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진법과 주술의 구성축으로 작용하던 각종 조형물이 파손되어 있다.
그 위로는 찢겨진 사람의 육편과 흩뿌려진 핏물로 범벅되어 있다.
두 번 말해 무엇할까.
시산혈해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는 이 공간에서, 조취산은 목구멍을 역류해 오는 울혈을 내뱉었다.
“퉤.”
검게 죽은 탁액이 토해지고, 그 안에 섞인 극독의 잔향에 입가를 소매로 닦았다.
“지독한 것들. 누가 광신도 무리 아니랄까 봐.”
그의 손에 들린 채 곤죽이 되어버린 것은 한때 마교도라 불리던 것.
이 협곡 내에 있는 이들 중에서도 제법 계급이 있는 놈이었던 것 같은데, 과연 독하기는 얼마나 독한지 암만 족쳐봐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원하던 대답이 아닌 끔찍한 저주뿐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투왕.”
그런 그의 뒤편에서 다가온 흑상이 마른 수건을 건네 왔다.
그걸로 대충 얼굴을 적신 핏물을 닦아낸 조취산은 대충 바닥에 던지며 물었다.
“고생했지. 정말, 끝에 끝까지 덤벼들더군.”
보통 하나의 집단이란 그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죽는 순간 와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제’라는 자가 죽은 이후에도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이후 더욱 광폭하게 덤벼들었지.’
죽음은 당연한 사실이고, 그걸 이용해 어떻게 하면 한칼이라도 더 먹일 수 있을까 궁리라도 한 듯 달려드는 마교도들.
적이지만 박수를 칠 수준을 넘어 천하의 자신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광기를 보였던 그들의 사체를 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야차전의 야차들은 이들을 보면 진작에 명성을 반납해야 했을 거야.”
수틀리니 다 도망쳐버리던 그놈들보다는 이들이 훨씬 야차라는 이름에 어울린다며 혀를 끌끌 차는 조취산을 보며 흑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마교의 준동이 실재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요.”
“마교라…….”
실로 어릴 적 구전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이다.
말 안 듣는 아이는 마교도들이 잡아간다는 수준이나 다름없는 구닥다리의 옛날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이름이지만, 실존하는 마교도를 만나니 생각이 싹 달라졌다.
“투왕. 아무래도 정천맹 역시 마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흠, 그게 무슨 말인가?”
“그들이 어째서 강남땅까지 왔는지, 저희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하오문의 본단이 있는 광동을 들쑤셔 댔는지. 마교라는 이유 하나면 모든 게 설명이 됩니다.”
“…하오문이 마교와 결탁했다?”
“그렇습니다.”
“하…….”
미쳐 돌아가는군.
만가장패의 시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만 손잡을 게 없어 이런 미친놈들과 손을 잡다니.
“저희가 이곳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사람을 시켜 외부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했습니다. 현재 정천맹에선 하오문주의 은신처를 발견해 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마교도 놈들 증거라도 잡았다던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오문주는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어느 협곡에서 철저한 농성을 준비하고 있다 합니다.”
“농성이라고? 왜… 아, 그렇군.”
의혹스런 표정을 짓던 조취산은 곧 그 이유를 깨닫고 실소했다.
“미친놈들. 마교도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이었구나.”
기다릴 게 없어 마교도의 지원이나 기다리다니.
“한데 이걸 어찌할 텐가, 하오문주. 그대가 기다리는 이들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임이 되어버렸거늘.”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손에 직접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흑상이 가볍게 첨언했다.
“별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업을 대신하여 저희가 찾아가 주면 될 일이지요.”
“응? 무슨 소리인가. 설마 하오문을 돕자는 뜻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자는 뜻이지요.”
“이용… 아하, 그렇군!”
하오문주 역시 결사항전을 진행 중이다.
정천맹에서도 마교의 존재를 안다면 그들의 지원을 받기 전 속전속결을 택할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둘이 충돌하는 시점에 후방을 급습한다면 사패천은 힘 안 들이고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는 셈이다.
‘운이 좋았군.’
흑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끼어들게 될 때만 해도 타인의 의지에 의해 대국의 말로써 놀아나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전력이 이 대국을 꾸민 이들의 예상을 상회했는 지 훨씬 빠르게 마교도 잔당을 정리해버렸다.
그전까진 대국의 상대가 안갯속의 인물처럼 잘 보이지 않아 여러 우려가 들었으나, 이젠 청명한 날의 하늘처럼 명쾌하기 그지없다.
“전력을 수습하고 정천맹의 배후를 급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당장이라… 뭐, 나는 상관없는데. 흑시문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흘흘, 나란들 별다를 게 있겠소.”
세 명의 의견이 일치하며 사패천은 그대로 병력을 정비하여 불귀곡을 벗어났다.
그들의 목표는 한창 전쟁을 진행 중일 정천맹의 배후!
이번 기습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리라, 그리 생각하고 더욱 빠르게 보법을 발휘하는 그들이었는데,
“어이.”
그들이 산채를 설치한 산맥을 벗어나기 직전,
“이제 왔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당신은…….”
내공을 담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장강(長江).
두 글자가 적힌 깃발을 펄럭이는 일단의 무리가 계곡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하오문주를 찾아냈다는 소식은 곧장 전해졌다.
병신 같이 다잡은 걸 놓쳤다는 얘기가 함께 들려왔을 때는 실시간으로 혈압이 치솟았지만,
‘차라리 잘 됐어.’
녀석을 잡는 건 아직 이르다 여겼기에 애써 심신을 진정시켰다.
‘한 번 녀석을 놓쳤다면, 다시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정파 놈들 탁상공론은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다. 차라리 처음 발견했을 때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면 모를까, 한 번 놓친 이상 다른 파벌에서 공적을 쌓는 걸 방해하기 위해 각종 중상모략이 난무할 것은 뻔한 일.
못해도 하루 이틀의 시간은 걸리겠거니 생각하며,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만났다.
“오랜만이군, 소협.”
“예.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어째 그때보다 더 커진 듯한 등빨을 자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백경.
과거 음지에서 장강수로채라는 불법 수적 단체를 운영하였으나, 이제는 손 씻고 양지로 올라와 어엿한 상단주가 된 남자다.
“다시 보니 실로 기분이 좋군. 마음 같으면 술상을 펴고 하루 종일 대작을 하고 싶으나… 그럴 시간은 없겠지?”
“아슬아슬하죠. 그래서, 말한 건 다 준비됐겠죠?”
“흐흐, 그야 당연하지. 이봐 육언, 준비된 걸 보여주자고.”
“여기 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육언이 고갯짓하자 뒤쪽의 수적, 아니, 표사들이 일제히 ‘그것’에 덧씌워져 있던 포대를 벗겨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이 늠름한 자태를 자랑했다.
“훌륭하구만. 군사 나리, 이거 관리 잘된 거 맞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름칠까지 확실하게 해놓았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손님맞이 준비를 해보자고.”
잠깐 현직을 내려두고 과거로 돌아갈 시간이다.
장강수로상단을 내려놓기로 한 그들은 장강수로채의 감성으로 돌아가 준비해 온 것들을 차려놓고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는구만.’
산속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정체는 사패천.
두 마리 이리를 산맥 속에 밀어 넣었더니, 그중 살아나온 한 마리였다.
“어이.”
그들을 향해 소리쳐 부르자,
“이제 왔냐.”
“당신은…….”
어째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인다.
냉막하고 또 차가운 인상.
‘하, 저놈이었냐?’
여기서 볼 줄 몰랐던, 그러면서도 머릿속에 어쩌면― 하며 일말의 가능성이 떠오르던 얼굴에,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비죽― 입가를 뒤틀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고객님.”
“고객은 개뿔. 요즘은 고객 등쳐먹는 게 너희들이 말하는 상도(商道)냐?”
“등쳐먹는다라… 말씀을 꽤 섭섭하게 하시는군요.”
섭섭?
“이 새끼. 암만 흑상이 되면 제일 먼저 팔아먹는 게 양심이라지만, 날 이용해서 그 자리를 꿰찬 주제 섭섭하기까지 하다고?”
“역시. 이미 거기까지 꿰뚫어보셨군요.”
이제는 알겠다. 저 녀석이 어째서 그동안 내게 친절히 정보를 제공해 왔을까.
정파라고 불리는 놈들 내부에 쌓여있던 각종 비리의 온상을 그렇게도 해박하게 알고 있었을까?
당장 사천에 살고 있던 하윤호도 잘 알지 못하던 것을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것마냥 알려줄 수 있었을까?
‘답은, 너무 간단한 거잖아.’
이미 해답은 나와 있었다.
‘정말,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녀석은 애초부터 사패천을 구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들어졌냐, 아직 안 만들어졌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제 어디라도 상관없이 조건 하나만 갖추어진다면 지금의 사패천은 뚝딱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포탄이었던 거지. 녀석이 준비한, 발사 직전의 대포에 넣을 딱 적당한.’
정파를 결집시킬 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결집될 정파는 협과 의로 창설된 게 아닌 약점과 협잡질로 구성되어야 했던 것이고.
‘사패천이 세워지기 위해선, 저들 엄마 말도 안 들을 사파 놈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만큼 위협이 필요했겠지. 하지만 그 위협은 너무나 거대해선 안 됐기에 모래성처럼 부실해야 했고.’
협과 의로 구성된 정천맹이었다면 감히 건드리기 힘들 테지만, 지금의 정천맹은 부실 공사의 대표 상징과도 같은 것.
구성 자체가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대국 위에서 세워졌기에, 하나의 행동 지침을 내리기 위해서도 내부에선 온갖 삐걱거리는 잡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부가 부실한 거인이었다.
“너지?”
“무엇을 말입니까?”
“단순히 자리를 꿰찬 수준이 아니지. 사패천, 그 같잖은 단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네놈 덕분인 거야.”
의문 따위 필요 없는 확신.
어떤 개잡놈이 이따위 개판을 알뜰살뜰 꾸려놨나 싶었더니 네놈이렷다.
“후후, 저를 높게 봐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감히 저따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보다는 다른 사파의 거두들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지요.”
빙긋 지어진 미소가 저 사갈 같은 주둥아리에서 흘러나온 간언과 정반대의 진실을 고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등에 거대한 대부를 대단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어린 친구가 말이 험하군.”
탁―
한 걸음, 그리고 한마디.
고작해야 그것뿐인데 장내에 흐르는 기류가 돌변했다.
‘저놈은……?’
강하다.
여태껏 본 무인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기세가 느껴졌다.
그 말은 즉,
‘저놈이, 투왕이구나.’
녹림투왕 조취산.
하윤호에게 들었던 이 시대의 절대자들 중 하나.
“이 자리에 어린 친구의 선배들이 여럿 있는데, 암만 우리가 가는 길이 달라도 예의를 갖추는 게 어떤가?”
그가 내기를 담아 말하자 산중에 흐르는 기류가 무거워졌다.
그에,
“뭐라는 거야, 대가리 큰 새끼가.”
“…뭐?”
“저기 잡상인 놈이 말했잖아. 거두(巨頭)라고. 그거 대가리 크다는 거 아냐? 딱 봐도 많이 처먹게 생겼는데, 이거나 먹어.”
주섬주섬―
품에서 꺼낸 소중한 엿을 냅다 던졌다.
투둑…….
“…허. 허허, 허…….”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엿이 땅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지자, 애써 좋은 표정 짓던 녀석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게 옳게 된 표정이지.
가뜩이나 험상궂게 생긴 놈이.
“그리고 선배는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나는 사람 아닌 새끼들을 선배로 모신 적이 없어요.”
“뭐……?”
“산중에 숨어 살며 고기나 뜯고 사람이나 털어먹는 금수 같은 것들이 사람일 리가 있겠냐?”
“…하, 신선하군. 신선해.”
적당히 입을 털어주니 녀석의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했는지 오히려 다시 차분해졌다.
“내가 육류냐? 신선하긴 뭘 신선해.”
“자네, 대체 뭘 믿고 그리 주둥아리를 나불거릴 수 있는 거지? 고작해야 뒤쪽에 있는 그 한 줌의 병력을 믿는 건가?”
뒤편에 선 장강수로채. 그 수가 적지는 않지만, 확실히 동등 그 이상의 사파의 대문파 셋을 합친 저 병력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아니, 내가 믿는 건 따로 있지.”
짝짝―
두어 번 손뼉을 치니, 그 신호에 맞춰 전직 수적, 현직 표사들이 ‘그것’의 위에 덮어져 있던 천막을 걷어냈다.
“저건…….”
“자, 잠깐… 저게 왜 여기에?”
‘그것’을 발견한 적들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고―
“인사해.”
반대로 빵끗 웃음꽃이 핀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 인사 담당이야.”
대포라고.
아주 인사성 밝은 친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