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챙그르르…….

철검이 땅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마일영에게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보다 더욱 크게 다가왔다.

‘내가… 검극을 놓쳤다고?’

상대방의 검격을 놓치는 건 검수로서 아무 초보적인 실수.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끝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고 그 끝을 눈에 담지 못하면 그건 검수로서 실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수를… 이 마일영이 해버렸다고?’

믿기지 않아 파르르 떠는 그에게 진혁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 끝으로 상대방의 검을 쳐올려 눈앞에 떨어트려 주는 작은 기예를 선보인 그가 말했다.

“검을 잡으시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가 끝낼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진혁수의 모습은 오연하기 그지없었고,

“이이익!! 요행으로 이득을 취한 주제에 건방지구나!!”

무언가 뚝 끊어지는 기분에 마일영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에,

“요행?”

진혁수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상대가 뱉은 단어를 되뇌었다.

“…큭!”

그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으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이 이는 걸 느낀 마일영이 다시금 검세를 취했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바라던 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모습에 마일영은 다시금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리며 천하삼십육검을 펼쳐냈다.

‘놈은 쾌검에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쾌(快)를 제압하는 강(强)으로 간다!!’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뇌령인(雷零印).

쩌저저정!!

천둥이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강검(强劍)이 내리꽂혔다.

이번에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혁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번엔 강검인가.”

아쉽게도, 그가 만든 검에는 이렇다 할 강검류가 없었다.

그렇다면,

‘능유제강(能柔制强).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적하만연(赤河蔓延).

청운검이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내리 찍히는 마일영의 검극을 받아냈다. 금방이라도 청운검을 때려 부술 것만 같던 철검은 그 곡선의 궤적에 떨어지는 순간, 방향감을 상실하기라도 한 듯 청운검이 그리는 궤적에 따라 움직였다.

“헙?!”

그리 강한 힘도 아니건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 검극의 이동에 마일영은 당혹성을 내뱉었다.

단순히 검의 제어권만 뺏긴 게 아니라, 몸의 균형 자체가 흐트러진 상태였으니 마일영은 이를 악물려 검병에 내공을 주입하며 강하게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크학!!”

가까스로 검을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흐름에 벗어난 운기의 결과로 내기가 역류하며 울혈이 역류했다.

피를 토하는 마일영이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는 동안에도 진혁수는 얌전히 검극을 내뻗을 뿐, 굳이 쫓지 않고 제 자리에 머물렀으니―

‘이, 이놈이…….’

마일영은 너무나 치욕스러웠음에도, 상대가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를, 나를 농락하는 거냐!!”

그에,

“농락?”

진혁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툭 하고 내뱉었다.

“나는 그런 악취미적인 유희 따위 즐기지 않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에게 그만한 흥미도 없지만.”

지금의 진혁수는 사시사철 열두 시진 갈증에 허덕이는 상태였다.

하루라도 더 빨리 꿈결에 본 것만 같은 검의 궤적을 완성하는 게 우선이었지, 괜히 시답지 않은 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서 감추지 말고 보여주시오.”

구파일방이라는 그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해 달라고.

진심을 담아 말해 오는 진혁수의 말에 마일영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이 자는… 진심, 이구나.’

자신처럼 상대를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조금도 없다.

처음에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자의 안중에는 이미 나 같은 건 조금도 없는 거다…….’

손뼉이 마주쳐야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듯, 시비도 급이 맞아야 붙는 것.

진작 자신을 적수로 여기지 않는 이에게 무슨 도발을 하고 무슨 분란을 일으킬까.

“으으으으…….”

그 사실을 익히 깨달아버린 마일영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설령 패배한다 해도, 이렇게 비루하게 패배할 수는 없다.

“나는!! 나는, 종남의 마일영이다!!”

자랑스러운 구파일방 중 하나, 종남파의 일대 제자란 말이다!!

천하삼십육검법(天下三十六劍法).

천하밀밀(天下密密).

그의 검이 화려한 검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휘둘러졌고,

“흠.”

그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진혁수는,

“허무하구려.”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단천일뢰(斷天一雷).

번쩍!!

무수히 뻗어오는 검기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찔러넣었다.

“크헉!”

가슴팍이 베인 마일영은 피 분수를 뿜어내며 허물어졌다.

‘깊게 베지는 않았으니, 조금만 정양하면 회복될 테지.’

승부가 결정되었음을 확인한 진혁수는 이젠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렇게 승부가 결정 나고,

“…더 강해졌군.”

그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당지명은 솔직한 감탄을 토했다.

‘우리도 게을리 수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저쪽은 대체 뭘 한 거야?’

대형과 싱글벙글 합숙 훈련을 했다더니, 숫제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역시, 나도 게을리해서야 안 되겠어.”

구파일방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깨지며 생긴 허무감?

‘역시, 구파일방도 구파일방 나름인 거야.’

그딴 건 바로 완치되어버린 당지명이었다.

* * *

삼 차 예선이 모두 끝난 날, 사천성도 내에는 그간 있었던 비무 내용으로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그건 사천당가 역시 마찬가지.

“야, 너희 그 경기 봤냐?”

“무슨 경기?”

“오호도 비무 말이야.”

“아, 그거 나도 봤다. 중소 문파들의 기대주라는 도객을 사정없이 후드려 패던데?”

이 경기 봤냐, 저 경기 봤냐 하며 비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던 방계들은 자신들이 봤던 역대급 비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며 대리 만족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시끌벅적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응?”

마침 정문 쪽에서 떠들고 있던 방계들의 눈에 웬 청년 하나가 정문 쪽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난 모르는데?”

“나도.”

어째 우물쭈물하는 게 영 찜찜했던 방계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 곧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우리가 가보자.”

척척척―

“누구슈?”

정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당적삼이 슥 고개를 내밀었다.

“헙?!”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보법에 특히 자신이 있는 당적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나타나자 깜짝 놀란 청년은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뭐, 뭐여?’

그렇게 되자 더 놀란 건 당적삼이었으니,

“어어? 왜 이러슈?”

“야, 이놈 적삼아! 왜 손님을 괴롭히고 그래?”

“나,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네 면상을 봐라, 네 그 흉측한 걸 들이밀었으니 놀라겠지!”

“아니, 근데 이 자식이?!”

당가 내부에서도 자체 잠룡전이 펼쳐지기 직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청년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패왕보의 소가주, 구중보라고 합니다!!”

“…패왕보? 거기가 어딘데?”

“너희는 아냐?”

“나야 모르지.”

“나도.”

사천 외부의 일은 아는 게 없는 그들이 머리 위로 갈고리만 연신 띄우고 있으니, 그 대담에 시무룩해진 구중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섬서 쪽에 있는 문파입니다.”

“섬서? 이야, 멀리도 오셨네. 그런데 여긴 왜 오셨대요?”

“아, 나 그거 알아. 사업 문의죠?”

그나마 돈 머리가 굴러가는 방계 하나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저희 당가가 또 사업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접객당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 그게 아닙니다!”

“…그래요?”

시무룩―

기껏 아는 척했다가 틀린 방계 하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야유가 그쪽으로 쏟아지는 동안 당적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뭐 때문에 오셨데?”

“그…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사람요?”

“예, 그렇습니다.”

이게 맞는 걸까.

스스로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그 미혹을 잠재우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구중보가 말을 이었다.

“당불퇴 소협을 뵙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 * *

당가의 방계들이 한참 잠룡전 삼차 비무 이야기로 소란스러울 때, 당불퇴는 내면의 혼란으로 소란스러웠다.

“아니, 대체 왜?!”

당불퇴는 최대로 억울했다.

“예. 잘 싸웠지요. 아주, 자알~ 싸웠습니다.”

“얼마나 잘 싸우셨는지, 아미파의 여승분께서도 홍조를 감추지 못하셨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사이 그 여승 분과는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대화는 무슨 대화를 말하는 거야?!”

그건 바로, 지난 삼 차 비무가 끝난 뒤 유독 쌀쌀맞게 변해 버린 적세희의 반응 때문이었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멋있다고 할 줄 알았는데?!’

무려 사천삼주의 촉망받는 기재를 정면 승부로 압도했다.

거기다, 그간 당가에게 피해를 끼쳐 온 아미파의 무인에 대해 굳이 사사로운 원한을 언급하지 않고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나, 좀… 멋있을지도?”

한창 스스로에게 취해 있던 당불퇴였기에, 적세희의 반응은 너무너무너무 억울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그렇게 당불퇴가 고뇌하는 동안 손님이 찾아왔다.

“불퇴야, 너 손님이시라는데?”

한창 내적 갈등에 빠져 있는 당불퇴에게 당적삼은 구중보를 데려와 툭 하고 던져놓고 갔다.

둘 다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인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구중보.

“다시 뵙습니다! 패왕보의 구중보입니다!!”

“어… 그러니까, 당신은…….”

이 차 예선에서 만났던 그…….

“편히 불러주십시오! 알아보니 제가 형님보다 나이도 어립니다!”

“그, 그래?”

그 와중에 그런 건 언제 조사했냐 싶기도 하다만, 부지불식간에 형 동생 자리를 꿰찬 구중보가 부러져라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지난날 오해가 있어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오해……?”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쾌차하시고, 당신께서 말씀하시길 국밥집의 일은 스스로의 우(愚)가 있었다고 하시며 형님께 사과를 드리고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어, 어… 그, 그렇다면야…….”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연이어 혼란스러운 상황이 닥쳐오자 당불퇴로서는 눈만 껌뻑였다.

‘갑자기?’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연신 혼란스러워하는 당불퇴.

그리고, 그 눈치를 살피던 구중보가 눈에 이채를 띠더니 돌연 소리쳤다.

“형님! 저는 형님의 그런 대협스러운 풍모에 감탄했습니다!!”

“…대협? 내가?”

“예! 그렇습니다! 그런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저를 배려해 주시고, 이 차 예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형님의 모습에서 이 구 모는 감탄 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상대하기 어렵다.

이런 인간은 또 처음 보는지라 당불퇴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갈 때,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구중보는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형님! 부디 그런 대협의 풍모를!! 이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