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15화 (215/350)

215화

【 사신단 】

길고 긴 잠룡전이 끝이 났다.

원래부터 명성을 날리던 이들이 자신의 이름값을 증명하고,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떨쳐냈던,

무수한 군웅의 혈투 끝에 마침내 단 한 명의 우승자만이 그 정점에 우뚝 섰으니-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맹렬하고 또 치열했던 용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단 하나의 승자.

“잠룡전의 우승자를 발표합니다!!”

그 이름이 사천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사천이 폭발했다.

* * *

사천이 폭발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정천맹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곧장 성난 황소가 되어 맹주 집무실을 달려가 두들겼다.

쾅쾅쾅쾅!!

“맹주 나와!!”

“전무림의 용봉들이 모이는 장에서 조작이 말이냐!!”

집무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 대는 관중들.

평소라면 무림의 온갖 명가들이 모여 있는 정천맹 장원을 넘나들어 이리 우루루 집단행동을 하는 게 말인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그 정천맹 구성원들조차 반쯤 모르쇠 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준우승에 올라야 할 비무자 전원이 기권하고, 덕분에 한 번도 비무를 치르지 않은 이가 승리를 차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거기다, 하필이면 그 우승자가 청성파의 문인이라고?!”

“맹주 나오라고 해!!”

쾅쾅쾅쾅!!

미친 듯이 두들겨지는 맹주전 집무실.

역대 그 어떤 무림맹주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열화와 같은 성원이 쏟아졌고, 그렇게 관심과 창설부터 온 무림을 미치게 만든 맹주 청원은 현재―

“허허허허…….”

하얗게 불타버린 채… 그저 헛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쯧쯧. 고장 났구만, 고장 났어.”

예전엔 그래도 무인 같은 기세를 풀풀 풍기더니― 어째서 이리 고장 나 버렸을꼬,

“어째서긴 어째서야!! 전부 너 때문이잖아!!”

“어어? 멱살 잡네? 예민하네? 맹주가 사람 치네?”

“이 개자식!! 천하의 악귀 놈!! 네놈이 우리 청성에 무슨 억하심정을 가졌기에 이리도 악독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더냐!!”

“허허허, 악독한 짓거리라니.”

솔직히 억하심정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이렇게 멱살잡이까지 하는 건 너무 섭섭하다 이 말이야.

“맹주도 시켜줘, 잠룡전 우승자도 그쪽으로 해줘. 뭐가 문제라고 이러시는지?”

“닥쳐라!! 이 악적!! 네 놈의 일가에서 나온 출전자들이 벌인 짓거리를 진정 부정하는 것이냐!!”

“와, 집안까지 건드리네? 그거 선 세게 넘…….”

“닥쳐!!”

멱살을 잡힌 채 솔잎에 매달린 송충이 마냥 대롱데대 흔들렸다.

‘으어어… 세상이 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우승이라도 하든가!! 네놈 가문과 상대한 모든 참가자들을 기권시켜놓고, 덩달아 자기들도 기권해?! 이러면 우승을 해도 우승한 게 아니지 않나!!”

“허허, 그건 제가 의도한 게 아닌데요?”

어디까지나 우리 애들이 반병신이어서 그런 거지.

“이 사특한 놈!!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 때 알아봤어야 했거늘!! 진창에서 구해 줄 동아줄이라 하여 잡게 해놓고는!! 사실은 다 썩어 문드러진 줄이었구나!!”

구해 주는 척하다가 뚝― 끊어 더 큰 절망에 빠트리려고!!

이 악물고 소리치는 청원이지만,

아 글쎄, 그건 나도 모른다니까 진짜?

“으으으으…….”

부들부들 떨며 고절한 삼매진화(三昧真火)의 경지로 자체발화(自體發火)에까지 이를 뻔했던 청원은 애써 찻주전자를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며 속을 다스렸다.

쯧쯧― 저거저거 봐라, 저게 도사라고.

“헤헤, 그거 저희 가문에서 진상한 특제 용정차인 거 알죠?”

“어쩌라는 거지? 뇌물수수법에 따라 구속이라도 시켜달란 말인가?”

“어어? 그거 위험한 말씀이신데, 그러다가 같이 잡혀가시려면 어쩌려고?”

“증거가 있다면 잘도 지껄여보시게.”

남은 증거란 증거들은 완전히 인멸해 버리겠다는 기세로 찻주전자에 남은 찻잎을 질근질근 씹어먹는 청원이었다.

이딴 게… 맹주?

“거참, 농담 가지고 예민하시네. 우리 사이에 진짜 이르겠어요?”

“우리 사이? 그렇군. 내가 잊고 있었군. 본래 청성과 사천당가가 어떤 사이였는지.”

‘아니, 우리 사이가 어때서?’

삼십 년 전에도 하하호호 웃으며 들이닥치는 마교에 맞서 함께 싸웠던 사이끼리 너무 섭섭하구만?

“삼십 년도 더 전에 마교 대전에 참전하셨던 선대의 장로님들께선 말씀하셨지. 툭 하면 본문에 찾아와 군비(軍備)를 명목으로 곳간과 창고를 털어 가는 당가를 조심하라고. 특히 개중 가장 악도한 이는 당대 불리는 흉왕(凶王)이라는 작자였는데 그가 가장 악질이니 평생 가까이하지 말라 했었는데…….”

‘휴, 흉왕?’

“그 행실이 극악무도하고, 전 무림에 끼친 패악질이 도를 넘어 기록상에도 그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지고한 악인. 그를 수식하는 말로는 지고한 하늘이 수천 년 역사에 범한 실수, 멸망의 징조, 무림 서편의 악몽 등등이 있었다는데… 선조 님도 무심하시지, 진작 더 확실한 경고를 남겨주셨다면 이 후손이 이런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모함이다.

세상에 이런 모함이 또 없다.

‘이 속 좁은 놈들. 자발적 동참을 강제적 징집으로 기록해 놔?’

한때 땀내 나는 전장을 함께 전전했던 전우들이라 기억해 주려 했건만, 이래서는 미화해 주기도 싫잖아.

“피곤하군.”

냉수를 들이켜듯, 찻주전자를 다시금 채워 벌컥벌컥 들이킨 청원은 몇 번 심호흡을 가다듬다가 다시금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데, 그대는 진정 괜찮나?”

“뭐가요?”

“그대 성격에, 이번 결과로 가만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아.”

뭔 말인가 했다.

“그야 뭐, 당연 가만 있지 않았죠.”

한 명은 준준결승 탈락.

또 한 명은 준결승 탈락.

당연하지만, 대차게 지르밟아 주고 왔다.

“팔병신을 상대하고 준결승? 준겨어어얼승?! 맏이라고 좋은 거 귀한 거 없는 거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박박 긁어다 투자하니까, 짜잔― 상폐되었습니다아아아?!”

“뭐? …헤헤 저는 그래도 정상인을 상대했으니까 괜찮죠? …이 새끼가 뒈지려고. 그래서 네 놈은 팔강딱이냐?!”

잘게 갈아서 삑삑이 먹이로 던져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고 할까?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그래도 대자대비한 인내심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정천맹을 찾아왔다.

“…자네 가문의 사람들도 참 고생이 많겠군.”

“에이, 무슨 소리예요. 귀한 것만 먹이고 입히며 키우는데.”

“글쎄… 자네 밑에서 먹고 자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기는 하군.”

“에이, 저 정도면 살아 있는 활불(活佛)이죠.”

소림에서 태어났어야 할 꿈나무가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그나마 다행이군. 도가에서 태어났어야 할 도기(道器)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서.”

아무리 무늬만 도인이라지만, 차마 그건 참아줄 수 없었다고―

괜히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는 청원은 이내 한참 난리를 부리는 밖을 슥 하고 돌아봤다.

“어찌 생각하나?”

“뭐 말이에요? 쟤들?”

문밖에서 날뛰는 군중이라면 뭐―

“크게 걱정할 게 있어요? 자고로 군중은 개돼지라구요.”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거다.

“…잘도 정천맹주 앞에서 험한 소리를 지껄여대는군.”

“허허, 그래도 자기 맹의 무인들이라 싸고도시나 본데. 설마 부정하시는 건가요?”

“부정은 안 했네만.”

“역시.”

이 양반, 만만치 않게 자기가 혐오해 마지않는 진혁수랑 동류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요?”

“당연히 그 뒤에 있는 이들이겠지.”

“아하.”

당연하지만, 청원이란 양반은 군중들이 집무실 대문 좀 두드린다고 눈 하나 꿈쩍할 양반이 아니다.

어차피 봉기를 일으킨 성난 군중들이라 해봐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별 볼 일 없는 중소 문파들.

저 정도면 돈으로 풀어서 미리 챙겨둔 흑도 문파의 인력만으로 싸그리 밀어버리고도 남는다.

다만,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는 거지.’

사실 이미 그 답도 뻔히 정해져 있긴 했다.

“열 잔뜩 받은 것 같던데요? 이렇게 대놓고 사람 움직이는 건 그들의 취향이 아닐 텐데.”

“열이 안 날 수가 없겠지. 평생 제왕(帝王)으로 살아온 이들인데.”

당연, 범인은 남궁세가였다.

“암만 이곳이 남궁세가가 머무는 별채랑은 떨어져 있다 해도, 남궁세가가 이름을 올린 정천맹 내부에서 이 정도 소요를 벌일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뜻일 터……. 빌어먹을 놈들. 그렇게도 새 시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싶었다는 건가?”

아득바득 이를 가는 청원이었고, 그게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확실히, 예전이었으면 이러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이미 흘러간 구닥다리 옛날에는 남궁세가가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이렇게 깝죽거리지는 못했다.

왜냐면, 그때는 자기 잘났다고 빼액거리는 남궁세가도 감히 어쩌지 못할 무림의 태산북두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림, 그리고… 무당.’

뭇 무림의 존경을 받던 이들이며, 그 이름은 나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없지.’

이유는 모른다.

삼십 년 전의 대사건 이후로, 소림과 무당은 둘 다 봉문에 들어갔다.

다만 그 이유는 하오문의 정보망에서도 알려진 게 없었다.

‘그나마 참배객은 받는다지만, 그 역시 입구까지에 불과하고.’

사실상 만가쟁패의 시대가 찾아온 가장 큰 이유도, 무림의 중심축이 되던 두 문파가 나란히 봉문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파다했다.

실제로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고, 지금의 남궁세가도 그 영향을 잔뜩 받아 한도 끝도 없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열렬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쩌긴 어쩌겠나. 속이 뒤틀려도, 당장은 힘이 부족한 것을.”

그리고, 청성은 정천맹을 뒤에 업은 아직도 그 존재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곧 창설될 사신단의 주축. 그 대장 격이라 할 수 있는 청룡단의 자리는… 남궁가에 주어야겠지.”

잠룡전이 참 많이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원래는 고작해야 후기지수들이라 여기며, 단주 자리에 그들을 앉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 이야기가 돌았건만, 잠룡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당대의 후기지수들이 더 이상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누가 우승해도 이상이 없다는 말들이 돌 정도로, 순위권을 차지한 이들은 단주 자리를 역임시켜도 되겠다는 의견들이 상당했고. 자연스레 청룡단주의 자리를 누가 맡게 될 것인지가 가장 화두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야, 그런데 그 자리를 남궁세가에 준다라… 속이 많이 쓰리겠는데요?”

“흥, 속이 쓰리다고 해서 내가 어찌하겠나.”

힘이 없으면 바닥을 박박 긁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뒤틀린 조소를 입가에 걸은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만, 그냥 주면 섭섭하겠지.”

“오호.”

정치력으로만 따지면 초절정의 경지도 뛰어넘은 것이 분명한 청원의 눈이 희번덕 빛이 났다.

저 눈빛의 의미는 분명, 내가 못 먹을 감이라지만 남에게 성하게 주기 싫다는 의지로 가득한 눈빛!

“주작단주 자리는 팽가에게 줘야겠어.”

남궁가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하북팽가에게 이인자 자리를 넘겨버린다.

그 의도는 실로 뻔했다.

“오대세가의 분열을 유도할 생각이네요?”

“언제 적 오대세가인가?”

옛날옛날 소림과 무당이 존재할 때야 오대세가는 절대적 강적을 앞두고 똘똘 뭉치고는 했다.

하지만 그들이 없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남궁 놈들에게 일인자 자리를 주고, 하북팽가에게는 이인자 자리를 준다. 가뜩이나 경쟁이 심한 두 가문이 이런 서열을 나눠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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