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 *
“자경단 말씀이십니까?”
천하제일고금무적우내최강가주, 당위혼은 대형이란 놈이 갑자기 가져온 안건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언덕 수준으로 쌓인 살인적인 서류 더미에 반쯤 파묻혀 있던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동글동글한 눈망울뿐.
저 맑은 눈을 보면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어 감상에 빠지려다가 정신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야.”
“흐음… 자경단이라…….”
당위혼은 옆에 놓인 독차(毒茶)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야말로 절묘한 한 수. 청성의 장문인이 예전부터 시국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과연… 저희를 이런 식으로 챙겨주는군요.”
“시국을 읽는 능력은 무슨, 그냥 정치무인(政治武人)이겠지.”
“형님…….”
왜?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사천을 어지럽게 만들며 시끄럽게 짖어대는 놈들도 때려잡아야겠다, 마침 잡룡단이니 뭐니 하며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우리들이 있으니 일 떠넘긴 거겠지.”
“…너무 그리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황상 당가주님은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만약 단순히 사천의 치안과 정천맹 내외부의 기강을 다지고자 하여 본가를 외당(外堂) 정도로 두었다면 저 역시 반발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경단이란 어디까지나 정천맹 외부의 세력임을 인정하는바, 설령 본가가 정천맹 내부에 속한 문파들이 사천을 소란스럽게 한다 하여 징벌한다 해도 눈을 감아주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천의 터줏대감으로서 확실히 사천당가를 인정함으로써 우리 집의 위세를 드높여주겠다는 뜻도 된다.
그 부분은 나 역시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호의는 한 일 푼쯤 될 거다.”
나머지 구 할 구 푼은 짖어대는 다른 놈들이 보기 싫어서 대신 쥐어 패달란 악의로 점칠된 것일 테고.
“뭐, 어쩔 수 없겠지요. 문파 간의 일에 개인의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제가 걱정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인력 수급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방계들의 인원은 사천 전체를 덮기엔 아직 수적으로 너무 열세일 테니.”
빠른 속도로 과거의 위세를 복구해 나가는 당가지만, 이놈의 인구수만큼은 어떻게 안 된다.
구파일방처럼 제자들을 받아들여 숫자를 찍어내면 되는 문파와 달리, 가문(家門)이라는 혈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확실히 그게 흠이다.
‘일단 혈족이니 물보다 짙은 피의 끈끈함이 있기는 한데, 문제는 그래서 수를 불리기 힘들다는 거지.’
이제 와서 방계 녀석들을 같은 핏줄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더더욱 그래서 최소한 녀석들 정도는 되는 이들이어야만 당가인으로 받아들여 줄 수밖에 없다.
당가의 가장 궁핍했던 세월과 가장 절박했던 고난을 함께하였던 이들―
미안하지만, 적석촌과 율도촌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확실히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 해서, 본가의 자경단은 정천맹 맹외이사(盟外理事)의 형태로 갈 거다.”
“묘수……. 그렇게 되면, 당가를 사천의 터줏대감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정천맹 내부에서도 인력을 끌어온다든가 하는 경우의 수도 가능하겠군요.”
어디까지나 맹의 외부 인사인 만큼 맹의 정치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권한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내부에서 도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구조적인 불리함도 존재할 거다.
하지만,
‘우린 경우가 다르잖아?’
이미 맹주인 청원이 우리랑 한통속이고 정천맹의 정보집단인 자서당이 하오문 소속이다.
구조적 불리함은 가뿐히 제쳤을뿐더러,
‘권한은 떨어지지만, 아니꼬울 때 한마디씩 툭툭 던져대는 건 가능하고, 내부 인력을 끌어오는 것 역시 절차적으로도 가능하지.’
말하자면 좋은 것만 다 빨아먹을 수 있다고나 할까?
어설픈 미끼를 내걸었다가는 내가 발작할 걸 잘 아는 청원다운 적절한 타협점이기는 했다.
“하면, 형님께서 직접 자경단을 이끌 생각이십니까?”
암만 당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당가의 이름으로 운영된다지만 가주가 직접 나선다면 오히려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내가 나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니, 사실 나도 할 일이 있고… 다른 녀석들도 슬슬 실무를 경험해야지.”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다루는 것.
용인(用人)이란 쉽게 익힐 수 없는 경험의 산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차양당에게 맡길 생각이십니까?”
“어디서부터라니.”
우리 가주님이 아주 당연한 걸 묻는구만.
“그야 당연히…….”
* * *
차양당 서른세 명이 집합했다.
원래 그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잘 있지 않은 일이지만, 요즘 따라 묘하게 그 일이 잦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흔치 않은 일로 모이게 된 차양당의 당주, 당지명은 자신의 손에 들린 명령서를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실화냐?”
[잡룡단을 정식으로 창설해라. 사람 많이 모으고, 최대한 번창시켜라.]
오늘 새벽 그들의 대형이 툭 하고 던져주고 간 문서 꾸러미 중 하나.
참고로, 그 옆에는 잡룡단의 창설을 정식적으로 승인한다는 정천맹주의 직인이 찍힌 허가서와 무려 사천성주의 직인이 찍힌 허가서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앞전 것들이 주는 무게감들도 분명 보통은 아니었지만, 당장 손에 들린 명령서만큼 묵직하지는 않았다.
“정식으로 창설? 번창? 이게 말이나 쉽지…….”
정천맹주의 직인이 찍힌 허가서에 따르면 이번에 창설하게 되는 잡룡단은 정식으로 사천 내에서 활동하게 되며, 그들의 단주는 공식적인 정천맹 맹외 이사급 대우를 받아 정천맹 무력대인 사신단과 동급의 권한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이런 웃긴 이름의 집단이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는 것은 둘째치고… 그런 집단을 나보고 이끌라고? 그것도, 아무 대책 없이 이 문서 하나 던져주고?’
명령서를 쥔 당지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비슷한 표정의 당율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고로, 대형께선 그거 하나 던져주고 오늘 새벽부터 어디론가 나가셨다고 하십니다.”
“…어디 간다고 말씀은 있으시더냐?”
“오래지 않아 다시 뵐 거라고는 하는데…….”
“우리 알아서 하라는 뜻이시군…….”
차마 어디서 듣고 있을까 봐 욕은 못 하겠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우울한 것도 사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웃기지도 않은 명령서를 힘없이 축 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멸망이군.’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의 방계들이 보였다.
“…들어서 알겠지만, 대형께서 우리에게 과제를 하나 던져주고 가셨다. 너희들이 그간 신명 나게 해오던 잡룡단 활동… 그걸 공식적으로 진행하고 최대한 사람을 끌어모아 규모를 확대시키라고 하신다.”
답이 없다.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당지명도 충분히 이해했다.
‘막말로, 누가 여길 오려 하겠냐고…….’
여러 가지가 문제지만,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시기였다.
‘지금 사람들은 이제 막 창설되는 사신단에 입단하려고 난리다. 이미 출세가 확실시된 사신단을 놔두고, 이름도 웃긴 잡룡단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있기는 할까?’
게다가,
‘그동안 이 녀석들이 자경단이랍시고 기존 정천맹의 문파들을 다 두들겨 패고 다녀서 화만 잔뜩 돋우어 놨을 텐데?’
암만 생각해도 이 웃기지도 않은 이름의 자경단의 미래는 침침하기만 했다.
“…형님, 저희 어떻게 합니까?”
“끄응… 어쩌겠느냐. 일단 사람을 모아봐야지.”
“홍보지라도 돌립니까?”
“그래야겠지…….”
암만 봐도 번창은 개뿔… 더 없이 떡락할 것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처맞기 싫으면 시도라도 해봐야지…….’
결국 방계들은 그나마 글씨 잘 쓰는 당율기를 필두로 옹기종기 모여 홍보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자, 일단… 사람을 낚기… 아니,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럴듯한 미끼를 제시해 보자꾸나.”
“미끼요?”
“그냥은 안 올 게 분명하잖아.”
“하긴…….”
상대는 무려 정천맹의 무력 부대인 사신단이다.
거기 한번 들어가 보겠다고 물밑에서 무수한 뇌물수수가 오간다는 것은 사천인이라면 모를 일 없는 사실.
특히나 사천 약초계의 큰손인 당가인들은 요즘 들어 사천 시장에 돌아다니는 영약의 거래량이 급증하고 그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 걸 귀에 딱지가 눌러앉을 듯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뇌물로 영약을 바치고 사신단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는데, 저희는 반대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저희는 영약을 주는 거죠.”
이 자경단은 영약을 무료로 해줍니다!
“저희가 약초는 잘 캐잖아요?”
헤헤.
좋은 의견 아니냐며 웃는 방계 하나의 모습에 당지명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영약이 싫으면 암기는 어떻습니까?”
“암기?”
“넵. 요즘 보조 무장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다닌다는데, 요새 저희 가문에서 썩어 도는 악성 재고들이 꽤 많지 않습니까. 그걸 뿌리는 거죠.”
“음…….”
약초보단 그나마 나은 제안인 듯했다.
…가입하면 뭔갈 준다는 걸로 꼬신다는 점에선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래도 당주 형님. 암만 그래도 너무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암만 처지가 좋지 않다 해도 뭘 나눠주는 걸로 사람을 엮으려 드는 건 좀…….”
그나마 당불퇴가 영 자존심이 상함을 숨기지 않는지 표정을 구기며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쩌겠느냐…….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사신단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예? 어째서입니까? 설마 명성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입니까?”
“그것보단 더 현실적인 이유지.”
당지명으로선 도저히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긍정해야만 했다.
“인맥, 그리고 무공.”
“인맥은 그렇다 치는데… 무공이요?”
“다 쟁쟁한 후기지수들 아니더냐. 그들에게 무공 한 자락, 깨달음 한 소절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 여기는 것들이지.”
창천검룡 남궁수.
오호도 팽천강.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그 둘이 단주인 사신단은 가입 희망자로 임시 단주 숙소 앞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들었다.
“아니, 그럼 우리는 왜 안 온답니까? 저도 그 팽가네 양반이랑 동수 비스무리하게 이루었고, 형님도 남궁씨네 칼잡이랑 양패구상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 그런데 말했지 않느냐.”
중요한 건, 무공 한 자락씩 배우는 것이라고.
“잡룡단에 들어와서 그들이 뭘 배우겠느냐? 결국 무림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칼잡이들인데.”
그래, 그게 문제였다.
사신단의 단주 넷은, 검이냐, 도냐, 쌍검이냐 정도의 문제만 다를 뿐 전원이 칼잡이들이었다.
“젠장!! 더러운 칼잡이들!!”
“진정 사나이 묵직한 주먹에는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야야, 그나마 주먹이면 좀 낫지. 우리는 독과 암기잖아.”
잡룡단은 와봤자 배울 게 없다.
암만 당가의 방계들이 의욕에 가득 차 입단하는 꿈나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 해도, 주 종목부터가 다른 데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영약… 쓸까요?”
“…하는 김에 암기도 준다고 해라.”
결국 현실에 굴복한 방계들을 훌쩍훌쩍 홍보지를 작성해 나갔다.
그런데 홍보지를 절반쯤 썼을 무렵,
“당주.”
“대전사님?”
붉은 바위 일족의 대전사 적웅이 저쪽에서 휘적휘적 걸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밖에 좀 나가보셔야겠네. 자네들을 찾아온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더군.”
“예?”
어째서?
“응? 그건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않나?”
적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잡룡단이라고 했나? 그에 입단하기를 희망하는 이들로 난리도 아니더군.”
“예에에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