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99화 (199/350)

199화

사천당가.

가세가 나날이 확장되어 이제는 어느 명가에 꿀리지 않는 기세를 풍기는 그 거대한 가문의 정문 앞에 수십의 방계들이 모였다.

개개인이 각기 다른 혹독한 수련으로 평소라면 잘 모일 일도 없는 그들이 한데 모였으니, 그 흔치 않은 일을 만들어낸 남자, 구중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쳤다.

“형님들!! 정말!! 빌어먹게도 신세 졌습니다!!”

“제엔장!! 잘 가라고!!”

“꺼지라고, 이 멍청한 녀석!!”

“가르치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런 구중보를 보며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방계들이 수십.

어느새 그들의 공동전인이 되어버린 구중보가 떠난다는 사실에, 차양당 방계들이 모처럼 모여 손수건 등을 휘두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들.’

지난 이 주간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나날이 몰락하는 가세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낯선 이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굴욕감도, 그 인내의 보상을 위해 씹어야 할 쓰디쓸 과정에 일부라 여겼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진심이 되어준 이들은 어느새 또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형님들도 분명 나에게 그러시겠지.’

외인부전(外人不傳).

자신들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온정도 베풀지 않는다는 비정강호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무림인으로서 평생 살아온 구중보로서는 부정하고 싶으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에게 그것이 틀렸음을 알려주었다.

가족이 아님에도 자신들이 가진 비상의 한 수를 내어다 주고, 별것 아닌 척 귀한 것 값진 것을 흔쾌히 나눠주었다.

‘언젠가,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구중보는 당문을 떠나갔다.

* * *

당가를 떠난 구중보의 마음은 싱숭생숭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당가에서 보낸 시간의 밀도가 너무나 높아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오히려 허탈해진 것이다.

‘너무 많이 정이 들어버렸구나.’

구중보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가족이 기다리는 패왕보로 돌아가고, 남은 잠룡전의 일정을 수행하며 가세를 되살리고 가문의 위명을 드높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또 다른 가족들과 떠나야 한다는 건, 역시 힘든 일이구나.’

무거워지는 마음 한편이 짓눌리듯 다가왔지만, 구중보는 오히려 활짝 웃기로 했다.

‘마냥 슬플 일은 아니지.’

오히려 축복할 일이다.

만리타향 외지에서 이리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자신은 자신이 갈 길을 끝까지 나아가 저 앞선 곳에서 다시금 좋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어주면 될 뿐.

“자, 그럼 무엇을 해볼까.”

일부러 씩씩하게 소리 내어 말한 구중보는 우선 할 일을 정리했다.

‘당연하게도, 가문으로 돌아가서 내일 있을 비무를 준비하는 게 옳은 일이겠지.’

다만,

꼬르륵―

“너무 급하게 나와서 그런가… 허기가 지잖아.”

오래 있으면 못 떠날까 봐 급히 떠난 발걸음에 아침도 못 먹고 나와버렸다.

그렇게 사천 시내를 서성이다 보니―

“응? 저기는…….”

문득 눈에 띄는 식당이 있었으니,

“훗. 이것도 연인가?”

그가 당불퇴와 처음 만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국밥집이 보였다.

‘얼마나 맛집이면 불퇴 형님이 휴가마다 찾아간다 했었지.’

오늘은 자신도 저기서 한 끼나 해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구중보였고,

“크아아아!! 주인 나와!!”

입구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자신이 사건에 휘말렸음을 직감했다.

‘저자는…….’

백의가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중후하게 수염을 기른 인상은 평소에는 청수하다는 평가를 제법 받았겠지만,

‘백학검객 장산해. 평생, 아버지가 경쟁자라 여기시던 사내. 한데, 그런 이가 어찌…….’

불콰하게 취한 얼굴에 검 대신 한 손에 쥔 술병은 무인이 아닌 한낱 주정뱅이 취객이 따로 없다.

“주인 나오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저지르며 술병을 휘두르는 모습에 구중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정도 되는 이가 저리 함부로 난리를 치면… 양민들이 크게 다치게 될 텐데.’

얽혀서 좋을 것이 없는 건 알지만, 구중보는 차마 그 모습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만두시오!”

“주인장 나… 크으, 뭐라고?”

잔뜩 취한 와중 들려온 외침에 장산해의 고개가 돌아갔다.

“네놈은… 구가의 아들?”

“나를 알아보시는군.”

암만 취해도 경쟁 문파의 후계자를 못 알아볼 리는 없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네 아비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는데, 감히 너 따위가 내게 무어라 소리치느냐!”

“그건 알고 있소. 당신께서 아버지의 오랜 경쟁자였음을.”

“경쟁자? 하, 웃기고 있군.”

장산해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다 망해 가는 패왕보 따위가 본문에 경쟁자라고? 망상이 지나치구나.”

저열한 비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한때는 네 아비가 내 적수였던 적도 있지. 하지만 네 아비의 무예가 정체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지. 그런데 아직도 네 아비와 나를 같은 선상에 놓으려 하느냐?”

울컥―

그 말에 구중보의 마음 한편에 무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당신… 비겁한 수법으로 취한 영약으로 상승시킨 무위가… 진정 당신의 무위라 여기시는 것이오?”

“하, 비겁?”

“그렇소. 양민들을 겁박하고, 힘으로서 사업체를 집어삼켜 그들의 고혈을 빨아 얻은 영약들로 상승시킨 내공 수위가 아니시오!”

“이, 이놈이?”

알고 있다.

어째서 자신의 아비가 지난 십 년간 약해진 것인지를.

‘다른 문파들은 힘없는 이들의 피를 빨아 강해지기 급급한데, 당신께서는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바빴지. 그동안 무위 상승은 당연 꿈을 꿀 수도 없었고, 자연스레 경쟁자들 사이에서도 뒤처지게 되었었다.’

그 사실에는 언제나 자부심을 느껴왔다.

남들이 말로만 일삼는 협의를 직접 몸소 보이시는 아버님을 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리되리라 다짐했다.

그렇기에,

“안 되겠군. 거짓 내공과 거짓 무위로 점철된 당신이 더 이상 양민들에게 폐를 끼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소. 밖으로 나오시오.”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아니, 내가 하는 것은 경고일 뿐이오.”

“싫다면?”

내가 거부한다면 어쩔 것이냐. 어디 힘으로라도 끌어낼 생각이냐, 소리치는 그에게 구중보는 담담히 답했다.

“관아에 신고하겠소.”

“뭐, 뭐?”

“진정 오랏줄 맛을 보셔야 정신을 차리겠소?”

“이놈이……?!”

섬서라면 우습지도 않은 말이겠지만, 이곳은 사천이었다.

연줄로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거나, 애초에 무인들은 봐도 못 본 척하는 섬서와 달리 사천은 예전부터 성주가 무인들이라면 구대문파건 뭐건 쥐잡듯이 잡는 곳으로 유명했다.

“나오시오.”

협의를 숭상할 뿐, 그런 생리 정도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당연히 알고 있는 구중보이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결국 밖으로 따라 나온 장산해는 저런 어린 녀석의 의도대로 농락당했다는 게 불쾌한지 살의를 줄기줄기 뿜어댔다.

그런 상대의 모습에 구중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보다 손윗사람에게 손을 쓰기는 싫소. 이대로 물러나시오. 서로에게 묶은 감정을 다 내려놓고 봐도, 양민에게 행패를 끼친 것은 당신이잖소.”

“크크크크, 오냐오냐해 주니 진정 보이는 게 없구나!”

더 듣기도 싫다는 듯 장산해가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에는 살의를 반영하듯 내공이 담겨 있었고, 잘못 맞으면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기세를 풍겼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절정의 고수.

자신의 아버지 대의 인물이며, 결국 자신의 아버지보다 윗줄이라 여겨지는 이가 달려듦에도 구중보의 표정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이 정도에 겁먹기엔, 지난 이 주간의 시간 동안 죽을 뻔했던 경험이 너무나 많았다.

“하수는 손끝을 보고, 중수는 발끝을 보고, 고수는 상대의 눈을 본다. 상대의 눈을 잘 봐. 저 새끼가 어딜 치려는지 똑바로 보라고.”

그렇기에 그의 머릿속엔 두려움 대신, 방계 하나의 가르침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보다 더 많은 생사의 고비를 느껴야 했던 이가 뼈에 새기듯 가르친 가르침!

구중보의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두 손이 패왕권의 권로(拳路)를 쫓았다.

‘어깨 위.’

견갑골로 날아드는 주먹을 향해 손을 뻗어 옆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반대로 그 경로에다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뻐억!

“컥……!”

가슴팍을 얻어맞은 장산해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물러나시오. 패왕권은 패도(覇道)를 추구하며 만들어진 무공. 상대방의 사정을 봐줄 만큼 넉넉한 무공이 못 되오.”

더 싸우면 네가 다칠 수도 있다.

그 내용은 완곡한 경고지만, 듣는 입장에선 이만한 도발이 없다.

“구일엽도 아닌 너 따위가… 나에게 훈수를 둬?!”

“옳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소. 누구나 할 수 있어야 옳은 말이듯.”

힘을 가진 자이기에 없는 이에게 뱉을 수 있는 것은 편협한 것이라.

기세등등 실컷 소리치다, 일수의 교환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겁먹은 장산해에겐 뼈아프게 들려온 말이었다.

“이익! 운 좋게 이득을 취한 것으로 잘난 체하지 마라!!”

“운 좋게라…….”

내뻗은 주먹을 천천히 회수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덤비시오. 자신 있으면, 한 번 더 확인해 보시오.”

“확인? 좋다. 네가 바라던 바대로 해주마!!”

스릉―

옆구리에 패용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검극에는 예리한 검기가 맺히고 그 모습에 구일엽의 눈빛은 더더욱 깊어졌다.

‘결국 선을 넘는군.’

애초부터, 협의를 버린 인간이 여기까지 영락할 것은 당연한 일.

부웅―!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앞섬을 베며 스쳐 지나갔다.

“이노오옴!!”

잘려 나간 옷자락에 더더욱 흥분한 장산해가 거칠게 검기를 뽑아냈다.

부웅― 붕! 부웅!

연신 대기가 찢겨나가는 비명 소리 속에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렇게 시건방지게 훈수를 두더니, 결국 피하는 것밖에 못 하느냐!!”

검격은 더더욱 맹렬해졌고, 살의는 더더욱 사나워졌다.

“입만 산 게, 꼭 네 아비를 닮았구나!!”

하지만 그 속에서도 구중보의 심유한 눈빛은 상대의 빈틈을 쫓을 뿐이었으니―

‘과하군. 닥치는 대로 영약을 끌어모아 내공 양을 늘렸지만, 수준에 맞지 않는 내공이 오히려 독이 되었어.’

얼핏 보기에 날카로워 보이는 검기의 예기는, 이미 그 끝이 균일하지 못해 계속해서 흔들렸고,

‘검로(劍路)를 잃은 검은 결정적인 순간 정교함이 부족해서 결국 끝을 맺지 못하는구나.’

그 속에서 구중보는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면.’

쩌엉―!

내뻗은 주먹이 검면을 후려쳤고, 연이어 세 번의 주먹질이 그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컥?!”

그저 물러나기만 하는 구중보의 모습에, 조금 전은 역시 운이 좋았구나, 확신하며 검을 휘둘러대던 장산해로서는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놈……!”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장산해가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끝이오.”

어느새 시야를 가득 메우며 뻗어진 주먹이 두 눈에 크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뻐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정신을 잃은 장산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겼… 다…….’

승리였다.

그것도 완벽한 승리.

‘내가, 아버지의 경쟁자를?’

승부에 들어서기까지는 긴장감으로 별생각이 없었지만, 승리를 쟁취하고 나자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믿기지 않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오오오오!! 청년이 이겼다!!”

“검기를 뽑아낼 줄 아는 칼잡이를 이겼어!”

“난 저 남자를 알아. 섬서 백 대 고수 백학검 장산해잖아!”

“한 지역에서 백 대 고수 안에 드는 이를 저 젊은 청년이 이겼다고?”

마찬가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 주변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니,

“소협! 축하드립니다!”

“처음부터 봤습니다! 패악질을 일삼는 외지인을 물리쳐 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천의 양민들이 몰려와 그에 감사를 표했다.

“저희가 소협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안 된다면 별호라도…….”

“벼, 별호 말입니까?”

존함이라니.

별호라니.

그 낯선 상황에, 조금 전까지 상대를 시종일관 압도하던 구중보는 없고 부끄러움에 가득 찬 아직 어린 청년만이 남았다.

“저는…….”

그런 상황에서 힘겹게 입을 연 구중보는 말했다.

“사천당가… 잡룡단의 공동전인… 구중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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