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구중보.
그는 패왕보의 후계자였다.
패왕보는 섬서에서 이름 높은 명가 중 하나로, 대대로 이름난 권사를 배출해 온 무가이기도 했다.
당장 그의 아버지인 구일엽 역시 섬서 백 대 고수에 드는 무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아비는 어릴 적부터 늘 구중보에게 이리 말해 왔다.
“아들아, 너는 장차 자라 이 섬서를 지키는 훌륭한 무인이 되거라.”
만가쟁패라 불리는 이 혼탁한 시대에 그 말은 구중보에게 금과옥조가 되었다.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고 싶었다.
왜냐면, 구중보는 패왕보가 좋았기 때문이다.
섬서를 지키는 패왕보가 좋았고, 그런 패왕보를 자신이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쉽지 않았다.
“뭐? 사업체가 또 끊어졌다고?”
“예… 흑도방과 계약을 체결했다고…….”
“흑도방이라면 새롭게 등장한 사파 무리가 아닌가?”
만가쟁패의 시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탐하려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런 세상에서 두 주먹만 가지고 무식하게 살아가는 패왕보는 너무나 무력했다.
“백학검문이 흑도방과 결탁했다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의 경쟁자라지만 그들은 백학과 같이 고고한 이들이다.”
“…이게, 이게 정말인가?”
한때 선의의 경쟁자라 여기던 이들도 공명정대함을 잃고 사사로움에 빠져드는 일이 벌어지고, 그의 아비는 평생 쫓아왔던 이상과 정의가 뒤흔들리는 충격에 빠져 실의에 젖은 채 몇 날 며칠 술에 취해 슬픔을 삼켜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쇠퇴는 계속되었으니, 정천맹의 등장은 마른하늘의 단비와 같았다.
“역시! 아직 이 땅에 협과 의는 살아 있구나!”
정천맹의 설립 소문이 들려오자마자 구일엽은 온 짐을 싸 들고 사천으로 갈 채비를 했다.
“가자꾸나. 아직 이 땅에 협의를 부르짖는 이가 있다면, 당연 우리도 한 손 거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정말 모처럼 이제는 빛바랜 가치를 아직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들뜬 그의 아비의 모습에 구중보는 환히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 * *
“그리하여, 저는 아버지와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구중보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흑흑,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너무 감동적이야…….”
“당불퇴, 이 금수만도 못한 놈. 그런 이들에게 해악을 끼쳐?”
듣고 있던 방계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당불퇴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에 구중보는 허겁지겁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형님과의 마찰은 다 오해였습니다!”
“와, 저런 놈도 변호해 주다니!!”
“너 이 녀석, 대체 얼마나 착해 빠진 거야?!”
무수히 쏟아지는 악수의 요청.
그걸 지켜보던 당불퇴는,
‘뭐라는 거야, 미친놈들이…….’
왜 남의 쉬는 시간에 우르르 몰려와 이러는 걸까?
애초에,
“너희 아까 돌아가지 않았냐?!”
분명 구중보를 툭 하고 던져주고 갈 때만 해도 자기는 할 일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가버린 당적삼을 필두로 하여, 어느새 방계놈들 열댓 명도 넘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건 그거고.”
“심금을 울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돌아가겠냐?”
“그래, 넌 어서 수락이나 해.”
“…내 의사는? 내 생각은?”
이미 들어먹을 생각이 없는 형제들을 보며 당불퇴는 인상을 찌푸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이름이 구중보라고?”
“넵! 편하게 부르십시오!”
“후…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건 도저히 안 되겠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누굴 가르치거나 살필 여력이 안 된다.”
그러니까,
“돌아가라고?”
“우우우, 나쁘다!!”
“치사하다!”
“지독하다!”
“아니, 너희가 왜 대신 답하냐고!!”
말을 떼기도 전에 한마디씩 거드는 방계들을 보자니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아, 몰라! 어쨌든 안 돼!”
나 하나 챙기기도 바쁜데 누굴 가르치긴 무슨.
당불퇴는 단호하게 말했다.
암만 마음의 빚이 있어도, 지난번에 이 차 예선 통과시켜준 걸로 다 갚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하면 돌아가리라,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 *
“후우우…….”
소란스러운 것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남은 시간, 당불퇴는 고뇌에 휩싸여 있었다.
‘적 소저…….’
삼 차 예선이 끝난 지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까지 적세희는 쌀쌀맞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멍하니 들판에 앉아 흔들리는 꽃을 보며 근심 걱정을 하고 있으니 배가 고파졌다.
꼬르륵―
“생각해 보니 뭘 안 먹은 지 꽤 됐구나.”
배가 고프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덩이덩이 져서 흘러간다. 그게 닭꼬치처럼 보였다.
“닭꼬치 먹고 싶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불쑥 닭꼬치가 내밀어졌다.
“아, 고마… 허억?!”
깜짝이야.
“뭐, 뭐야, 너!”
“형님의 충성스러운 동생, 구중보입니다.”
한 손에는 닭꼬치, 한 손에는 술병이라는 완벽한 조합을 갖춘 구중보가 당불퇴의 손에 닭꼬치를 쥐여준 뒤 품에서 술잔까지 꺼내 건넸다.
쪼르륵―
“쭈욱! 들이키십시오, 형님!”
“뭐래는 거야, 미친놈아!”
암만 근심 걱정에 빠져 있었다지만 이 녀석이 접근하는 걸 몰랐다니, 오슬오슬 드는 소름에 당불퇴는 허겁지겁 자리를 옮겼다.
* * *
우물우물.
…툭.
‘…이상하다, 왜 맛이 없지?’
배가 고파 찾아온 곳은 단골 국밥집.
언제나 든든한 한 끼를 제공해 주던 국밥집을 찾아왔는데, 오늘따라 든든함이 부족했다.
어째서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덜컥―
“주문하신 족발입니다.”
“…예?”
점소이가 다가오더니 푸짐한 족발 한 접시를 내밀었다.
“저 이거 주문한 적 없는데요?”
“저쪽 손님분께서 주문해 주셨습니다.”
“저쪽 손님이라니… 허업?!”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당불퇴의 눈에는 보였다.
건너편 탁자에 앉아 엄지를 척― 세우고 있는 구중보의 모습이.
“형님! 든든하게 드시고 나오십쇼!!”
그리고는 호다닥 뛰쳐나가는데―
“미, 미친 놈…….”
처음으로 체하는 경험을 할것 같았다.
* * *
“끄으응… 역시, 속이 체했나…….”
음식에는 죄가 없다고 믿는다.
의도를 알 수 없게 배달된 족발이지만, 일단 배고픈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우걱우걱 배 속에 집어넣은 당불퇴였고, 그 결과로 훌륭하게 배탈이 나버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뭐, 뭐야? 이파리 다 떨어졌었어?”
볼일 보고 뒤처리용으로 쓰는 널찍하고 부드러운 호박잎이 다 떨어져 있었다.
“좀 다 쓰면 채워 넣지…….”
이 찜찜한 기분을 어찌할꼬… 고민하고 있는데,
퉁퉁―
갑자기 옆 벽에서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를 내더니―
직후, 위쪽 창문으로 호박잎이 잔뜩 달린 줄기가 스르르르 내려왔다.
“존경합니다, 형님.”
“…아.”
물러나지 않는 남자 당불퇴.
생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 * *
“야, 이 자식아!!”
안 되겠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가만히 쉴 때나, 밥 먹을 때나, 하다못해 뒷간에 갈 때까지.
숨 막히는 듯한 공포감에 몸서리치던 당불퇴가 결국 구중보를 찾아 나섰다.
“오해이십니다, 형님.”
“뭐가?!”
“저는 형님께서 무언가 불편해하시고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가 문제잖아, 네가!!
“…하아.”
지끈지끈 편두통이 찾아왔다.
이 찰거머리 같은 놈을 어떻게 하지?
암만 뒤 없이 들이박는 당불퇴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있다.
적어도 상대에게 진 것이 빚이고, 상대가 자신에게 가진 것이 호의라는 것을 아는 이상 다른 이들처럼 주먹부터 날리고 머리부터 들이박고 볼 수는 없었다.
“제발 가라. 너 아니더라도 나 머리 아픈 일이 많아…….”
안 그래도 적세희 때문에 근심 걱정 우환이 사이좋게 몰려오는데 너까지 이러지 말라고.
애원하듯 말하자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구중보가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왜.”
“제가 비록 형님에 비해 무공이 떨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간 지켜본 바, 형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인 단순한 무에 관련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와주긴 개뿔이…….”
이걸 말한다고 알긴 할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지만 이건 맞들 수 있는 고민거리가 아니다.
“그냥 가라. 가주는 게 도움이야.”
“형님!”
“아니, 좀 놔! 바지 늘어지잖아!!”
뒤돌아 가려는 당불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실로 찰거머리 같은 전법이었다.
“형님! 이래 봬도 한 가문의 소가주로서 살아온 몸입니다! 제가 그래도 폭넓은 지식은 좀 있는 편입니다!!”
“…소가주?”
현 당가에는 없는 개념이다.
방계들의 기억 속에서 당대 당가의 가주 당위혼은 지금보다 더 어릴 적부터 가주였으니까.
그렇기에 당불퇴의 의식 속에서 소가주와 가주는 사실상 동일 선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가주는 만사에 능한 초인으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전무림제일최초최고고금제일가주님인우리 가주님에게는 비비기 힘들겠지만…….’
한번 물어나 볼까?
혹하는 심정으로 당불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진짜 폭넓은 지식 있는 것 맞냐?”
“그야 물론입죠!”
“그럼…….”
미끼를 물었구나― 쾌재를 부르는 구중보에게 당불퇴는 한숨 푹 내쉬며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가 그러니까, 지난번에 삼 차 비무를 하러 갔는데…….”
꽤 긴 이야기였고,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평생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해볼 일 없는 당불퇴였기에 논리 정연은 국밥에 말아 먹은 수준의 이야기였지만, 구중보는 주의 깊게 경청했다.
그리고,
“…끝이야, 너무 어렵지?”
당불퇴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구중보는 실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쉬운데요?”
“그래, 너무 어렵… 뭐?”
쉬, 쉽다고?
“예, 형님.”
믿지 못해 되묻는 당불퇴에게 구중보는 확언하듯 말했다.
“제가 볼 때 형님은 다 뛰어나신데 딱 하나를 모르십니다.”
“뭐, 뭘 모르는데?”
“여심(女心)입니다.”
“여, 여심?”
“그렇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하며 말했다.
“형님은 여심(女心)을 모르십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
쿠쿵―!
당불퇴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이, 이 자식!!”
발악하듯 구중보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너… 너는 뭐 잘 아냐?! 네가 여심에 대해 알아?”
사나운 외침.
하지만,
“훗, 형님. 제 별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순간, 구중보는 세상 누구보다 오만하고 오연하며 광오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뭔데……?”
“부끄럽지만, 제 별호는 답화공자(答花公子)입니다. 그러니까, 꽃들과 노니는 공자란 뜻이지요.”
평소 구중보가 부끄러워하던 자기 자신의 별호였다.
패도를 걷는 문파인 패왕보의 아들로 태어나서, 소패왕이니 질풍권이니 하는 멋들어진 별호 대신, 여인들과의 숱한 연분으로 그런 별호가 붙었다는 건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으니까.
하나 지금만큼은 그 별호에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형님.”
“어, 어어?”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학습은, 신뢰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