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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227화 (227/350)

227화

【 뛰는 놈, 나는 놈 】

하북팽가.

단순하지만 파괴적인 도(刀)를 병장기로 다루는 이들답게 단순무식한 이들이 주류를 이룬 무가였다.

저 잘났다고 설치는 이들이 수백 수천이 넘는 이 시대서도 한 손 안에 드는 가문인 만큼 그 위세는 어마어마했으니, 그런 가문이 습격당했다는 말에 청문회장 안은 난리가 났다.

“본가가 습격당해? 말도 안 되는!”

부정.

“이놈!! 그게 무슨 소리더냐!!”

분노.

“갑작스레 본가가 습격을 당한다고? 어째서…….”

의혹.

“대체 누가 본가를…….”

당황.

“그게 진실이더냐?”

수긍.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인 이들은 당연 주작단의 파벌이었다.

일단 제집에 불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정신 유지가 안 되거든.

그래도 그들을 어떻게 어떻게 정신을 추슬러 공통된 한 가지로 의견을 통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누가 대체 팽가를 습격했느냐? 병력은 얼마나 되지? 그 구성원은? 피해 상황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말해 보라고, 사람 하나 잡아먹을 듯 밀려오는 주작단 중진들의 모습에 전령은 숨을 헉헉거리면서도 겨우겨우 급보를 이어 갔다.

“스스로를 사패천이라 소개한 그들은 물경 일천에 달하는 병력으로 습격하여 왔습니다. 도제께서 이끄는 하북팽가는 그들의 공격을 훌륭히 방어하고 역공을 가해 일차적으로 격퇴하셨다고 합니다.”

“역시……!”

“그래, 본가에는 가주님이 계시니까!”

도제(刀帝) 팽만월.

하북팽가의 가주이자, 당금 무림에서 가장 칼 잘 휘두르기로 유명한 인물들 중 하나의 이름이 울려 퍼지자 주작단 파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전령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그런데, 습격해 온 이들의 구성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심상치 않아? 그게 무슨 뜻이더냐?”

“우선 사패천이란 괴집단을 구성하는 병력 대부분은 산적들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강시가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강시라고?!”

그 단어에 모두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번뜩였다.

이 무림에서 산적이라 하면 녹림을 떠올리듯, 강시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은 하나뿐.

“흑시문(黑尸門)!!”

강시를 다루고, 강시공이란 괴이한 무공을 익힌 그들은 단순히 기괴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으니―

“구패(九覇)의 일익이 어째서…….”

흑시문 역시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사파인 만큼, 그 둘이 같은 전장에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를 뜻했다.

“설마, 구패끼리 손을 잡았단 말인가?”

* * *

야차전(夜叉戰).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도의 아홉 집단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그 집단의 본거지를 뜻하기도 했다.

피에 굶주린 야차들의 전당.

사지(死地) 중의 사지라 할 수 있는 그곳은 어떤 이도 감히 들어갔다가 몸 성히 나올 수 없을 것이라 공포에 벌벌 떨 수밖에 없는 마굴이었다.

한데,

“…크으, 빌어먹을 놈들이.”

놀랍게도, 그 마굴의 주인이 지금 자신의 처소에서 피투성이로 뒹굴고 있었다.

구검수라(九劍修羅) 율극신.

일천 야차들의 우두머리이며, 북방의 공포라 불리는 야차전의 주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이죽거렸다.

“치사하게, 세 놈이서 덤벼들다니.”

그를 찾아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세 명.

그중 하나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큭큭, 정파도 아니고. 마적 놈이 정정당당하게 일대일을 논하냐?”

“그래, 너 같은 산적이나 나 같은 마적은 그딴 거 없는 거 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줄 몰랐소, 장주.”

율극신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서 조소를 흘리는 산적을 넘어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검수에게 향했고, 그에 시선을 받은 이는 덤덤히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저 검채(劍債)를 받을 뿐.”

“…젠장, 그놈의 검채. 나도 진작 하나 달아놨어야 하는 건데.”

듣고 있으면 억울해 팔짝 뛸 것 같은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있나.

상대는 검채(劍債)가 합당하다면, 그 어떤 부탁도 들어준다는 만검산장(萬劍山莊)의 주인이었으니까.

다만,

“대체 너희 두 놈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러냐?”

남은 둘.

유난히 손끝이 검게 보이는 어두운 인상의 사내와 인상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볼 수 없는 중년인을 보자니 도저히 그러려니 할 수 없는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그에, 손끝이 검게 물들어 있는 사내가 자신의 독수로 코끝에 걸친 애체(靉靆)를 슥― 하고 들어 보이며 답했다.

“좋은, 시체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 내 시체 구하자고 구패의 네 문파가 뭉치셨다?”

그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율극신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입 한번 뻥끗하지 않고, 전투에도 참전하지 않은 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중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녀석이구나.”

야차전의 몰락도, 자신의 죽음도, 이 모든 꿍꿍이를 꾸민 것도.

그 모든 것은,

“흑상(黑商). 네 녀석이 꾸민 짓이었어.”

눈앞의 중년인이라고.

설령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내뱉는 그 외침에 중년인은 덤덤히 시선을 마주했다.

“하…….”

그 빌어먹을 무언(無言)의 답에 율극신은 허탈함이 몰려와 물었다.

“왜지? 대체 어째서냐? 저 산적 놈은 되고 난 안 되는 거냐?”

약한 놈은 죽고 강한 놈은 산다.

약육강식의 법칙이야 평생 들판에서 살아온 마적 출신의 율극신에게는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저놈은 되고 난 안 되는 것이란 말인가.

“저놈이 아니라, 나랑 손 잡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것은 순수한 의문.

죽음을 맞이한 것이야 태어난 이상 당연한 것이지만, 왜 하필 내가 아니라 저놈인가는 궁금했다.

그에, 흘러가는 상황을 묵시(默示)하기만 하던 흑상이 입을 열었다.

“그야, 녹림과 야차전의 가장 큰 차이 때문입니다.”

“큭! 야차전이 어때서! 우리가 머릿수론 밀리지만, 질적으론 안 밀린다고!”

단순히 반발 심리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머릿수로 따지면 온갖 잡놈들까지 다 끌어모은 녹림에 비할 바가 못 돼도, 두 세력이 일대일로 붙는다면 결코 녹림에 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흑상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배력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배력?”

“녹림의 투왕(鬪王)께서는 휘하의 도적들은 온전히 본인의 지배하에 무릎 꿇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전주도 그러십니까?”

“하…….”

율극신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상대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정확해서였다.

‘그거였나.’

야차전은 전장의 투귀(鬪鬼)와 북방의 마적들을 모아 만든 집단.

분명 하나하나의 무력만 따진다면 어디서 꿀릴 이들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단합도 안 된다.

평소에 성세를 이루고 있을 때야 무력과 권이로 찍어누른다지만, 이렇게 패색이 짙어질 때가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절은 남았으려나?’

약자를 상대할 때야 야차(夜叉)들이지, 구패 중 넷이 손을 맞잡고 쳐들어왔다면 도망쳐도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왕(王)이고, 너는 한낱 수라(修羅)에 불과한 것이다.”

이젠 허탈한 표정을 짓는 율극신 앞에 녹림투왕 조취산이 껄껄 웃으며 자신의 애병, 거력패부(巨力覇斧)를 들어 보였다.

“자, 이젠 죽을 시간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사형 선고.

율극신도 자신의 죽음이 부쩍 가까워져 그 그림자를 드리웠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크크크, 죽을 때 죽더라도. 혼자 가면 너무 외롭지 않겠나.”

구구구…….

어마어마한 기세와 함께, 율극신 등 뒤로 아홉 자루의 검이 서서히 떠올랐다.

‘구천구검류(九天九劍流).’

이기어검을 통해 아홉 자루 검을 동시에 다룰 수 있을 때나 익힐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검법이었다.

“물러나시게.”

만검산장의 장주가 손을 뻗어 흑상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흑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야차전을 벗어나는 흑상과는 반대로 세 명의 패주들은 율극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흥― 하고 콧김을 내뿜은 장취산의 거력패부가 맹렬히 떨렸고, 만검산장의 주인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흑서문의 문주 역시 양손을 검게 물들일 때, 흑상은 야차전을 완전히 벗어났다.

콰아앙!!

뒤이어, 폭발음과 함께 야차전의 지붕이 무너졌다.

건물 잔해를 뚫고 날아오르는 아홉 자루 검이 허공을 노닐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검사의 최후를 장식하듯 장대한 궤적을 그렸다.

‘구천구검류라…….’

아홉 개의 검에 하나하나 각기 다른 검의(劍意)를 담았다던가?

우연이겠지만, 당금 사파무림을 아홉으로 나눈 구패(九覇)와 그 숫자가 겹친다.

“아홉은, 역시 너무 많군.”

그래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한쪽 눈을 가려본다.

“우선은 그 숫자를 반으로 줄여볼까.”

이미 스스로 구패이길 포기한 수로채는 쳐내고,

“사패(四覇)가 좋겠어.”

흑상은 그리 마음먹었고, 그날로 야차전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당했네.”

야차전이 멸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죄송합니다요……. 면목이 없습니다요…….”

하윤호가 고개를 푹 숙여 왔다.

평소라면 대차게 갈궜을 테지만 지금은 너무나 시원하게 당해서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과나 듣고 싶어 부른 거 아니니까, 말이나 해봐.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거냐?”

멸문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은 하북팽가에 대한 지원군 논의로 한창 갑론을박이 펼쳐지던 와중이었다.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팽가가 공격받았다는 정보를 듣고 지원군 파병에 대해 논의하는 데도 아주 한 세월이 걸렸다.

‘가긴 가야 하는데, 내가 가긴 싫고. 그렇다고 남에게 흔쾌히 양보하자니 또 공적이 걸린 문제라 쉽게 고개를 끄덕이긴 힘들다는 거지.’

이 새끼들 탁상공론이야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지만, 삼십 년 만에 그 진국을 다시 한번 체감하자 아주 토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같이 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들 가겠다는 걸 발목 잡고 늘어질 때는 나 같아도 다 자근자근 밟아버리고 싶던데.’

눈 돌아간 팽천강이 말리는 놈들은 전부 다 베어버리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서야 겨우 구원군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으니―

‘야차전의 멸문 소식이 들려온 것도 딱 그때였지.’

“저희가 정천맹을 구성하는 동안, 사패천의 주축이 되는 네 문파 역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요. 게다가, 그들의 활동 범위가 사천과는 정반대의 위치이며, 전략적으로 정보가 차단되었기에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습지요.”

중원은 넓다. 한 성의 크기만 해도 그곳에서 태어난 이가 한평생을 살다가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인데, 그런 것이 수십에 달한다.

끝에서 끝까지라면, 그냥 다른 나라라고 봐도 무방했다.

“가뜩이나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와중에 팽가를 공격해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라…….”

정파의 종족 특성 탁상공론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지 않고서야 내릴 수 없는 전략.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저 사파 새끼들한테… 머리가 생겨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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