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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210화 (210/350)

210화

* * *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이 모든 게 군상극이고, 그걸 보는 관중들이 있다고 친다면 이렇게나 같은 양상이 반복되면 관중들은 진작 욕을 뱉으며 관중석을 떠나가지 않았을까 하고.

“…저, 또 기절한 겁니까?”

“아무렴. 봄날 춘풍 부는 언덕에서 단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줄 아느냐?”

“그건 또 뭔… 끄으으윽!!”

“가만 있어라,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으니까.”

이부자리를 박차려다 몰려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당불퇴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당지명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된 몸뚱이인지.’

벌써 며칠 전 일이 되어버린 당불퇴와 팽천강의 비무.

그 마지막 충돌의 여파로 비무장이 통째로 반파되어 버렸다.

혹시 몰라 관리 감독 하고 있던 장로급 고수들이 허겁지겁 뛰쳐나와 관중석까지 영향을 끼치는 걸 막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충돌에 휩싸여놓고 고작 며칠 만에 털고 일어난 이놈도 어지간하군.’

만약 자신이었다면 이리 쉽게 일어날 수 있었을지.

괴물 같은 회복력을 자랑하는 동생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다시금 푹신한 침상에 몸을 묻은 당불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 또 진 겁니까?’

“그렇지. 패배의 상징.”

“젠장, 맨날 패배의 상징이래. 당가의 푸른 야수라는 좋은 별호 놔두고.”

그저 대진운이 안 좋을 뿐이라고.

입술 삐쭉 내밀고 툴툴거리는 당불퇴의 모습에 당지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

“엥? 틀린 말이 아니라니?’

“네가 쓰러지고 난 다음, 어떻게 됐을 것 같냐?”

“…그러고 보니 그게 궁금하네. 어떻게들 됐답니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예정되어 있던 비무가 자신의 것만 있었던 것도 아니니, 다음 비무들도 진행됐을 터.

“우선 나는 이겼다. 내 상대는 십이 재라 불리던 무인 중 하나였고, 출중한 실력을 지닌 검수였지만 다행히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지.”

“쳇, 대진운 한번 좋으시네. 누군 용호상박인지, 검룡도호인지를 상대하고 왔는데.”

…이 자식이?

구시렁구시렁거리는 이 건방진 동생 놈에게 삼강오륜도의 법리에 따라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기강을 잡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드는 당지명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맏형이라 못난 놈 뺨이나 한 대 때리는 심정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찰싹!

“악! 왜 때리십니까?”

“아, 미안하다. 생각만 한다는 게.”

심정을 꾹꾹 눌러 참으려 했는데, 손이 먼저 움직여 버렸네?

“어쩌겠냐, 대형에게 배운 게 이건데.”

“끄응, 이놈의 집안. 가출하든가 해야지, 진짜.”

끝까지 버릇없는 동생 놈에게 찰싹찰싹 따귀를 몇 번 더 때려준 뒤 당지명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계속 말하자면, 나 다음은 청성의 진혁수, 그 자였다.”

“아, 그 양반? 그 양반 칼질이 또 기가 막히지. 어떻게, 통과했답니까?’

“그랬었지. 그것도 굉장히 수월하게 통과했었다.”

“하긴… 지난번에 볼 때도 일취월장하셨더만.”

한때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라지만, 이젠 별다른 악감정도 없었다.

특히나, 지난날 대형과 백 일간의 뜨거운 특훈을 함께했다 들으니 동병상련의 감정마저 들 지경이었다.

“놀라운 결과였지. 하지만, 내가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건 이미 벌어진 두 번의 비무가 아니라, 너와 싸웠던 오호도가 기권을 했다는 사실이다.”

“…예?”

기권? 그 양반이?

“아니, 왜? 절대 죽어도 기권 같은 건 안 할 사람처럼 보였는데…….”

“죽을 만큼 다쳤으니 그렇지. 너보다 조금 나았을 뿐, 오호도가 입은 부상도 결코 가볍지 않았었다.”

사흘 만에 털고 일어난 이놈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공멸하고도 웃으며 기권한 오호도가 대단한 건지.

“너는 쓰러졌고, 오호도는 자신의 도를 땅에 박아 놓고 지팡이 삼아 버텼다지만 분명 두 다리로 반파된 비무대 위에 우뚝 섰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입으로 어차피 자신은 다음 경기 때부터 참가가 불가할 것 같으니 포기 선언을 했다.”

“잠깐, 그럼…….”

설마 이거, 무승…….

“무승부일 리는 없지 않느냐. 패배의 상징.”

“…쳇.”

좋다 말았네.

“그럼 뭐, 한 명은 노났네요. 부전승으로 결승으로 바로 진출할테니.”

“그렇겠지. 참고로, 대진표를 확인해 보니 청성일검이 그 운 좋은 사람인 듯하더구나.”

“흐, 그 양반이요? 은근히 운 좋은 양반이라니까.”

그럼 결국, 남은 건 한 경기뿐이다.

“이제 형님 결승 상대만 정해지면 되는 겁니까?”

“그렇겠지.”

“흐… 대회 운영하는 양반들, 대진표를 기가 막히게 짜놨네.”

마지막 남은 건 창궁검룡 남궁수의 비무였다.

팔 강 첫 비무를 오호도로 했으니, 마지막은 창궁검룡의 차례가 돌아오게 일부러 맞춘 걸까?

마치 주인공을 정해 놓고 밀어준다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겨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끄응… 차.”

“구태여 보러갈 생각이냐?”

“그럼요. 형님은 안 가실 겁니까?”

“가야지. 옛다.”

안 그래도 그럴 줄 알고 마련해온 목발을 내밀자 당불퇴는 히히덕 웃으며 몸을 기댔다.

* * *

창궁검룡.

모두가 기다려 마지 않던 잠룡전 최고의 기대주.

이미 앞에 있던 비무들의 결과에 잔뜩 열광해 있던 관중들이지만, 이제부터 벌어질 비무야 말로 진정 백미로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창궁검룡의 출전 그 자체겠지.’

관중들에게 있어 창궁검룡의 상대가 누구든, 그건 딱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창궁검룡이 등장했다는 그 사실뿐일 테니까.

“해서, 뭇 관중들의 관심과 기대를 받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주인공 나으리.”

“…….”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는 자영의 말에 남궁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우묵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대가 영이와 비무를 치뤘다는 건 들어 알고 있소.”

“영이? 아아, 동생분 말이시군요.”

남궁영.

이미 탈락한 남궁세가의 검수를 언급하자 자영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기억납니다. 남궁세가의 고절한 검법을 견식할 수 있었던, 아주 영광스러운 기회였지요.”

겉보기엔 남궁세가의 검술과 그것을 깊이 있게 익힌 남궁영을 칭송하는 말이지만, 제왕학을 익혀 사람 보는 눈을 기른 남궁수는 그 말 너머에 깃든 음울함을 꿰뚫어 보았다.

“…시작하지.”

그에 남궁수는 더 이상 무어라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창궁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맑은 검명이 울려 퍼지고, 심판의 시작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쿠우웅!!

남궁세가의 직계, 그 중에서도 가주의 좌를 이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제왕검형이 발동되었다.

‘…과연, 이게 제왕검형.’

시작과 동시에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궁수의 두 눈을 응시했다.

‘오만하며 고고한… 제왕의 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다.

비록 스승은 아닐지 언즉, 자신에게 검을 가르쳐 준 이가 천하에 두 손안에 들 검법을 꼽자면 그중 하나에만 반드시 들어갈 검법이라 말해 주었으니까.

‘상상 이상이군요.’

위명만 들었을 때는 어떨까 싶었지만, 직접 당해 보니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짓누르는 기세가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더러운 기분이네요.’

우우우…….

특수한 기공이 서서히 움직여 전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기세를 걷어냈다.

여전히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지 언즉, 기어코 몸을 일으키는 자영의 모습에 남궁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 후후… 왜 그러십니까? 한낱 저따위가 제왕의 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으니 불쾌하십니까?”

그 모습에 자영이 음울한 웃음을 흘리며 묻자, 남궁수는 답하지 않고 대신 검을 휘둘렀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섬뢰(閃雷).

번쩍!!

별안간 창궁검에서 섬광과 함께 벼락 같은 검기가 몰아쳤다.

자영이 재빨리 몸을 던져 피하자 그 자리에 있던 비무장 바닥이 박살나며 돌조각이 튀었다.

‘문답무용? 저랑 말을 섞을 생각도 없다는 뜻이군요!’

자영은 웃음이 더욱 음울해지며, 그의 등허리춤에 패용되어 있던 검집에서 쌍검이 휘둘러졌다.

영검십이식(影劍十二式).

잠영비수(潛影匕首).

카캉!

암영은 본디 등뒤라는 시야의 사각에서 뽑아 휘두르기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언제 검을 뽑았나 싶은 암살검(暗殺劍)이었다.

하지만 남궁수는 자신의 가슴 앞에 창궁검을 수직으로 세우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자영의 암습을 막아냈다.

채앵!

암습이 막히자마자 재빨리 두 자루 교차한 검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났다가 그대로 신형을 낮추며 몸을 회전시켰다.

카카캉!!

빠르게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두 개의 칼날이 폭풍처럼 남궁수를 몰아쳤다.

“오오오! 창궁검룡을 몰아치고 있다!!”

“대단한 기세인데?”

관중들의 환호성 역시 함께 커져 갔다.

하지만,

‘쯧!’

정작 쌍검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자영의 속내는 편치 못했다.

‘하나도 먹히는 게 없군요?’

몰아치긴 개뿔.

가슴 앞에 칼 한 자루 세운 자세 그대로, 고작해야 세 치 정도 움직이는 것으로 자영의 검격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과연 대단한 격… 흡!’

그래도 계속해서 쌍검을 휘둘러 빈틈을 노리고 있는데,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섬뢰(閃雷).

돌연 남궁수의 검이 번쩍 빛을 토했다.

서걱!

목과 어깨 사이로 화끈한 감각이 와닿았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스쳤나…….’

완전히 피하지 못한 자리에는 살가죽이 갈라져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검.”

그때, 뻗은 검을 천천히 회수하던 남궁수가 말했다.

“그대는 검수가 아니로군.”

“……!”

꿈틀―

“…검수가, 아니다라.”

“틀렸소?”

“아니, 아주 정확합니다…….”

“너에겐 음울한 검재(劍材)가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검수(劍手)가 될 수는 없겠지.”

자신에게 검을 알려준 이도 그리 말했다.

너는 검수가 될수 없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듯 선언했다.

그리고,

‘그걸, 당신도 똑같이 말하는군요.’

오만한 눈빛.

타고 나길 높은 자리에서 태어나, 자신과 같은 천것들을 당연스럽게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런 시선.

좋은 핏줄, 좋은 가문, 좋은 무공.

날 때부터 밑바닥을 기었던 누군가와는 다르게, 귀하고 값비싼 것들만을 향유하며 살아온 이의 시선.

그건 정말이지,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역겹지 않습니까.’

자영의 음울한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흥이 식었군. 흉내쟁이는 좋아하지 않으니, 이제 슬슬 퇴장해 주었으면 좋겠구려.”

남궁수가 검을 고쳐 잡자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더더욱 강해졌다.

‘끝을 내시겠다는 뜻인가요?’

확실히, 남궁수는 자신과 상성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그림자라면, 남궁수는 저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과 같았다.

‘다른 모두에게 존재하는 빈틈을 노릴 수 있는 그림자도, 태양 앞에선 허무하게 져버릴 뿐.’

자신과 정반대에 존재하는 남궁수의 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항거할 수 없는 기세를 뿜어냈다.

하지만,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저 찬란한 태양에, 단 하나의 오점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어차피 우승은 내게 주어진 배역이 아니니…….’

짓눌리는 기세에 거역하지 않고 자영은 천천히 신형을 아래로 낮췄다.

아래로, 더욱 아래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저 진창 속으로 흘러가듯 몸을 낮추며 검식을 취했다.

‘특이한…….’

막 마무리를 하려던 남궁수의 눈에 그 특이한 검형(劍形)이 비추어졌다.

처음 보는 검형이었고, 느껴지는 기세도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평소 경쟁자라 여기던 오호도는 물론이고, 이번에 유명세를 떨치던 청성이나 당문의 후기지수들에 비할바도 못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치, 스스로를 숨기는 그림자 같은…….’

알수 없는 기이함.

의뭉스러움이 찜찜함을 만들었지만,

‘상관 없겠지.’

상대가 어떤 존재든, 자신은 그보다 더 위에서 찬란히 펼쳐질 창천(蒼天)의 검일지니.

제왕검형(帝王劍形).

제왕인(帝王印).

남궁수의 검이 휘둘러졌고―

동시에,

‘걸렸네요?’

자영의 검 역시 휘둘러졌으니―

푸확!!

붉은 선혈이 연무장 바닥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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