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05화 (205/350)

205화

‘뭐,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또옥… 똑…….

숙여진 고개와 그 아래로 흘러 떨어지는 땀방울.

‘겁, 먹은 건가?’

축축하게 젖은 식은땀에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구중보가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끄드득…….

빳빳이 굳어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고개를 들자, 검극을 겨눈 채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수가 보였다.

“제법이구려.”

“…뭐, 뭐가?”

“고개를 든 것. 당신이 처음이오.”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자신이 고작 검극을 마주한 것만으로 무릎을 꿇은 것?

물러나지 않겠다 한 주제 겁을 먹은 것?

아니,

‘저 사람… 진심으로 저리 생각하고 있잖아.’

이미 여러 번 보아 오기는 했다.

저자를 상대로 했던 무인들은 모두 지금의 자신처럼 상대가 검을 뽑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었고,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무력하게 패배했던 것을.

‘나는 그래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고개를 들고 상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부러질 것만 같다.

그것은 상대방이 펼친 무형지기(無形之氣) 때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지금 고개를 들고 상대를 마주하길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니.’

한심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러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해놓고, 고작해야 검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어?’

꾸욱―

이를 악물고 그 사이에 볼살을 집어넣었다.

덕분에 터져 나온 핏물이 비릿한 맛을 입 안에 가득 채웠다.

‘웃기고 있군.’

끼기긱…….

오래된 맷돌처럼 비명을 내지르는 두 다리를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애처로울 정도로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일어섰다.

“고작… 그런 것 가지고 그러십니다.”

“…….”

남궁수의 두 눈이 커졌다.

그 안에 깃든 놀람이란 감정이 읽혀지자 구중보는 억지로 붉은 빛으로 감든 잇몸을 만개하며 활짝 웃었다.

“이제, 그 잘난 얼굴에 주먹질도 해드릴 텐데.”

그래, 못 해도 그 정도는 해야지.

구구구…….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단전을 걷어차듯 움직여 내공을 끌어올리자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해졌다.

그래봐야 움직일 만하다 정도였지만, 구중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지난 이 주간의 수련 경험이 이런 상황에 실로 적합했다.

‘이 정도면, 거진 그 무쇠 족쇄를 처음 찼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군.’

지금은 심리적으로지만, 그때는 물리적으로였다.

잘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상태로 산악을 뛰어다니고 절벽을 오르며, 내공이 말라비틀어진 단전을 억지로 쥐어짜 내 내공을 뽑아내는 것까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이 큰 도움이 되는 것에 역시나 그들 형님에게 감사를 느끼며 구중보는 주먹을 쥐었다.

“기어코,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구려.”

그 모습에 남궁수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병을 쥐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술 좋아하는 거.”

줄 거면 어디 실컷 줘보든가.

한번 만취해 보자고.

쩌엉―

온몸을 묶던 쇠사슬과 같은 압력을 풀어 헤치며 구중보는 앞으로 내달렸다.

패왕권(覇王拳).

패왕무쌍격(覇王無雙擊).

혈도를 내달리는 내공이 기분 좋게 울음을 터트렸다.

지난 이주 간, 당가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은 영약들 덕에 몰라보게 비대해진 덩치의 내공이 움켜쥔 주먹에 담겨 강맹한 위력으로 화했다.

‘좋아!’

스스로 생각해도 훌륭한 일격!

그 일격을―

쩌엉!

‘…뭐?’

눈앞에서 검면을 대는 것으로, 남궁수는 너무나도 가볍게 막아냈다.

‘이렇게, 쉽게?’

울려 퍼지는 굉음에 구중보의 눈이 크게 뜨일 때,

서걱―!

절삭음과 함께, 앞으로 쏠린 균형을 지지하고 있던 허벅지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큭……!”

어느새 방어에 쓰던 검을 회수한 남궁수가 구중보의 허벅지를 베어버린 것이다.

“끄으윽!!”

핏물이 하의를 적시며 고통이 몰려온다.

그렇지만,

“끄아아아아!!”

비명 대신 함성을.

힘을 준 허벅지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터지는 걸 감수하면서도 구중보는 다시금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크아아압!!”

내뻗어지는 주먹이 다시금 상대의 안면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스스슥―

남궁수의 신형이 잔상과 함께 사라지더니, 어느새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한 모양새로 나타났다.

나타난 그의 검은 하늘 위로 높이 들어 올려져 있었으니―

‘아…….’

다음 순간 단두대의 칼날처럼 내려찍히는 검이 그의 손목으로 꽂혔다.

퍼억!

“끄악!!”

검날이었다면 영원히 불구가 되었을 일격.

물론, 검면으로 찍었다 해도 손목이 끊기는 듯한 검격에 구중보는 고통스러워했고, 그런 그의 목에 검날이 드리워졌다.

“여기까지.”

종결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상, 비무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객기 부리지 마시오.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건 그대가 가장 잘 알 터.”

덤덤히 항복을 권하는 목소리엔 아무런 고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헉… 헉…….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잖아…….’

조금 전 모든 힘을 실어 달려들었던 자신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여기… 까진가?’

무인으로서, 모를 수가 없는 스스로의 한계.

그 사실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길 때,

- 일어나, 인마.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 뭐 했다고 벌써 쓰러져? 어쭈, 안 일어나?

그것은 껄렁껄렁하고, 거칠기 짝이 없어서 따스한 손길과는 거리가 있어도 아주 아득한 거리가 있는 목소리였다.

- 잠깐? 죽을 것 같아? 한계라고?

웃기고 있네.

목소리의 주인은 죽을 것 같다 애원하는 자신의 비명을 신랄하게 비웃었다.

- 네가 뭔데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 한계는 애초에 네가 의식적으로 정하는 게 아니야.

쓰러질 것 같으면 쓰러지고, 죽을 것 같으면 그냥 죽어라.

- 네가 진짜 지쳐 쓰러져 혼절하는 것. 그때가 네 한계니까.

그러니까,

- 아직 움직일 수 있다면, 끝까지 주먹을 휘둘러.

“객기라……. 어째서 부리지 말아야 합니까?”

짙은 절망 속에서도 구중보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형형한 빛을 발했다.

“우둔한 질문이군. 상대의 은혜에 기대어 팔다리가 잘릴 뻔하고도 무사한 것을 모르는가?”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다.

잘려 나가도 이상할 것 없는 사지가 아직 붙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의 배려니까.

다만,

“그럼… 뭐, 베십시오.”

“…뭐?”

“베이면 좀 어떻습니까. 벨 생각이면 베십시오. 비록 권사라지만, 어쨌거나 칼끝에 목숨을 건 무인 인생. 사지 무사하게 죽음을 꿈꾼다면… 그건 사치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짓는 구중보의 모습에 남궁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자, 진심이다.’

처음에는 객기나 허세로 여겼지만, 지금 두 눈에 담긴 감정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고작 비무에 무인의 삶을 걸기엔 너무 의미 없지 않소?”

그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남궁수는 결국 묻고 말았다.

그가 배운 제왕학에서 아랫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는 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칼끝에 목을 가져다 댄 구중보가 답했다.

“물론, 처음은 고작일 것입니다.”

“처음?”

“예. 고작 비무이니까 물러서고, 고작 대련이니까 물러서고…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고, 위안으로 삼게 된다면 서서히 배우게 되는 겁니다.”

무인으로서 가장 치명적인 독과 같은 것,

“물러서는 법을.”

“……!”

한 번 들이켜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것이요, 물드는 순간 지울 수 없는 탁액과 같으니―

“나는 가르쳐 준 스승님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가장 경계하라 하셨습니다.”

결국 지난 이 주간의 시간을 정리해 보자면, 그가 배운 가장 큰 가치는 하나였다.

물러나지 않는 법.

패왕보의 가주로서.

협의를 다할 협객으로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아갈 무인으로서.

자신이 배운 가장 중요한 기치를 말하는 구중보는 다시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피슛!

그 과정에서 허벅지에 베인 상처에서 핏물이 한 움큼은 뿜어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결국 한숨을 내쉰 남궁수는 천천히 검집에 자신의 창궁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검집째로 상대방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

“오시오.”

검수가 검도 뽑지 않은 채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오연한 도발.

모욕적이기 그지없었지만, 구중보는 어떤 치욕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럴 처지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덕분에 주먹을 더 휘두를 기회가 생겼다 여겼다.

“바라던바!”

구중보는 그 기회를 거머쥐기 위해 질풍처럼 쇄도했다.

패왕권(覇王拳).

패왕질풍격(覇王疾風擊).

순간적으로나마, 그 신형이 사라진다고 여겨질 만큼 쾌속무비한 권격!

하지만,

부웅―

그가 주먹을 휘두른 자리에 있던 남궁수는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고,

퍼억!!

그 자리에서 내려찍힌 검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구중보의 등판에 때려 박혔다.

“커헉!”

그 충격에 구중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저, 저런!!”

“위험한데?”

검집에 넣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쇠로 된 몽둥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조금 전 울려 퍼진 소리가 실로 살벌하기 그지없었으니, 잘못하면 척추가 박살 나 평생 불구가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끄으으…….”

그런 관객들의 걱정 속에서 구중보는 바들바들 일어섰다.

남궁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고, 구중보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금 달려들었다.

부웅!

이번엔 허벅지를 노리듯 달려들다 말고 몸을 급강하시키며 날리는 일격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뻐억―

그보다 더 빨리 날아든 검집이 구중보의 복부를 내찔렀다.

“커헉!”

내장 섞인 핏물이 토해졌다.

딱 봐도 무시무시한 내상을 입은 모습.

“다… 시…….”

그럼에도 구중보는 일어섰고,

“끄악!”

계속해서,

“컥… 커윽…….”

또 계속해서,

“다… 다시… 헉… 허억…….”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주제에 일어서는 그 모습은 관중들의 마음속에 파란을 일으켰으니,

“…하아.”

결국, 상대하다 못한 남궁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겠소.”

“…제안?”

완전히 풀린 눈.

정말로 더 하다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몰골.

이게 진정 비무가 맞나 싶은 모습이요, 그렇기에 이제서야 할 수 있는 제안.

“나는 다음 대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것이오. 그런 자격으로서의 제안이요.”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던 목패를 품에서 꺼내든 남궁수가 말했다.

“내 밑으로 오시오. 다음 대, 월영검대의 대주 자리를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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