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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228화 (228/350)

228화

허를 찔렸다는 표현이 상상도 못한 빈틈을 공략당했다는 걸 의미한다면, 지금의 경우가 딱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래, 이상하게 잠잠하다 했지.”

하다못해 지렁이도 밟으려 들면 꿈틀거린다는데, 대놓고 사람 모아 토벌하겠다는데 산적 놈들이 가만있으면 그게 말이 될까?

다만,

“그렇다 해도,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삼십 년의 세월.

눈 떠보니 도달한 이 미래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개판이었고, 삼십 년 전에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사파 새끼들이 구패니 구천이니 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파 놈들이 아직 몇몇 온존해 있는데도 그들이 감히 설칠 수 있다는 건, 인정하긴 싫어도 사파 놈들 성세가 과거 전성기의 구파일방에 버금간다는 것.

그런데, 그런 놈들 중 하나가 시원하게 밀려버렸다.

“애들 분위기는 어떻지?”

“좋지 않습니다요…….”

구패 중 하나가 밀렸다는 소식은 느슨해진 정파 놈들에게 긴장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정천맹이 탄생하고, 정천협의의 시대가 도래했니 뭐니 노래를 부르던 놈들은 자기에 맞수를 둘 만한 세력이 등장하자마자 자라목처럼 빼꼼 고개를 집어넣어 버렸다.

“벌써부터 협의를 팔아먹으며 자기네 지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겠다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요.”

“어째 이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냐.”

기껏 연합군을 구성하고 나니, 자기들은 자기네 지역 방어하겠다고 돌아가려 한다.

남의 세력은 끌어들여 싸우게 하면서, 자기는 정작 자기 집 지키겠다고 홀라당 빠지려고?

“어림도 없지. 전부 구금시켜버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요?”

“가능하지.”

권력의 힘이라면.

쨍그랑―

“헉! 그건 사천성주의 각패?”

고급 무소의 뿔을 갈아 만든 사천성주의 각패.

이게 있으면 최소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질질 짜는 놈들의 입을 다물려 줄 정도는 될 거다.

“혹시 몰라서 미리 하나 받아놨다.”

예전부터 이 새끼들 하는 짓은 뻔해서, 꼭 사건 터지면 한 명쯤을 튈 게 눈에 훤했거든.

“이걸로 임시변통은 되겠지.”

급한 불은 이걸로 끄고, 그다음은 이 일의 발단이었다.

사패천.

이름으로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면 저들을 구성하는 구패의 세력은 총 넷.

그리고, 그중 하나는 암만 생각해도,

“이거 너희 아니냐?”

“아니, 왜 저흽니까요?”

하윤호가 억울하다며 빼액! 거렸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기동전. 사건이 끝날 때까지 네 귀에 들어오지 않게 만든 정보 차단 능력. 장거리 이동을 했음에도 대규모 물자 이동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물자 자급 능력. 그 모든 게… 아, 젠장.”

처음엔 하오문에서 사천지부 손절해 버리고 일 처리를 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말하다 보니 가장 가능성 높은 이들이 하나 떠올랐다.

“흑상(黑商). 이 자식들이구나.”

고작 지부 하나의 정보력을 사용할 뿐인 이놈과 다르게, 전 중원 전체의 흑상들이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면 충분히 말이 된다.

“지금 흑상에 상천(商天)이 있나?”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없습니다요. 하지만… 이 정도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려면…….”

“새로 선출될 수 있겠군. 젠장, 두 배로 골 아프게 됐네.”

흑상은 하오문보다 더한 점조직이다.

기본적으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거지들의 문파인 개방이나, 기루나 뒷골목에 가면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기녀, 소매치기 등의 문파인 하오문과 달리 흑점은 기본 구성 자체가 불법 상인들.

전쟁터를 종횡하는 노예 상인도 있고, 밀무역으로 재산을 불리는 밀수업자도 있으며, 국법으로 금하는 염상(鹽商)들도 있다.

하나하나가 눈에 띄는 즉시 종신 옥살이가 확정된 놈들이라, 평소에는 서로서로가 믿지 않고 때론 서로서로 관아에 밀고 하는 등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 년에 단 한 번 이루어지는 흑상의 회합에서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할 가장 위대한 상인을 꼽는 경우가 있다.

‘공석인 경우가 더 많지만, 간혹 몇십 년에 한 번 다른 어떤 흑상들도 인정할 만한 상행을 성공시킨 이는 흑상의 우두머리, 상천(商天)이 된다.’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어, 가족들도 등쳐먹는 일이 무궁무진한 그들이 우두머리로 인정하는 경우.

그건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다.

“천하(天下)를 도모할 때. 빌어먹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판돈이 천하를 논하는 수준이 되어야 그들은 뭉칠 기미를 보인다.

‘그건 무척이나 희귀한 경우지만… 만약 이루어지기만 하면, 다른 천하 삼대 정보 집단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일 수 있다.’

“누가… 누가 상천이 될 것 같냐?”

“그, 그건… 죄송합니다요……. 정보가 부족합니다요…….”

“하…….”

진짜 답이 없네.

‘당연한 거긴 한데.’

밀무역자들의 왕이라면, 국가의 입장에선 대역죄인이나 다름없는데 당연 그 정보는 비밀리에 숨겨질 수밖에 없다.

한낱 지부 하나를 맡고 있는 하윤호의 입장에서 그걸 알아차리는 게 오히려 더 힘든 일.

“이거 진짜 답이 없는데?”

외우내환(外憂內患)이라더니, 안팎으로 답이 없다.

‘그냥 마교에 대한 정보를 뿌려버려?’

이쯤 되면 진짜 역사 깊은 정사마의 삼파전으로 가야 되나…….

진지하게 깽판을 고심하고 있는 그때,

벌컥―

닫혀 있던 안가의 문이 거칠게 열려 젖혀지며, 피투성이의 인영 하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응? 너는…….”

“홍단?!”

그녀의 정체는 하윤호의 그림자 무사 홍단이었다.

원래도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니는 그녀였으나, 지금은 그 흰옷을 피로써 붉게 적셔버린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비틀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지, 지부장님…….”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것을…….”

한 걸음 떼어내기도 힘들어하는 주제, 안간힘을 다해 다가온 그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마찬가지로 핏물에 흠뻑 적셔진 서찰.

그것을 겨우겨우 하윤호에게 내민 그녀는,

“홍단아!!”

직후, 힘없이 허물어졌다.

* * *

조금 시간을 돌려 과거.

홍단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 하윤호의 밀명을 받아 머나먼 광동까지 온 상태였다.

“홍단아, 네가 직접 움직여 줘야겠구나.”

그녀는 자신을 떠나보내던 이의 눈빛을 기억했다.

‘주군…….’

걱정에 가득 찬 눈빛.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며,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며 가짜 표정을 짓는 것에 익숙해 진심을 드러내길 꺼리는 그의 주군이 몇 년 만에 자신의 앞에서 숨기지 못한 속내를 드러냈다.

“미안하구나.”

자신을 사지로 밀어 넣는 것만 같아 차마 쉽사리 말문을 떼지 못하는 그 모습에 홍단은 다짐했다.

“반드시,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어릴 적, 자신을 주웠던 그의 표정.

자신이 자랄 때 간간이 보이던 미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그 모습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내려진 밀명을 목숨 바쳐 이루어 내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떠나온 광동성.

이곳에 그녀가 속한 하오문의 본단이 있다.

“들어오시오.”

지부장 대리로 찾아왔기에 다행히도 홍단은 하오문주를 접견할 수 있었다.

비록, 대기 순번만 며칠을 기다려야 했고, 그 와중에 암구호만 십수 번도 넘게 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가 따랐지만, 어쨌거나 만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문주를 뵙습니다.”

그나마도 드리워진 발 너머에 몸을 숨긴 하오문주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얼굴을 보는 게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직접 가지고 온 하윤호의 서찰을 문주의 수행인에게 건넸다.

“지부장님의 서신입니다.”

“윤호 녀석의 서신이라…….”

수행인이 가져다 준 서찰을 묵묵히 훑은 문주는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꽤 긴 시간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짓눌렀음에도 문주도, 수행인도, 홍단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돌아가라.”

침묵을 드리우며 뱉어진 말은 명백한 축객령.

그제야 고개를 든 홍단의 눈에 보인 것은,

“웃기는군.”

발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릿한 조소.

“자네는 이 내용을 읽어봤나?”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

홍단의 답에 문주는 클클 웃음을 흘렸다.

“이 서찰에는, 하오문은 하오문다워야 한다고 쓰여 있더군.”

하오문은 하오문다워야 한다.

그녀의 주군이 종종 하던 말이었다.

그리고,

“실로 가소로워. 대체, 하오문다운 게 무엇이지?”

그것이 문주의 심기를 잔뜩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밑바닥에서 남들의 신발 밑창 냄새만 맡고 사는 것? 아주 잘난 삶이로구나.”

분노로 점철된 축객령은 무거웠다.

“돌아가라. 그런 삶이 좋다면, 그리 살아가라.”

무력도 폭력도 없었지만, 거두절미하고 어떤 반박의 요소도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선언에 홍단은 입술을 꼭 깨물고 암실 밖으로 나와야 했다.

‘…결국.’

회견은 짧았고, 돌아온 답은 뻔했지만 홍단의 표정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부장님의 예상대로 되었는가.’

그의 주군인 하윤호는 무언가 불길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오문의 미래를 위해, 차마 아니길 바라는 가능성을 예측했고, 그에 따라 자신을 파견했다.

그리고,

‘정확히 맞아떨어지는구나.’

차가우리만치 단호한 축객령과 문주의 반응.

“어쩌면, 문주께서는… 하오문의 본질을 잊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주군은 자신의 예측이 제발 틀렸기를 기도하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본단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거라.”

문주와의 회담을 끝내는 순간, 다른 어떤 것도 생각지 말고 곧바로 지부로 복귀할 것.

하윤호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을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중요성과 그 간단한 작업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나 과한 위험성.

그에 하윤호는 확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후퇴할 것을 당부했지만,

‘죄송합니다, 주군.’

접객실을 빠져나오며, 천천히 흘러내린 흑단과 같은 머리를 위로 묶은 그녀는 준비해 온 면사로 얼굴을 가리며 결심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겠습니다.’

문주와의 접객을 위해 기다리던 며칠 간의 시간.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해 오던 본문의 상황은, 그녀가 피부로 느낄 정도로 미심쩍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하윤호가 당부한 대로 돌아가기보다는 심부에 들어선 지금 더 많은 정보를 캐내기로 결정했다.

‘우선은…….’

홍단의 발걸음은 그림자 진 골목으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뜬 낮인데도, 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

저녁 무렵에도 활기찬 사천과 달리, 이곳 광동은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가득했고, 그중에서도 골목길의 우중충함은 극심했다.

어디로 먼저 갈까, 기감을 예민하게 잔뜩 끌어올린 그때,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방향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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