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수미(收尾) 】
잠룡전으로 인해 사천의 분위기는 날로 무르익었다.
그전까지 대중의 인식이란, 정천맹이 무림맹의 유지를 이었다 해도 전부를 이은 게 아니며, 고작해야 일부 파편이 뭉쳤다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잠룡전이란 각 문파의 최고 전력이 아닌 후기지수들이 참전하는 것.
어느 정도의 기대감만 심어주어도 미래를 꿈꿀 수 있을 지경인데, 최고 전력이 아닌 후기지수들이 보이는 무위가 당장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즉응 전력 수준이 되자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잠룡전과 정천맹에 관한 이야기를 꽃피우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제, 다시 협(俠)과 의(義)의 시대가 왔다!’
정천협의의 시대가 열려 젖혀졌다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천협의는 개뿔.”
그 옛날, 무림맹이 건재하고 사파 찌끄래기들이 감히 구천이니 구패니 뭐니 하며 깝죽거리지 못할 때라 해서 협의가 살아 있었는가?
‘그때도 별의별 것들이 짖어대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나도 이권 다툼하는 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변함이 없다.
“이 새끼들이 무슨 새새끼들이야? 왜 이렇게 지저귀는 거야?”
“…공자님, 그럴 때는 아기 새라는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요.”
함께 서류 더미에 쌓여있던 하윤호가 핼쑥한 얼굴을 들었다.
벌써 몇 주째,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철야 중인 나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낸 결과였다.
“힘들어 보인다? 한 잔 더?”
“우욱… 그, 그건 괜찮습니다요!”
“쯧쯧, 하오문 출신이란 게 겨우 이 정도 밤샘 업무에 죽어 나가려 하냐?”
하여튼 요즘 것들은 약해 빠졌다.
호로록―
나약해 빠진 녀석은 놔두고, 철야 작업을 위한 당가 비전 특제 차(茶)를 들이켜자니, 하윤호가 썩어 문드러진 듯한 시선으로 나와 특제 차를 번갈아 두 눈에 담았다.
“한데, 공자님. 대체 그 흑탁액(黑濁液)은 무엇입니까요? 살다살다 그런 독차는 처음 봤습니다만…….”
“어허, 독차라니. 이놈이 얼마나 신묘한 약차(藥茶)인데?”
한 잔이면 몰려오는 잠 귀신도 훠이훠이 물러난다 해서 한때는 당가 칠대 금기에 들뻔하기까지 했던 것인데…….
“차(茶) 중에서 사람의 졸음을 물러나게 하는 성분만 끌어모아서 만든 거다. 덕분에 색이 탁해지고 검게 변했지만, 대대로 당가의 가주라면 누구나 마셔왔던 놈이지.”
“…그럼 잠 못 자게 한다는 것인데, 그거 부작용은 없습니까요?”
“일반인이라면 있겠지. 결국 신체 흐름을 불균형하게 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일반인의 경우고.”
무림 고수라면 신체 흐름이 어느 정도 불균형해진다고 앓는 소리를 해서야 쓸까?
애초에 독인이란 의도적으로 신체 흐름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걸 취미로 하는 별종들의 총칭인데.
“하는 김에 떫은맛이라도 어느 정도 잡아주셨으면 시도라도 하겠습니다요…….”
끝내 나약한 소리를 한다.
그게 이 차의 별미인 것을.
“크허어, 이 맛이야.”
피곤함을 막아주는 차라고 하여 거피(拒疲)라 이름 지어진 녀석을 한 모금 들이켜고 다시금 서류들을 펼쳤다.
그리고 곧장 두통이 찾아왔다.
“그래, 하여튼 이놈들이 문제야. 지들이 남궁세가야 뭐야? 왜 이렇게 남궁세가 대변인들이 많아?”
몇 주째 집에도 못 들어가는 이유.
다른 양민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우리 신진기수들이 이만큼 자라났어요, 하고 싱글벙글하기 바쁘지만, 그 뒤에서 이권 다툼을 하는 속 시커먼 놈들은 그들처럼 꿈과 희망의 청춘극을 펼치는 게 아니라 더럽고 치졸한 물밑 협잡극을 벌이기에 바빴다.
“천하가 혼란한 이 시대에 간악한 사파 잡졸들을 토벌하고 협의의 기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강한 무력이 동반되는 게 옳다… 좋아, 여기까진 인정하겠어. 그런데 그게 왜 남궁세가라는 거야?”
기껏 정천맹을 만들어 천지사방에 흐트러진 힘을 한곳에 모아서 쓸 만한 칼로 만들어놨더니, 그 칼자루를 냅다 남궁세가에 쥐여 주랜다.
“지들이 정천맹 만들었어? 맹주란 직위가 뻔히 있는데, 맹주는 그렇다 쳐도 뻔히 최강의 무력대를 만들어 그걸 남궁세가에 바치라니…….”
하다못해 남궁세가가 직접 나서서 그리 말했다면 이해라도 하지, 왜 상관도 없는 놈들이 이렇게 새새끼마냥 지저귀고 있냐고.
“…그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요? 남궁세가에 잘 보이기 위해서겠습지요.”
“쳇, 누군 그걸 모르겠냐고. 아니꼬워서 그렇지.”
사실 그놈들 하는 생각이야 뻔하다 못해 진부한 수준이다.
자신이 칼자루를 쥘 자신은 없으니 남궁세가에 쥐게 하고, 자신들은 그 과정 중에 남궁세가를 위해 이만큼이나 열심히 했으니 떡고물이나 좀 나눠주십사… 하고 열심히 손바닥을 비벼대는 게 바로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런 놈들 때문에 내가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러고 있다니…….”
너무너무 화가 나서 놈들의 면상까지 달려가 마구마구 만천화우를 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제길, 이게 다 청원 그놈 때문이야. 맹주란 놈이 무력만 좀 받쳐줬어도 이 지경까지 왔겠어?”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연원을 따지자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모지리 놈. 한 문파의 장문인이란 놈이, 그것도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란 놈이 겨우 초절정 턱걸이 수준인 게 말이 돼?”
청원은 약했다.
그것도 너무너무 약했다.
초절정 고수라고 하면 보통 무림에선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라고 치켜세워 주겠지만, 정작 천하 운영에 나서는 수준에서 비교하자면 낮아도 너무 낮다.
‘독비어옹이었나? 그 할아버지보다 좀 떨어지는 수준이니 말 다 했지.’
장문인이란 자리에 필요한 정말 최소한의 요건만 턱걸이하듯 간당간당 달성한 수준, 그게 딱 청원의 현시점이었다.
“끙… 그래도, 정치력은 괜찮지 않습니까요?”
“그걸 아니까 이 정도로 참아주는 거지.”
이제 사천삼주는 완전히 옛말.
구파일방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오는 말석 삼 형제이자, 또 지리적으로도 따닥따닥 붙어 있던 아첨정 동맹.
그들은 청원의 대에 오며 갈기갈기 찢겨 졌고, 청성파가 먼저 다른 두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오며 원수보다 조금 더 나은 사이가 되었다.
가뜩이나 무력적으로도 구파일방의 말석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오던 청성파인만큼, 이대로 혼자 정천맹의 맹주 자리를 맡아도 다음 대에 곧장 자리를 뺏기게 되리란 것쯤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 청원은 곧장 사천당문에 달라붙었다.
“저희가 이만큼 미리미리 암중에서 이권을 챙길 노력을 하는 것도, 다 그쪽에서 힘든 것들은 대부분 걸러주니까 가능한 것이지 않습니까요.”
그 결과가 이것.
정천맹의 결성과 동시에 요소요소 자리에 사람을 심어 넣고, 필요한 사업들을 미리 타내서 당가… 아니, 공명정대한 광명상단과 무림에서 가장 넓은 유통망을 가진 장강수로상단에 하나씩 타내는 것도 다 청원이 전력으로 입김을 불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 새끼가 무공 수준만 높았어도 이렇게 우리가 사파 새끼들마냥 흑막 놀음할 필요도 없었잖아?”
정치력으로 따지자면 초절정을 넘어서 전설상의 경지인 현경에 도달한 게 청원이다.
무력이 병신이라 나머지가 고생해서 그렇지.
“에잉, 쯧. 이래서 무림에서 칼 찬 놈들은 일단 힘이 강해져야 해. 몸이 병신이니 머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아냐?”
“…어째 뼈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요?”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렇지.”
내가 힘이 있었으면 이러고 있겠냐고.
정천맹 발족식 연회에서 독이라도 풀 수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안 되는 이상 얌전히 참고 살아야지.
“아… 예, 참으로 감사합니다요.”
한숨 푹 내쉬며 다시금 서류 더미를 짚어가는 하윤호의 눈 밑 그림자가 한 치 더 길어졌다.
“그런데.”
턱―
읽고 있던 모 사업체가 금궤와 함께 보낸 서찰을 잠깐 내려두고, 문득 떠오른 의문을 풀었다.
“요즘 사파 놈들은 왜 이렇게 조용하냐?”
정파에서 이렇게 대놓고 작당 모의를 하고 있고, 서열 정리가 완료되는 대로 너희들을 토벌해 버리겠다며 살인 예고를 하고 있는데도 사파 놈들은 웬일인지 조용하기 그지없다.
물론, 관아에서 토벌령을 내린 것이라 혼비백산하여 당장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무식한 놈들 특성상 이렇게 되면 한 놈이라도 같이 가자고 물귀신 작전을 쓸 만한데 말이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면 산채 몇몇이 연합해 내려와 대문파에 시비를 걸어볼 만한데, 그것도 없다.
‘그때를 대비한 비상 대비책도 세워놨는데… 김빠질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단 말이야.’
“뭐 좀 아는 것 없어?”
“끄응, 그 부분은 안 그래도 제가 고민하던 부분이었습니다요.”
“고민하던 부분인데?”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요? 사람이 없는데.”
“아…….”
사람이 없다.
일손이 부족하다.
어지간한 상황이면 변명하지 말고 노력을 더 하라 했던 열성적 노오오오력 예찬론자인 나 역시 차마 이번엔 입을 열지 못했다.
“…하긴.”
이미 한계까지 쥐어 짜내서 인력을 굴리고 있다.
하오문 사천지부의 업무는 그간 비탈길식 대각선 상승이 아닌, 절벽을 오르는 듯 가파른 수직적 상승을 반복해 왔다.
기껏해야 사천 안에서 아첨정 동맹이나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다면, 이제 그 활동 범위가 전 무림으로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무림 전역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마교놈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인력을 굴리고 있다.
‘게다가, 나 모르게 지들 내부의 일도 하나 처리하고 있는 것 같던데…….’
무엇인진 몰라도, 평소라면 매일 옆에 붙이고 다니던 홍단의 기척이 통 보이질 않는 걸 봐선 초특급 기밀로 다루어질 만한 일에 얽힌 듯했다.
그런 것들을 전부 동시에 수행하고 있으니 당연 인력난은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는 법.
덩달아 나까지 서류 업무에 온몸을 파묻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아예 못 알아봐? 하오문 쪽 정보망 다 망가졌어?”
“헤헤, 저희 본문에 사정이 좀 있는지라…….”
본문에 사정이 있다.
즉,
‘무슨 일로 바쁘냐 했더니, 지들 내부에서 가정 간 불화가 있는 거였냐?’
하오문 문파 내부가 개판이라는 것.
“…환장하겠네.”
퇴근 길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래서야 결국 돌고 돌아 원점.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건, 정천맹 발족식 때 한 자리 잘 차지하는 것밖에는 없는 거냐?”
“그렇… 습죠?”
“돌아버리겠네.”
살다 살다, 방계 그 애송이 놈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날이 오다니.
“할 수 없다. 답은 무조건 우리 문파 두 놈이 사강 안에 드는 거야. 사신단 단주 자리 하나씩 차지해 놓으면, 뭐든 달라지지 않겠어?”
“저… 공자님, 혹시 제가 검룡도호에 대한 이야기해 드린 것 잊으셨습니까요?”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안 되면요?”
“안 되면? 안 되면 그야 뭐…….”
그땐 뭐 진짜 어쩔 수 있나.
정천맹 녹림 토벌군 발족식 때 독이라도 타든가 해야지.
“쿠헬헬, 다 뒤지는 거라고?”
“…….”
누구보다도 자신이 혐오하는 사파 흑막 같은 흉소를 터트리는 당유혼.
그를 보며 하윤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사실, 진정한 협의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가장 우선 토벌해야 할 것은 이놈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