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서 당지명과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혁수가 원하는 것은 흐릿한 검로를 명확히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전투를 필요로 했기에, 그는 최선보다는 최악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더 넓게 퍼지기에는, 노을보다는 구름이겠지.”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청운유수(靑雲流水).
붉은 노을이 찢겨진 자리, 다시금 검무를 추기 시작하는 진혁수로부터 이번엔 푸른 검기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물처럼 흐르는 푸른 구름은 은빛 폭풍과 곧바로 맞부딪쳤고, 이전번의 노을처럼 갈기갈기 찢겨 갔다.
하지만 구름은 노을과 달리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런 미친, 지금 여기서 소모전을 펼치자고?’
당지명이 생각해도 진혁수가 채택할 최선의 방법은 일 점 돌파였다.
그러나 펼쳐진 것은 최악의 방법인 영역을 다투는 싸움이었으니, 누가 먼저 내공이 떨어지냐가 승부를 판가름할 열쇠가 될 듯했다.
‘대체 왜… 아, 그렇구나.’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할까 싶었는데, 그런데 또 가만 보니 마냥 멍청한 방식은 아니었다.
‘젠장 할, 검무(劍舞).’
그의 눈에 검무를 추는 진혁수가 보였다.
검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푸른 검기가 곧 푸른 구름이 되었는데, 그 효율이 일견하기에도 무시무시했다.
‘저딴 게, 검술?’
소모전이라 해서 마냥 은사를 휘두르는 당지명만 유리한 건 아니었다. 당지명으로서는 은사 전체에 내공을 두르는 작업을 계속해야 했고, 진혁수는 검기 자체를 뽑아내는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래도 처음엔 자신 쪽이 유리할 줄 알았는데,
‘검기를 뽑아내는 효율이 말도 안 되잖아?’
푸른 구름은 만들어내는 데는 단순히 검기만 섞인 게 아니라, 이미 흐름을 장악한 검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검풍도 있었다.
한번 바람을 불기 시작하면 더 이상 힘의 소모가 별달리 없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한 듯, 너풀너풀 추기 시작한 검무는 그것이 멈추어지지 않는 이상 엄청난 효율로 검기와 검풍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이대로라면 효율 계산이 안 되는데!’
당장 달려가서 저 검무를 멈추듯 해야 답이 나올 듯하지만, 괜히 지금 펼친 무공에 갖다 붙인 이름이 폭풍도(暴風島)가 아니었다.
한 번 펼치면 효율은 좋지만, 자기 자신도 섬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
‘진짜 미친 소모전을 해보자 이건가?!’
그렇다면 이제부턴 자존심 싸움!
누가 먼저 이 대결에서 쓰러질지,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각자의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즐겁군, 후후후…….’
‘여기서 지면, 대형한테 죽는다!’
즐기는 자와 즐길 수 없는 자의 자존심이 팽팽히 맞부딪쳤다!
그런데,
“멈추시오!!”
별안간 들려온 외침이 그들의 싸움을 일단락시켰다.
“이런 미친 작자들 같으니! 지금 다들 무엇을 하는 것이오?”
당연 그 외침의 주인은 이 차 예선을 맡은 평가관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시오! 연무장이 다 엉망이 되었잖소!!”
황급한 외침에 슬쩍 고갤 돌리니,
“…아.”
완전히 박살이 난 연무장과 그들의 대결에 휘말릴 뻔하다 허겁지겁 도망쳐서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험생들이 보였다.
“쯧쯧, 승부를 결하라 했더니 둘만 남기고 전부 쫓아내 버렸군.”
“그, 그럼…….”
“보면 알잖소? 두 명 다 합격이오.”
그들의 장렬한 싸움은, 꽤나 허무한 결말로 맺어졌다.
* * *
이 차 예선은 그렇게 끝을 맞이했다.
확실히 쭉정이들을 걸러내기 위한 시험임을 증명하듯 쓸려 나갈 이들은 빠른 속도로 탈락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 없냐면 당연 그건 아니었다.
“자네들 당가의 그 두 형제들을 봤는가?”
“아아, 그 광기 어린 형제들 말인가.”
일단 첫 번째로 당지명과 당불퇴가 영광스러운 첫 두 자리를 맡았다.
“한 명은 권풍으로 몰아치고, 한 명은 은사를 휘둘러 함께 시험을 치른 이들을 내쫓았다더군. 쯧쯧, 그렇게 독할 필요가 있나 싶어.”
그들의 싸움은 화끈하다면 화끈하긴 했지만, 너무 화끈해서 문제였다.
사람들은 감탄하기보다는 혀를 내두르기 바빴다.
“그래도 확실히 강력한 우승 후보기는 해.”
“흠, 우승 후보? 그렇긴 한데…….”
“확실히 다른 쪽이 더 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이 점치는 이들은 다른 쪽이었으니,
“그렇다네. 나는 역시 오호도가 먼저 떠오르는군.”
오호도(五虎刀).
이번 잠룡전에 참가한 팽가의 소가주가 그 주인이었다.
“당가의 두 형제가 참전한 곳과 달리, 오호도의 비무대에는 하필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지.”
“아아, 그렇고말고. 섬서 십 대 문파에 들어가는 이들과 귀주와 중경, 광서에도 이름난 이들이 고루고루 모였다더구만.”
달리 지옥의 조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호도는 그들 전부와 맞서 싸웠다.
“전부 덤벼! …크, 진짜 남아의 기개 느껴지는 명대사가 아닐 수 없네.”
비무대에 올라서자마자 그렇게 선언한 오호도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일 대 삼십구의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전원 장외 패를 시켰으니, 적수의 이름값으로 하든 개인이 보인 무력으로 하든 그야말로 강력한 우승 후보지.”
다들 적잖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 역시 모두의 동의를 얻어내진 못했고,
“글쎄. 나는 생각이 다른걸.”
“쯧, 역시 그런가?”
정작 오호도를 우승 후보라 말한 이 역시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름이 있었으니,
“나는 역시, 창천검룡(蒼天劍龍)이 우승할 듯싶네.”
“확실히, 그 모습을 보자면… 할 말이 없지.”
어찌 그 모습을 잊겠는가?
“비무대에 올라, 단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않고 남은 서른아홉을 전부 무릎 꿇렸으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