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 *
사천 어딘가에서 새로운 권호(拳豪)가 그 등장의 서막을 알릴 때, 동시에 또 다른 곳에선 본격적인 잠룡전의 본선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이 주간의 휴식기가 지난 후 시작된 본선은 이제 정말 쟁쟁한 상대만이 남은 상대였다.
당장, 본선을 장식하는 첫 번째 비무자만 해도 그랬다.
“첫 비무자는, 창녕명가의 명한일!”
한 자루 철창을 꼬나쥐고 비무대 위로 오른 남자.
그가 등장하자 관중석이 술렁술렁거렸다.
“허, 귀영창이 벌써?”
“십이재(十二材)가 첫 비무자라니. 이번 잠룡전은 확실히 볼 만하겠어.”
만가쟁패의 시대에서도 단연 빛나는 열두 명의 기재.
용호상박 바로 아랫급에서 빛나는 정파의 초신성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기대감에 가득 찬 관중들은 당대 최고로 주목받는 신예의 등장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명한일은 현재,
‘…뭘 하는 거지?’
자신의 앞에 선 상대방의 의아한 행태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허허실실 작전인가?’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러내리고, 머리는 부스스한 게 무슨 광인을 보는 것만 같다.
당장 두 발은 비무대 위에 서 있지만, 정신은 어디 머나먼 꽃동산 별나라로 가 있는 듯하니,
“이보시오.”
어딜 찔러도 쉽게 승리를 점칠 수 있을 듯했으나, 차마 명가(名家)의 후손이란 자존심이 그것은 허락하지 못해 애써 상대방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했다.
“당신, 괜찮은 것이오?”
“…에? 아, 츄릅! 크흐흠… 거, 미안하게 됐수.”
상대방 역시 좀전까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침을 삼키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광인으로 추측되는 상대, 당불퇴는 오늘 아침의 일을 회상했다.
* * *
이 주가 흐르고, 그간 함께 했던 구중보가 떠나갔다.
아닌 척했지만, 싱숭생숭해진 것은 당불퇴 역시 마찬가지.
“흥, 멍청한 녀석.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야? 깨닫는 것도 늦어 가지고, 괜히 이 주나 걸렸잖아?”
“삑삑.”
삑삑이가 작은 날개로 당불퇴의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이렇게 보면 누가 아기 새인지, 누가 나이상으로는 다 큰 어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뭐? 나 완전 괜찮거든?”
“삑삑.”
“다 안다고? 그래, 알면 됐어.”
괜스레 시무룩해진 당불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그의 품속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이건…….”
여심지론(女心之論).
구중보가 남기고 간 책자였다.
“…그래, 괜히 궁상떨어서 뭐 하겠어.”
이렇게 된 거 원래의 목적이나 완수해야지.
뒤적뒤적―
책자를 뒤적이며 구중보가 핵심이라고 말해 준 것들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꽃을 주면 대게 십중구는 좋아한다는 거지?”
구중보의 특론이 떠올랐다.
“형님, 이 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함께 절벽을 올랐던 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독성도 그리 강하지 않은 꽃을 뽑아와 자신에게 내미는 구중보의 모습에 당불퇴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나를 뭐로 보고. 그건 붉은나리꽃이 아니냐. 비록 그 효과가 미약해서 약초로 쓸 수는 없지만, 한때는 해열 효과로 쓰기는 했지. 물론, 같은 효과를 노린다면 삼유초를 달여 먹는 게 더 좋긴 해.”
암만 자신이 당가의 푸른 야수라 불린다고 해서 당가로서 약학에 대한 지식마저 부족하다 생각하는지, 이 오만불손한 질문을 던지는 동생에 대해 마음껏 지식을 뽐내주자,
“…너 표정이 왜 그러냐?”
구중보는 잔뜩 썩은 표정으로 응대해 주었다.
“형님께선… 이 꽃의 아리따운 색감을 보면서도 진정 그 생각만 하십니까?”
“색감? 아, 혹시 색감이 짙으면 독차를 탈 때 무엇이 들었는지 숨기기 위한 효과가 뛰어나다는 발상을 하는 거냐?”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학을 떼며 소리치는 구중보의 모습에 당불퇴는 괜히 움찔 몸을 떨었다.
“아, 아님 아닌 거지… 왜 그래?”
“형님! 형님께선 꽃말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꽃말? 먹는 거냐?”
“…허허허.”
구중보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웃음을 흘렸다.
“형님, 꽃말은 말입니다. 그 꽃에 담긴 의미입니다.”
꽃에 의미가 있다고?
“예를 들어, 이 붉은나리꽃은 ‘당신을 향한 내 붉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고백을 위해 종종 쓰이는 거죠.”
“…진짜?”
반신반의했다.
그런 게 있다고는 수십 종의 독초를 캐고 수백 종의 약초를 씹어본 지금까지도 몰랐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런 걸 하는 게 더 이상한 거라니까…….”
그래도 구중보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어 당불퇴는 일단 속는 셈 치고 꽃말을 외우게 되었다.
그리고,
“…끄응, 이게 맞으려나?”
그의 손에 들린 수북한 적송화가 한 다발.
당신을 향한 변치 않는 마음, 이라는 뜻을 가진 적송화를 보며 얼어붙은 적세희의 마음을 녹일 한 수가 맞는 건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가,
“젠장! 내 주제에 고민은 무슨 고민이야? 일단 부딪쳐본다!”
언제나와 같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적세희에게 달려갔다.
고민하기보다 일단 들이박고 보는 남자, 그것이 바로 당불퇴였으니까.
“무슨 일이시죠, 공자님?”
“어… 그, 그게…….”
그리고 대망의 결전의 날.
쌀쌀맞게 반응하는 적세희에게, 당불퇴는 가져온 적송화 다발을 내밀며 소리쳤다.
“적 소저!!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두 눈 딱 감고 외치는 정면 승부!
그에,
“…….”
“……”
“……”
‘…뭐, 뭐지?’
대답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아 않았다.
‘무슨 일…….’
그에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질끈 감은 눈을 한쪽만 살짝 떠보니,
“…헉?! 저, 적 소저? 왜, 왜 울고 계십니까?”
쌀쌀맞던 그녀의 마음에 훈풍이 불기라도 했는지, 녹아내린 빙설마냥 한쪽 눈에서 눈물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 공자님…….”
잔뜩 감동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공자님의 마음… 확실히 알았습니다.”
“예, 예?”
“그간 제 답에 어영부영 피해 다니신다고 여겼거늘, 저의 못난 착각이었군요.”
갑자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연속에 당불퇴가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와락―!
갑작스레 그녀가 당불퇴에게 안겨들었다.
“저 역시, 공자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어버버버버…….”
연이은 당황에 말을 잇지 못하는 당불퇴였고, 그런 그의 품속에서 적세희는 그저 감동의 눈물만을 흘렸으니―
참고로, 적송화의 꽃말은 분명 다른 곳에선 ‘당신을 향한 내 붉은 마음’이지만,
‘적송화의 꽃말, 그건 분명 당신을 향한 영원한 마음이니…….’
붉은 바위 일족에선 그 의미가 살짝 달라,
‘일족의 사내들이… 청혼을 위하여 바치는 꽃.’
크나큰 오해를 만들어냈으니―
‘공자님. 당신의 마음, 오해치 않고 확인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될는지는 글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겨우겨우 현실로 돌아와서, 과거의 미몽에서 깨어난 당불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놈 불퇴야, 정신 차리자!’
당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일이 잘 풀렸으니 지금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큼, 기다려줘서 고맙소.”
짝짝―
두어 번 볼을 두들긴 당불퇴가 천천히 내공을 갈무리하자 곧 웅혼한 기세가 자연스레 사방으로 흘러나갔다.
흠칫!
‘이런… 괜히 시간을 줬나?’
그 기세가 얼마나 장중한지, 명한일은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자, 시작해 봅시다. 당신, 창수라고 했지? 내 경험상 창술을 본 경험은 딱 한 번밖에 없어서 꽤 기대가 되는구만. 흐흐흐.”
당불퇴의 기억 속 창술이란, 당가의 독창술을 사용하던 당지명의 사미창이 끝이었다.
그마저도 창의 이점만을 뽑아올 뿐, 창이 내재한 진정한 무의(武意)를 이끌어 냈다 말하기에는 힘들었기에 기대감이 잔뜩 일었다.
“창술이라…….”
일렁이는 호승심에 명한일은 긴장을 숨기듯 소리치며 창을 휘둘렀다.
“당신이 견식한 게 어떤 창법이든, 본가의 명가창법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
명가창법(明家槍法).
육륜일식(六輪一式).
그의 몸이 수레바퀴처럼 회전했다.
여섯 번 연이어 회전하며 휘두른 창극이 매섭게 날아들었고, 찌르기를 예상하던 당불퇴는 미처 상정하지 못한 공세에 탄성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허, 창의 이점이 압도적인 사거리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체감이 되었다.
‘지명 형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형님의 창술은 고작해야 몇 걸음 더 멀리서 창을 찌르는 게 고작이었어. 하지만 이자는 철저히 그 사거리를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구나.’
여섯 번 회전하는 바퀴는 그 간극을 자신의 것으로 앗아가고 있었고, 상대방은 쭉쭉 뒤로 밀어냄과 동시에 그 행동에 불규칙함을 만들어 호흡이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비무장은 범위 제한이 있는데 말이야.’
제아무리 넓어도 이렇게 뒤로 물러나기만 해선 그대로 장외 처리가 될 뿐.
‘그렇다면.’
타탓―!
당불퇴는 아예 뒤로 멀찍이 물러나, 비무장의 끄트머리에 섰다.
“뭐 하는 거지?”
“그쪽이 자꾸만 사거리로 재미를 보니, 나 역시 재미 좀 보려고.”
암기 통을 풀어헤치며 수북한 천골저 더미를 양손에 나눠 쥐었다.
그 모습에,
“…암기?”
명한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날 우습게 보는 건가!!”
자신에게도 눈과 귀는 있었다.
모른 척하려고 해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본선에 진출한 당불퇴의 소문은 명한일의 귓가에 들 수밖에 없었고, 그가 자신의 상대라는 소문에 더더욱 그 소문을 경청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당불퇴가 보인 무공은 적수공권의 박투술.
암기를 쓴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진신무공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상대한다는 말에 짙은 치욕감을 느낀 것이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슈?”
물론, 당불퇴는 억울할 뿐이었지만.
“내가 암만 개차반이라지만, 그래도 당당한 당가인이거든? 당가인이 암기를 쓰는데 어떻게 우습게 본다는 표현이 나오는 건지…….”
뭔가 세상 잘못됐다는 생각에 열심히 항변해 봐도,
“그래, 어디 그 잘난 암기술을 한번 견식해 보겠소!”
이미 분노 충천한 명한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에휴.”
그렇다면 뭐 어쩔까.
“실력으로 보여야지.”
파파팟!!
당불퇴의 손이 휘둘러지고, 무수한 암기 세례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뭐?’
그 기세가 얼마나 예리한지, 머리끝까지 치솟던 분노도 다시금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흡!”
거칠게 내뿜기만 하던 숨을 들이쉬며, 명한일은 창대를 움직였다.
타타타탕!!
수십 개의 젓가락들이 창대에 부딪치며 하나하나가 묵직하기 짝이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무겁다!’
동시에 뿌려진 암기들은 하나하나가 쇠몽둥이로 후드려 팬 것처럼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새삼 이제는 잊힌 사천당가의 전승이 떠올랐다.
‘독과 암기로만 따진다면, 천하제일(天下第一)……!’
그 종류가 흔치 않은 것이라 해도, 천하제일이란 수식어는 결코 아무 곳에나 붙을 수 없으니,
“이야, 이걸 쉽게 막네? 그럼, 좀 더 가보실까.”
이번에는 암기 통 두 개를 열어젖힌 당불퇴가 그것들을 양손에 쥔 뒤 곧바로 휘둘렀다.
“자, 막아보시오!”
파파파팟!!
암기의 비가 명한일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
그걸 보는 순간,
‘졌구나…….’
그는 스스로 패배를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