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잠룡전 본선 삼십이 강이 진행되며 사천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만가쟁패의 시대, 그중 십이 재라고 칭송받던 이들이 대거 탈락하고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이 초신성마냥 솟구쳤다.
이야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십이 재는 개뿔, 그딴 건 장작 불쏘시개만도 못한 거니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야 한다고 연일 난리를 떨었고,
그 와중에도 용호상박이라 불리는 두 젊은 칼잡이는 자신들에게 붙은 소문이 결코 빈 수레가 아님을 증명하는 무위를 뿜어냈기에 또 일단은 지켜봐야 한다는 여론이 있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됐건, 이 잠룡전이 끝나는 날 무림의 판도가 새롭게 쓰인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사천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삼십이 강의 마지막 비무로 쏠렸다.
“다음 차례는, 청성일검 진혁수!”
자신을 호명하는 외침에 따라 진혁수는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자영이라 했던가.’
그의 걸음은 비무대로 향하면서도 머릿속에선 아까 전 보았던 경기가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특이한 검법이었지.’
단순히 강한 검법을 따지자면 당연 남궁의 검이 제일이었다.
자영의 비무 이후 남궁수가 펼쳤던 검법은 상대를 말 그대로 찍어눌렀고, 손쉽게 승리를 쟁취하며 여론의 환호를 샀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영의 검법이었다.
‘그건, 상대를 약화시키는 검법이었다.’
기본적으로 무도(武道)라 함은 무(武)로서 도(道)를 수양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길을 걸어 끝없이 정진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약점을 다듬고 장점을 갈고 닦는 것이 보통인데, 자영의 펼친 검법은 정반대였다.
‘서서히 상대를 무너트려 그 빛을 잃게 하고 추락시키는, 지독하고 질척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자신의 색채가 명확한 검법이었다.’
그걸 본 이후 진혁수는 홀로 몇십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라면 그걸 흉내 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청운적하검에 꼭 필요한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는 기쁨이 컸다.
그런 그에게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반갑소! 팽가의 팽만일이오!”
“…….”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드니 호방한 웃음을 터트리는 사내가 자신을 보며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청성의 진혁수요.”
진혁수 역시 마주 검을 들어 올리며 포권을 취하자 팽만일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알고 있소. 청성일검이시라지?”
“그렇게 불리고 있소.”
“흐흐흐, 평소 청성의 칼맛이 어떤지 궁금했는데… 기대해도 되겠소?”
명가의 자제라기엔 저속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진혁수는 그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당가의 그놈을 닮았군.’
자꾸만 자기를 당가의 푸른 야수라 부르는 미친놈. 그리고, 실제로도 짐승 같은 놈.
“혹시, 별호가 있소?”
“응? 별호 말이오? 일단은 야수도(野獸刀)라 불리고 있긴 하오만…….”
“…과연, 어울리는군.”
“하핫, 과찬이오!”
칭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퍽 어울리기는 했다.
‘다 같은 과인가.’
나쁘지 않다 여겼다.
그놈과도 어차피 한번 겨뤄볼 생각인데, 그런 놈이 도를 들면 어떨지도 궁금했으니까.
‘퍽 어울리기도 하고.’
야수 같은 것들에겐 정교함이 필요한 검이나, 거리를 통해 재며 싸우는 창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묵직하게 달려드는 적수공권의 박투술이나, 무식하지만 파괴적인 도가 적합했다.
“나 또한 기대되는구려. 팽가의 도는 어떠할지.”
“훗, 비록 내 형님께는 발끝도 못 미치는 바이지만… 그대를 실망시켜 드리진 않으리다.”
서서히 투기를 끌어올리는 팽만일은 전통적인 상단세를 취한 뒤 그대로 내리 휘두르며 돌진했다.
“그럼, 가겠소!”
야수도(野獸刀).
야왕질풍격(野王疾風擊).
쿠구구구구!!
그를 중심으로 질풍이 몰아쳤고, 바람을 휘감은 채 내려찍히는 도는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상대를 일도양단 하듯 내질러졌다.
‘과연, 그놈을 똑 닮았군.’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레 겁먹을만한 무시무시한 돌격이지만, 안타깝게도 진혁수는 이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했다.
그래서 겁먹는 대신 검과 검집을 열 십(十) 자로 교차하듯 휘둘러 내리찍히는 도격을 빗겨 쳤다.
콰콰쾅!!
상대방의 일격을 빗겨 막아 그 위력을 절감시키는 방패술처럼, 팽만일의 도격은 궤도가 비틀리며 그 무지막지한 기세가 애꿎은 비무장 바닥으로 퍼부어졌다.
그 여파로 바닥의 돌판이 박살 나고 돌파편과 흙먼지가 연기가 되어 매캐하게 맴돌았다.
‘위력만 따지면 이쪽이 더 위인가?’
확실히 이런 놈들은 힘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제힘을 펼치게 여유를 줘서도 안 된다.
청운적하검(淸雲赤河劍).
적하만연(赤河蔓延).
맞닿은 도를 튕겨내며 휘두를 쌍검에서 붉은 안개가 물씬 풍겨 나왔고, 팽만일은 그에 훌쩍 뒤로 물러나며 날아드는 검기를 쳐냈다.
카캉!!
“과연! 명불허전이군!”
진혁수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개가 어느새 비무대 위를 덮고 있었다. 저것이 어떤 효과를 가진 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끈적한 것들에 뒤덮이니 저도 모르게 경계심에 날이 섰다.
“그걸 아시오? 당신과 당신의 사문에선 당신을 청성일검이라 부르지만, 세간 사람들은 이제 당신을 적하검(赤河劍)이라 부르는 것을.”
“적하검이라.”
그 말에 진혁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별호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볼 때 심히 어울린다 생각하오. 그래서, 지금부터 그 검기(劍技)를 돌파해 보고자 하오.”
구구구…….
즐겁다는 듯 미소 짓는 팽만일로부터 한층 더 강렬해진 기세가 풍겨 나왔다.
무릎을 굽히고, 신체 균형을 앞으로 쏠리게 한 그는 마치 쏘기 전 시위에 겨누어진 살처럼 도극을 겨누었다.
“나를 막아보시오!”
야수도(野獸刀).
저돌맹진(猪突猛進).
파앙―!
땅을 박차는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쏘아졌다.
‘미친놈.’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팽만일의 행태를 짧게 평한 진혁수 역시 가만있지 않고 한 자루 검과 하나의 검집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그로부터 날아든 검기가 십수 개의 암기처럼 공간을 격하고 퍼부어졌으니, 하나하나가 전부 요혈을 노리고 날아드는 공세에 팽만일은 두 눈을 부릅떴다.
“크하아압!”
일진광풍과 같은 기합을 터트리며 도극을 앞으로 내찔렀다.
그건 마치 적진을 홀로 꿰뚫는 일기당천의 돌격과 같았고, 실제로도 그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던 검기의 세례는 도극에 부딪치는 순간 얼음장처럼 깨져나갔다.
“크아아아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나아간 팽만일은 적하의 영역을 종잇장처럼 찢어 갈기며 파고들어, 있는 힘껏 도를 휘둘렀다.
부웅―
‘…이런.’
적하의 공간이 완전히 깨어지며 붉은 일렁임 사이로 여백이 생겨났다.
그 틈을 타고 뛰어오른 팽만일은 머리 뒤로 도를 넘겨 겨누며 전력의 힘을 한점에 모았다.
밝은 태양을 등진 채 떨어져 내리는 그가 히죽 웃었다.
야수도(野獸刀).
야왕인(野王印).
콰아아앙!!
내리찍히는 도격이 비무대 중앙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다.
‘짐승이 따로 없군.’
그것이 닿기 직전 뒤로 쭉 물러나며 공격 범위를 피해 낸 진혁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짧게 평했고, 자신의 파괴흔 중앙에 착지한 팽만일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쳇, 치사하군. 이걸 피해 버리다니.”
당연히 받아줄 줄 알았다는 말에 진혁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누구와 닮았군.”
“앗? 벌써 우리 형님을 만나본 것이오?”
“아니, 그쪽 말고 따로 있소.”
어차피 곧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한 상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쪽을 위해 준비해 둔 걸, 지금 쓰게 되는군.”
“…호오?”
진혁수에게서 풍겨 나오던 기세가 일변했다.
‘이 역시 미완성이긴 하지만, 오히려 잘됐군.’
자영이라는 이름의 검수에게 배운 한 수가 그의 검기에 섞여 들었다.
그러자,
‘색이 변하고 있어?’
팽만일의 눈에 비추어지던 붉은 검기가, 어느새 청색의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적하검이라 부른다고 하였소?”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진혁수가 돌연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나를 반만 안 것이겠지.”
“…이게 진짜라는 건가?”
“무엇이든 내 진짜 모습이지. 다만, 이건 또 다른 모습일 뿐.”
조금 전까지 피어 나오던 진혁수의 기세가 외부로 만연한 성질을 지녔다면, 지금 풍겨 나오는 기세는 오로지 그를 주변으로 감도는 형상을 띄고 있었다.
‘아니, 또 그러면서도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개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어찌 이리 극명하게 변할 수 있나 바라보던 팽만일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저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만큼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감이 좋군.”
상대방의 심리 변화를 읽은 진혁수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당신과 같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검식(劍式)이니.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청운적하검(靑雲赤河劍).
청운유수세(靑雲流水勢).
“…점점 더, 재밌어지는군.”
조금 전까지 붉은 물안개가 진혁수로부터 물씬물씬 피어져 나왔다면, 이제는 푸른 구름이 뭉게뭉게 그를 감싸 안았다.
그 색채의 변화는 분명 뚜렷하기 그지없는데, 기이하게도 팽만일은 자신의 눈에 상대가 흐릿하게 보인다고 느껴졌다.
‘저게 뭘까?’
팽만일은 그 성미가 야수 같을 뿐, 어리석지는 않았다.
오히려 야수성을 지녔기에 본능적으로 유불리함을 깨달았고, 저게 자신에게 결코 상성적으로 이롭지 않다는 것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장, 너무 재밌잖아!’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더욱 즐겁다는 듯 짙어져 갔다.
“모르겠군, 전혀 모르겠어!”
암만 두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도 상대가 부린 변화를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까.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도병을 힘껏 움켜쥔 팽만일은 다시금 적을 향해 쇄도했다.
야수도(野獸刀).
야왕혈조(野王血爪).
저 푸른 구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찢어발기면 사라지리라. 맹수의 손톱처럼, 마구마구 휘둘러지는 도격이 자신이 찾아낸 답이 옳은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퍼부어졌다.
‘과연, 열혈(熱血)이군.’
피가 끓듯 뜨거운 공세가 퍼부어진다.
그 광경은 과연 어떤 난적을 향해서도 무릎 꿇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는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냉혈(冷血)로 무장한 진혁수의 검기(劍技)는 그 위에서 노닐었다.
그릉―
‘뭐, 뭐야?’
기이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와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예상했던 파공음이 아닌 긁는 듯한 소리에 가까웠고,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아 부릅뜬 팽만일의 눈에 자신의 도격이 일일이 상대의 검날과 검집에 맞닿아 다른 곳으로 휘어지는 게 보였다.
‘이게 무슨…….’
그건 실로 무력한 기분이었다.
마치 구름을 잡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듯했고, 그럴 때마다 허상을 베는 듯 허우적거리는 듯했으니까.
몇 번을 또 몇 번을 그렇게 반복했을까, 어느새 자신의 도격은 완전히 그 기세를 잃고 있었고―
척.
목 위로 겨누어진 차가운 칼날의 감촉만이 허무한 승부의 종결을 알려왔다.
“끝이오.”
“…….”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
상대의 검무에 놀아나다 승부가 결정지어진 사실에,
“무엇이오?”
“음?”
“초식의 이름. 이 훌륭한 초식의 이름이 궁금하오.”
비무를 하기 전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의문을 풀었다.
‘…어지간하군.’
그런 상대의 무혼(武魂)에 진혁수도 결국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청운적하검(靑雲赤河劍), 청운무위(靑雲無爲).”
“청운무위… 과연, 멋진 이름이군.”
짧게 감탄한 팽만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포권을 취했다.
“한 수, 배웠소.”
그야말로 그림과 같은 비무(比武)의 한 폭. 관중석에 터져나갈 것만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지는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고, 잠룡전의 삼십이 강은 청운적하검의 명성이 퍼져 나갈 시작을 알리며 종결되었다.
어느 한 경기도 예사로운 경기가 없었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다음 십육 강을 기다렸다.
* * *
언제나 신진 고수의 등장을 열광하는 이들은 과연 이름 없던 중소 문파에서 나타난 영검(影劍) 자영을 부르짖었고, 극적인 전개를 바라는 이들은 몰락했던 당가에서 출전한 두 명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청운적하검이란 가장 신묘한 검예를 펼쳐낸 진혁수에 기대감을 가지는 이도 있었으나, 역시 가장 큰 기대를 받는 둘은 결국 용호상박의 두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대진표가 발표되었으니―
이 경기. 남궁세가의 남궁수 대 패왕보의 구중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