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낸다면, 결코 놓치지 않는 집념의 수색 끝에 하오문주 가을량을 찾아낸 정천맹.
어린 나이에 사신단의 단주라는 중책을 맡은 후기지수들의 눈부신 활약 끝에 가을량을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쥐구멍에 밀어붙이는 데 성공한 그들이지만 가을량의 발악은 만만치 않았고, 도피처로 삼은 협곡의 입구에 짙게 낀 안개와 그 안에서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실혼인(失魂人)들이 정천맹의 정예 무인들을 막아서는데…….
적의 숨겨진 모략을 낱낱이 파헤치고, 정파의 의기를 되살리기 위해 정천맹의 중진들은 서로의 심모원려를 교환하며 번뜩이는 귀계를 세우고 있었다.
“…라고, 일단은 그렇게들 주장하고 있다구나.”
“…예?”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한편의 서사극이라도 감상한 듯 당불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입구에서 저항이 강하니까, 아직까지 못 뚫고 미적거리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조심하거라. 요즘 세상은 벌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말하더구나.”
“아니, 뭐 그런…….”
날조와 선동이 정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사회.
나타협의의 시대를 거친 세상이 그런 건지, 혹은 원래 세상이 그런 건지.
아무튼 정천맹은 고작 반 시진 전 먼저 도피처인 협곡으로 들어간 가을량을 쫓지 못하고 입구에서 누가 먼저 들어갈지에 대한 갑론을박을 반복 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당불퇴는 오만가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눌러 참으며 되물었다.
“…실혼인은 또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다. 눈빛이 흐릿하고, 걸음걸이가 올곧지 못한 것이 겉보기에는 이지를 제압당한 이들 같은데, 놀라운 무위를 선보이며 정천맹의 추적대를 막아내고 있다더구나. 입구가 좁고 진법이 설치되어 추적대가 쉽게 못 들어가는 동안 이미 이름난 고수들을 몇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니 결코 평범한 이들은 아니겠지.”
“그게 말이 된답니까?”
“나라고 알겠느냐?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왜 자신한테 화내냐고.
문안품으로 가져온 과일을 대신 깎아 내미는 형님의 모습에 당불퇴는 깎아 놓은 단감을 입 안에 우물우물거리며 답답함을 진정시켰다.
‘누군 못 도망치게 막겠답시고 배에 칼침도 맞았는데…….’
기절한 지도 반나절이 넘었다는데 어찌 아직도 유의미한 결과가 없는지.
“…잠깐, 그러고 보니 형님은 왜 여기 계십니까?”
“왜 여기 있냐니? 너를 간병하고 있잖느냐.”
“가서 싸워야죠. 공적 안 세우시게요? 설마 녀석들이 기절한 저한테 암살자라도 보낼까 봐 걱정돼서 여기 계신답니까?”
“아아.”
이럴 때야말로 공적치를 쌓을 기회.
이미 첫 시작을 자신이 끊었으니 적장의 수급을 베는 대박 공적치 획득 기회를 내다 버리는 건 아니겠지 싶어 묻자,
“별것 아니다.”
당지명은 무언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쫓겨났다.”
“…예?”
뭐지, 환술인가?
진지하게 아직 자신은 깨어나지 않았고, 꿈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초현실적인 대답에 당지명은 다시금 배달되는 단감 조각을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우물우물, 왜요?”
“입 안에 든 것은 다 먹고 말하거라.”
“꿀꺽! …아니, 진짜 왜요? 어떻게 하면 쫓겨나는 겁니까? 뭐 사고라도 쳤습니까?”
“내가 너인 줄 아냐?”
그런 건 너나 대형이나 치는 거지.
언제까지나 당가 최후의 이성이자 상식인의 역할과 지위를 공고히 한다 자신하는 당지명은 자신도 입에 단감 조각 하나를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어먹은 뒤 말했다.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적인 문제?”
“말마따나 네가 큰 공적을 세웠지 않느냐. 이미 당가에서 하오문주의 종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혹시라도 그의 수급을 베는 공로까지 당가에서 가져간다면 차후 본가의 발언권이 얼마나 강해질지를 경계하는 듯하더구나.”
협곡 안으로 진격하자면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았다느니,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았다느니, 정찰을 먼저 보내보자는 등등의 온갖 핑계를 대며 진격을 말리는 것은 약과일뿐더러,
“함께 진격하는 게 꺼려지면 내가 애들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그마저도 안 된다고 하더구나. 무슨 정파의 정기를 수호해야 할 정천맹의 병력을 함부로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둥.”
사람의 목과 입으로 온갖 짐승의 소리를 떠들어대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지명은 빙긋 웃었다.
“내가 잡룡단 아이들만 데려가면 또 허용해 주겠다고, 은근히 자신들이 큰 양보라도 해주는 듯 생색내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걸작이더구나.”
“그거 그냥 나가 뒈지라는 거 아니요?”
말해 무엇할까.
얌전히 과일이나 깎는 당지명을 보며 당불퇴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차올랐다.
그런데,
‘응? 잠깐만.’
지금까지 그들의 답답한 행태는 실컷 들었다.
다만,
‘그래서, 그게 왜 쫓겨난 게 되는 거지?’
자신이 아는 당지명의 성격이라면 그런다고 해서 돌아올 인물은 아니다. 평소 악귀 같은 대형의 성격을 감당할 만큼 천성이 유순하지만, 그 밑에서 말 안 듣는 자신들을 감당할 만큼의 강단이 있기에 당주 형님 자리를 공고히 하는 인물이다.
‘가주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와 양식이 행동 기반이 자리 잡아 그렇지, 한 성깔 하는 사람이잖아?’
…혹시?
“형님.”
“왜 그러느냐.”
“그래서 어찌하셨습니까?”
움찔!
“…뭐, 뭘 말이냐?”
한 번에 수백 개의 은사와 그 끝에 매달린 수백 개의 비도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양반이 손 위에 과도를 떨어트릴 뻔했다.
“쫓겨났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양반들이 그런다고 형님이 얌전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신데…….”
평소 당지명이 자신에게는 재능이 없다고 한탄하는 걸 안다.
동생들보다 못한 자신에게 당주의 자격이 있는가 청승맞은 소리나 하며 궁상을 떠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감히 누구에도 그 아성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말마따나 재능 따윈 없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인 근성 단 하나!
“솔직히, 고집 센 걸로 따지면 저보다 더한 형님이잖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어, 어떻게라니! 나는 그저 당주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예… 그러시겠죠. 그래서 어찌했냐구요. 거기 뭐 노인네들 마빡에 천골저라도 꽂아 넣고 오셨답니까?”
“하!! 내가 대형인 줄 아느냐?!”
“…뭔가 했다는 걸 부정은 안 하시네.”
차마 그건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걱정이 피어올랐다.
당지명 역시 소리친 직후 자신의 실책을 눈치챘는지 다시 한번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단지… 뿐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작은지 절정 경지인 당불퇴의 귀에도 잘 안 들렸으니―
“예? 뭐라구요?”
“…단지, 그 나불대는 주둥아리가 보기 싫었을 뿐이다…….”
결국 추궁하니 이실직고하는 모습에 당지명은 정신이 대략 아득해졌다.
“그래서 노인네 턱주가리를 돌렸다는 겁니까?”
“크흠…….”
“아이고, 이 사람아…….”
가끔 보면 이 양반이 더 막 나가는 것 같다니까?
‘단주 자격으로 회의에 나가 상대편 정천맹 중진의 턱주가리를 돌린 이 형님을 대체 어찌해야 할꼬…….’
역시 이 가문은 틀린 게 아닐까?
윗물부터 수려하기 그지없어 아랫물까지 예술적으로 흘러가는 훌륭한 미풍양속!
한동안 방 안에는 과일 깎는 사각사각 소리와 우물우물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해서, 대형은 어디 가셨답니까?”
형님부터 그리 화려하게 저질렀다면, 그 위쪽은 진짜 상대편 정수리에 천골저를 꽂아 넣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손맛이 더 좋다며 직접 두 주먹으로 후들겨 팼을지도?
“모른다.”
불안감이 물씬물씬 풍겨 오르는 가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지명은 그 우려를 일축시켰다.
“애초에 형님은 거기 안 가셨으니까.”
“설마, 회의 참석하기 귀찮다고 안 가셨다는 겁니까?”
“그것도 맞긴 할 거다. 다만, 대형께선 이미 이렇게 흘러갈지 다 예상하신 듯하더구나.”
“내가 거길 왜 가? 그런데 가봐야 쓸데없이 시간 낭비밖에 안 할 텐데.”
이미 정파 놈들 갑론을박에 신물이 날 대로 나버린 당유혼이야 뻔히 예상한 노릇이지만, 그걸 아직 모르는 그의 동생들은 이번 기회에 정파의 매운맛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이제 됐다. 알아서 빠지고,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라.”
가을량이 도망쳤다는 말에 그들의 대형은 그를 더 이상 쫓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이후였다.
그때야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대형은 이미 여기까지 본 게 분명했다.
“그럼, 저희 뭐 합니까?”
“딱히 할 게 있겠느냐.”
대형은 빠지라고 하고, 저기서도 빠지라니까 얌전히 빠져 줄 수밖에.
“…저희 가문, 혹시 왕따였습니까?”
“몰랐느냐?”
뭘 새삼스럽게.
결국 그들은 과일이나 축 내기로 결정했다.
* * *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뚝뚝 떨어졌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대춧빛처럼 붉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가을량은 소리치고 있었다.
“젠장!! 젠장!! 대체 왜! 어째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계획은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 분명… 분명 내 계획에 차질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멸망한 세력의 잔재, 스스로를 신교(神敎)에서 왔다고 말한 이들은 그에게 거래를 제안해 왔다.
그들은 필요한 인원과 물자, 장소를 제공해 준다면 그에 합당한 힘과 보상을 약속했고, 그것들은 가을량이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항시 남들의 발밑에 눌려 살며 구차한 목숨은 연명해 왔던 하오문을 무늬만 구패가 아닌 진정한 아홉 하늘 중 하나로 만들어줄 만한 것이었다.
‘그 과정이 비인외도(非人外道)라 불릴 만한 것일지언즉, 나는 후회가 없었다.’
애초에, 세상이 먼저 자신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는데, 자신이라고 세상을 사람으로서 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와중에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여기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왔다.
다행히 그에게는 나름의 수완이 있어 점점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면서도 빈틈없는 정보 통제로 다른 이들에게서 자신들의 변화를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단 말인가?’
어릴 적 자신의 경쟁자라 여겼으며, 하오문의 희망이라 여겼던 하윤호.
그가 보낸 사절이 자신에게 서신을 전할 때만 해도 하윤호는 무언가를 뚜렷이 아는 것은 아닌 듯한 눈치였다.
당장, 지금도 자신이 준비한 병력을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하는 정천맹 무인들의 모습이 그 방증이었으니까.
“…그만, 그만. 잡생각은 그만.”
머리가 복잡해졌기에 억지로 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지웠다.
때때로 세상은 복잡한 인과로 얽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성의 없을 정도로 우연의 일치하에 일이 진행되기도 하니까.
이 모든 게 그저 운이 없었다고 치부한다면, 어차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버틴다. 칠십이변백무진(七十二變白霧陳)은 비록 살상력은 떨어져도 생문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깨부술 수 없는 진법이니까.”
입구에 설치된 진법이 정천맹 무인들의 눈을 가릴 것이고,
“그리고… 그동안 만든 병력은 그 진법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운신의 제한이 훨씬 여유롭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이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교도 놈들. 저들이 제아무리 양지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 나를 쉽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세력을 다 회복하지 못해 음지에 머무는 이들인 만큼, 유일하다시피 양지와 교섭할 수 있는 큰 통로인 자신을 쉽게 손절매하지는 못해 구원군을 보내오겠지.
‘한낱 광신도 놈들이라도, 그 힘은 진짜니까.’
자신의 협조를 받아 완성한 병력.
그 대군이라면 저 포위망을 뚫고 활로를 열어주는 것만은 가능할 것이라고.
가을량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