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31화 (231/350)

231화

* * *

“고비는 넘겼다.”

침상에 누운 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홍단을 보며 툭 하고 뱉었다.

여전히 안색은 엉망진창이지만, 진짜 죽을 뻔한 사람 명계에서 멱살 잡아다 끌어올린 대시술이 끝났다.

- 크르르…….

가장 큰 공로를 세운 탐(貪)이 으르렁거리는 걸 적당히 머리 두드려 제집 찾아 보낸 뒤 다 죽어가는 표정의 하윤호를 바라봤다.

‘복검 치고 약하다더니…….’

애초에 복검이 아니었던 건가.

혼절한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괜히 입 열기가 불편해졌다.

“정양만 잘하면 회복될 거다. 이런 말 하긴 뭐 한데, 진짜 귀한 거 먹인 거야.”

원래 우리 위혼이한테 먹이려던 걸 먹인 거라고?

“이 빚은 두고두고…….”

“…감사합니다요.”

“어, 엉?”

“이 은혜는… 결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요…….”

하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절을 해왔다.

지금껏 무릎 꿇은 적, 허리 굽힌 적, 고개 숙인 적 한두 번이겠냐만…….

“하… 일어나. 뭐 하는 짓이야?”

이번 것의 의미는 모른 척하려야 모를 수가 없기에 강제로 어깨를 잡아다 일으켰다.

그마저도 안 일어나려는 거 억지로 잡아 일으키니, 녀석의 표정이 아주 볼 만한 수준이었다.

“자존심을 다 버려서라도 자존심을 지키는 것. 그게 네 녀석들의 기치 아니냐?”

“…제게, 지킬 자존심이 남아 있겠습니까요?”

“미친놈. 어디서 나라 잃은 표정 짓고 있어? 누가 보면 사람 하나 죽은 줄 알겠네.”

‘가족, 정확히는 딸 아이려나?’

홍단이란 여인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심정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기에 말문이 턱턱 막혔다.

그때,

“…도와주십시오.”

겨우겨우 일으켰던 녀석이 다시금 고개를 푹 숙여왔다.

“뭐?”

“부디, 소인을 도와주십시오.”

“쯧…”

무엇을 도와달란 건지 물어보는 건 하수.

대충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 확실했다.

그래, 다 떠나서―

“내 도움 이전에, 혼자는 안 되는 거 알지?”

이건 이미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규격을 벗어난 일이다.

그래서 단호히 말하지만,

“물론입니다요.”

이미 녀석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

“무림맹을 움직일 것입니다요.”

“허… 너 인마. 미쳤냐?”

“…설마, 아직 제가 제정신으로 보이십니까요?”

이 자식 이거, 이미 눈 돌아갔구만.

설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건데?”

* * *

오늘도 평화로운 정천맹.

사패천의 준동과 녹림과 흑서당이 손잡고 하북팽가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림 명숙이란 이들은 회의장에 모여 갑론을박을 나누었다.

“허, 하북에 원정군을 먼저 보내자는 말이오? 정신 차리시오, 그 먼 곳에 어찌 병력을 보내려 하는 것이오. 설사 가장 먼저 습격을 받았다지만, 그 말은 다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는 뜻. 다른 곳으로 병력을 돌리는 게 어떻소?”

“이 몸도 동의하는 바요. 게다가, 하북에는 도제께서 계시지 않소? 그분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가 함께 함과 다를 바가 없는데 굳이 우리가 나서야 할지…….”

당장 공격받은 하북팽가의 인원들이 있는 앞에서 지껄여 대는 말들이 예술이다.

이야, 이거 개돼지가 사람 말을 하는걸? 놀라운 개돼지들인데 그 고기 맛은 놀라울까 한번 맛보자꾸나! 하며 칼을 뽑아 드는 팽가의 인원들을 말리는 인원이 있었고,

“흠, 이 몸의 그간 경험으로 볼 때는 다음 습격이 일어날 장소는 무한이지 않을까 싶소. 과거 무림맹이 있던 곳은 정파의 정기가 있는 곳이니 그곳을 침공하지 않겠소?”

자칭 경험과 연륜이 실하게 찬 예언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개소리 집어치우시오! 그냥 당신네 문파가 그곳에 있어서 그런 것 아니오!”

“개, 개소리? 말이 심하군! 그러는 당신은 어제 회의에선 당신네 문파가 있는 섬서를 사파 무뢰배들이 습격할 거라 하지 않았소!!”

대부분이 자기네 집 지키기 혈안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이 작자들이 어디 한 지역에 정상적으로 병력을 파병시키기는 할까부터가 의문이었다.

‘더러운 정파 위선자 놈들.’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하윤호는 그들을 보며 차갑게 조소를 지었다.

그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걷어차 주면 그만이니까.

직후,

“급보! 급보입니다!”

하북팽가가 공격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천맹 회의장에 또 다른 급보가 도착했다.

“녹림의 산적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중원 전역의 관아를 급습하고 있답니다!”

“뭐라? 그게 진실인가?”

“관아를 건드렸다고?”

이놈들, 진짜 미쳐버린 건가?

얼굴에 복면을 찬 정체불명의 무리가 관아를 들쑤시고 있다.

습격을 받은 관아들이 하필이면 장강 근처에 있는 지역의 것들이란 놀라우리만치 신기한 우연이 벌어졌지만, 그들에게 그 기이함을 조사할 여유는 없었다.

“…큰일이오. 사천성주께서 서둘러 토벌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고 계시오.”

공격받은 관아에서 화들짝 놀라 사천성주에게 민원을 넣었단다.

당장 공격받은 관아뿐만 아니라 아직 공격받지 않은 관아도 벌벌 떨며 사천성주에게 민원을 넣었다는데, 아무래도 관리들의 입장에선 정천맹을 설비할 정도로 활동적인 사천맹주야말로 자신들을 도울 가장 유력한 구원자로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사천성주는 좋다고 그 제안들을 받아들였고.

‘왜 안 좋겠어.’

정천맹이니 정파 무림이니 해봐야 사천성주 입장에선 자신의 영토 위에 세내고 들어온 세입자요, 어떻게 써먹어도 남는 장사인 잉여 병력일 수밖에 없다.

그냥 가만둬도 알아서 꼬박꼬박 월세 내고 경기 발전에 힘을 써주지만, 이렇게 다른 관리들을 구원해 주는 모양새로 부려 먹는다면, 자신의 권위를 다시금 확인받는 기강 다지기도 되고, 다른 지역의 관리들에게 지지를 얻는 정치적 묘수도 된다.

어느 쪽이건 철저한 갑의 입장인 사천성주가 찰싹찰싹 정천맹 중진들을 채찍질하자 그들은 온몸을 비틀면서도 대책을 수립해야 했다.

“…자서당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번에 광동에서 대규모 습격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오.”

“아니, 왜 갑자기 광동이오?”

“난들 알겠소? 그 인근에서 대규모 산적들의 준동이 관측되었다는데.”

가뜩이나 울고 싶은데 뺨을 갈겨주는 조서당의 보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올라온 보고인 이상 당연히 사천성주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

“뭣들 하나? 당장 움직이지 않고.”

대황상 이문학이 정천맹에 직접 나타나 어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천성 성루에 올라 자신의 신물인 거창(巨槍)을 들고 성민들에게 쩌렁쩌렁 선포하기까지 했다.

“걱정 말거라, 나의 성민들이여! 그대들의 평화와 안녕은 이 이문학이 수호할 터이니!”

어쩐지 누가 써준 것만 같은 각본을 읽는 듯한 대사가 울려 퍼지자 그대로 사천성은 폭발했다.

“와아아! 성주님! 성주님!”

“이문학! 이문학! 이문학!”

연일 사천성주를 연호하는 성민들 덕에 사천성주의 주가는 연일 상한가를 갱신.

가뜩이나 근래 들어 사천의 경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사파 무뢰배들은 힘도 못 쓰게 됐을뿐더러, 성주가 산적 토벌을 직접 천명하기까지 하니 그의 권위는 하늘을 뚫을 기세로 승천했다.

“…외통수로군.”

“젠장, 어떻게 못 빠지나?”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정천맹들은 자신의 연륜과 경험을 총동원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손실을 볼 것인가를 계산하는 데 죽어라 두뇌를 가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도망칠 구멍을 궁리하는 그들에게 발신인 불명의 편지들이 속속들이 도착했으니―

“이, 이게 뭐야?”

“지난달 정오 날, 자시 금명루 최상층에서 받은 금궤의 명부?”

“이런 미친… 내가 지난날 춘향이랑 같이 있었던 걸 대체 어떻게?”

“이건 모함이야!! 내가 한서문이랑 연관이 있다니!!”

네놈을 어떻게 하겠다거나, 이걸 풀어버리겠다는 등의 쓸데없는 사족 따위는 붙어 있지도 않았다.

적혀 있는 것은 날짜와 시간, 그리고 오갔던 금품들의 액수.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음을 보자, 경험 많은 그들은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닥치고 있으란 거다.’

정치적으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까지 열심히 떠들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라고.

그 사실에 누가 누가 자기들의 지역이 위험하다 떠들던 정천맹의 중진들은 한날한시에 합죽이가 되었다.

각자 갑론을박하던 의견들이 전부 쏙 들어가 버리자, 남은 건 광동을 향한 토벌군 파벌에 대한 안건뿐이었다.

그렇게 참전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당가의 흉귀(凶鬼)에게 실로 좋은 것을 배웠군.”

하윤호.

고작 일개 하오문 지부장에 불과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전 무림의 명숙들을 입 다물게 만들고, 그들 모두를 싸잡아 기어코 광동으로 처넣어버린 이가 덤덤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없으면 만들면 되고, 있는 건 덮으면 될 뿐이겠지.”

죽은 추풍대주가 살아나고, 평생을 북방에서 노닐던 마적 놈의 전설이 뜬금없이 대륙의 남방에서 다시금 시작돼도 자기가 그렇다면 남들이 뭐라 할 수 있을까?

“이제 그들은 싫든 좋든 광동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가지 않겠다고 뻗대는 이들은, 내가 기필코 그곳으로 처넣어 줄 것이니까.”

무림의 정기를 세우고, 중원의 평화와 안녕을 지킨다.

그것이 정파의 의무가 아니던가?

“평소 그들이 입 아프게 떠들어대던 것을 내 직접 실천시켜줄 뿐이니 그들 역시 내게 감사해야 하겠지.”

단 한 놈도 빠짐없이 밀어 넣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던 정파의 의무.

그들이 말하던 정파의 책무.

그들이 말하던 정파의 가치.

“그것들을 이유로, 우리들을 비웃으며 자신들은 숭고하다고 떠들었다면… 이제 그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윤호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아이가 이리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지를 전전한 것이… 자신의 목숨이 다하더라도 자신에게 이 서신을 넘기려 한 것이…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혈서를 쓴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져,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피로 물든 서찰.

얼마나 꼭 품에 안았는지, 이리저리 꾸겨지고, 얼마나 극악의 상황에서 썼는지, 글씨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얼마나 중간에 혼절을 반복했는지, 썼다 멈추기를 상징하는 힘준 자국이 반복되고, 그럼에도 얼마나 자신에게 전달하고 싶었는지, 기절하는 그 순간까지 손에서 차마 놓지 못했던.

그 서찰을 품에 욱여넣은 하윤호는 아직까지도 혼절한 채 깨어나지 못하는 홍단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반드시 저 거짓된 평화를 누리는 이들에게, 진실한 혈채(血債)를 토하게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부디.

“일어나거라, 나의 딸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무릎을 꿇은.

하윤호의 어깨가, 소리 없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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