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51화 (251/350)

251화

【 가을량 】

* * *

대치가 길어지고 있다.

하오문주 가을량이 몸을 숨겼다는 계곡.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벌써 그 입구에서 서성인 것이 며칠째인지.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변명할 거리는 있으니, 도저히 자연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짙은 안개가 첫 번째요, 그 안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실혼인들이 두 번째 이유였다.

실혼인(失魂人).

말 그대로 혼이 없는 이들처럼, 가만히 있을 때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괴뢰인형마냥 축 늘어진 자세로 서 있는 것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의 움직임은 급변해 버리니―

“저건, 낙백검(落魄劍)?! 그것도 대성의 경지일세!!”

“거, 검강? 어찌 실혼인이 경감을……!”

“피해라!! 이건 수십 년 전 악명을 떨쳤던 살혼귀(殺魂鬼)의 백화독이다!!”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무공을 펼치면서도, 그 경지는 최소한이 절정에 달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정천맹은 하오문주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 놓고는 벌써 며칠째 정체 상태였다.

“함부로 진입했다가는 큰 피해를 볼지 모르오.”

“그렇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오!”

물론, 그 내면에는 저항이 거세다는 명분뿐만 아니라,

“백호단이 나서란 말이오? 허… 백호단은 이런 작전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이럴 땐 청룡단이 나서주는 게 어떻소?”

“이런 작전은 가장 돌파력이 강한 주작단이 나서주는 게 옳다 생각하오만?”

“아니, 지금 우리를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거요? 나 못해! 아니, 나 안 해!”

각종 정치적인 이유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진법과 실혼인 때문이든, 혹은 그 외의 상황 때문이든 하오문주 체포 작전은 혼돈에 휩싸여 갔으니―

그 상황을 유도해낸 가을량은 음험한 흉소를 흘리고 있었다.

“크크크, 정파 위선자 놈들. 항상 입으로는 협의니 인의니 떠들어대면서, 정작 중요한 시국에 달하면 몸을 사리고 정치질을 하는 꼴은 여전하구나.”

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들의 협객 놀이는 질릴 정도로 보았고, 그들이 하나만이 차지할 수 있는 공적을 다른 이들과 함께 앞에 두면 어찌 행동할 지도 뻔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정파라는 존재를 혐오해 마지않는 이유였으니까.

“이제 곧 끝이다. 이 실험만 완료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수도 있다!”

비록 이 자리에선 패퇴해야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패퇴가 아닐지니.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쯤이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그때였다.

“그렇습니까요?”

그의 귓가에,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요.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습니다요.”

“…”!”

그 목소리에 가을량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차마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윤호.”

“이리 뵙습니다요, 문주님.”

지친 기색이었다.

피로로 가득한 기색이었다.

“아니.”

복장은 엉망진창이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며,

혈색은 푸르죽죽하니,

막말로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음이나―

“을량 형님.”

그 눈빛은 분명,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아…….”

그 모습에 가을량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차마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사실은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더구나.”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하윤호의 곁에 서 있는 자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아이가 네 복검이더냐?”

“그렇습니다요.”

“좋구나. 좋은 검을 골랐어.”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자영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감정을 상실하기라도 한 듯 무표정했다.

그 모습이 마치 저 계곡의 안갯속을 서성이는 실혼인과도 같아서, 스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인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는다. 그래, 복검으로 가장 적합한 자세이지.”

하지만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가을량은 곧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러나 말이다. 결국 사람이든 물건이든 영원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나를 보아라, 기껏 구해 놓았던 복검은 지금 곁에 없지 않느냐.”

결국 그런 것이라고.

세상살이 요지경이라, 자조적이기도 하며 씁쓸하기도 하며 또한 경멸로 가득 담긴 조소를 지은 그가 돌연 안광을 발했다.

“너라면 알아줄 거라 믿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네 녀석이라면 다를 줄 알았다고.

끌어 오르는 감정을 토해 내는 가을량의 모습에, 하윤호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상대를 마주했다.

“그 아이가 다쳤습니다.”

“…뭐?”

“그 아이가 병상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놈!”

가을량의 인상이 왈칵 찌푸려졌다.

“지금 그게 중요하더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 못 하겠느냐?!”

쾅쾅쾅!

속이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몇 번이나 두들기기까지 한 그가 소리쳤다.

“대의(大義)다! 대의! 저 정파의 위선자들이 입으로만 말하는 대의가 아니라, 진실로 이 빌어먹을 세상을 바꾸기 위한 대의! 너라면, 적어도 너라면 내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지 않느냐!!”

하윤호가 자신을 몰래 감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몰래몰래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전부를 알려줄 수는 없지만, 영특한 녀석이라면 그 부스러기에 가까운 정보만으로도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는 지 추측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대의라.”

정작 그 말을 들은 하윤호는, 더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씁쓸히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을량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요.”

“뭐라? 나 따위가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다만,

“형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요.”

씁쓸함보다 더욱 시린 슬픔으로 하윤호는 말했다.

“그 대의라는 것에, 가장 많은 것을 짓밟혔던 것이… 저희 아니었습니까요.”

“윤호…….”

“‘대장군부’. 그날 밤의 일을 잊으셨습니까요.”

“네 녀석…….”

고작해야 한 단어뿐이었지만, 그 한 단어가 수십 마디의 다른 말들을 대체했다.

“그래… 그때부터 우린 그른 운명이었구나.”

그것이 결코 주워담을 수 없는 답이라는 것을 인지한 가을량은 눈빛을 굳혔다.

사신단의 단주들이 협공을 가할 때도 보이지 않았던 딱딱히 굳은 눈빛으로 하윤호를 응시한 그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철컹―

벽면에 걸려 있던 안모도(雁毛刀)가 날아와 그의 손에 잡히고, 가을량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선언했다.

“널… 죽이겠다. 그로써… 진정으로 과거를 지운 뒤! 새롭게 시작하겠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뱉듯 토해 내며 살기를 불러일으키자, 그제야 하윤호의 뒤편에 있던 자영이 두 눈에 이채를 띄며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십시오, 대인.”

“넷이 몰려와도 나를 어쩌지 못한 것이, 홀로 나를 상대하려 하느냐?”

“…….”

대답은 없었다.

할 수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에 하는 일.

쓰임을 다 하기 위해 존재하기에 도구이듯, 자영은 복검으로서 소임을 다 하기 위해 천천히 쌍검을 풀어헤쳤다.

하지만,

“물러서거라.”

그런 자영을 뒤로 밀어내며, 하윤호는 스스로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 일이다.”

“대, 대인?”

처음으로 자영의 눈에 당혹이 어렸지만,

“비키라고 말하였느니라.”

다시 한번 떨어진 명령에,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리고―

“…진심이구나.”

가을량의 표정은 점점 더 흉신악살과 같이 일그러졌으니―

“좋다.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마!”

안모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받아라! 오십 년 전 광서 땅을 공포에 물들였던 풍마도귀의 풍마도법이다!”

풍마도법(風魔刀法).

풍마광란(風魔狂瀾).

날카로운 도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칼바람에 내기가 실리며, 벽이든 바닥이든 닿는 것에 검흔을 남겼고, 피할 방위를 모두 점한 채 하윤호를 향해 휘둘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뒤도, 옆도, 위로도 피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하윤호가 택한 것은―

파팟!!

“…….”

앞.

정면 돌파였다.

서걱―

칼바람에 하윤호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 나갔다.

피핏―

칼바람에 하윤호의 피부 세 곳에 자상이 새겨졌다.

그러나 그 가을량의 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한 하윤호는 돌파를 위해 웅크렸던 몸을 피며 팔꿈치로 가을량의 팔 안쪽을 찍었다.

‘큭?’

검의 회수를 차단당한 가을량은 곧이어 턱에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뒤이어 허벅지가 무릎에 찍히는 충격을 받았고,

퍼퍼퍽―

가슴팍에 연타로 세 번의 주먹이 꽂힘을 경험했고,

‘다음은… 옆구리!’

그다음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재빨리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부웅―

아슬아슬하게 맹금류의 발톱과 같이 손아귀로 갈퀴를 만든 하윤호의 손이 스쳐 지나갔고, 그 모습을 확인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싸울아비 무술. 대장군부에서 배웠던 무공의 형을 아직도 익히고 있느냐?”

“그러는 형님께서는 어이하여 다른 무공을 사용하십니까요?”

“그야 당연하지. 그 무공은 약하기 때문이다.”

“약하다라……. 대장군의 싸울아비 무류를 보셨다면 그런 말씀 못 하셨을 텐데 말입니다요.”

“그건 대장군이시기에 가능한 것이고. 대장군께서 삼류의 삼재검법을 펼치셨다고 삼류 수준의 무예를 보였겠느냐?”

무공 자체의 고하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을량은 그 확고부동한 진리를 설파하며 도를 높게 들어 올렸다.

“보아라. 이번엔, 삼십 년 전 광동 오대 검수라 불리던 흑월검(黑月劍)이다!”

흑월검(黑月劍).

월야검무(月夜劍舞).

다음 순간 검세가 변화했다.

조금 전까지의 것이 광풍처럼 몰아쳐 오기에 눈에 선명하다 못해 온 시야를 메울 것 같은 무공이었다면―

서걱―

“……!!”

이번 검법은, 아차 하는 순간에 다가와 옆구리에 자상을 선사하는 암살검이었다.

“아직이다.”

옆구리에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것에 고통스러워 할 여유는 없었다.

또다시 휘둘러진 검격이 목젖을 그어버릴 듯 날아왔기에, 재빨리 손등으로 검면을 쳐내야만 했다.

“고작 그 정도냐!”

검격이 쳐 내졌음에도 가을량은 오히려 일갈하며 더더욱 은밀하게 검을 휘둘렀다.

피피핏!!

미쳐 쳐 내지 못한 검격은 순식간에 하윤호의 전신에 대여섯 군데의 자상을 남겼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중에 치명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가을량에게 문득 하윤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문주 님께서는, 고작해야 이 정도십니까요?”

“뭐?”

“검 끝이 흔들리십니다요. 잡념이 많다는 뜻입지요.”

온몸이 핏물에 절여졌으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지체되면 뒤이어올 정천맹이 두려우십니까요?”

“이놈!!”

“전장에서 잡념이 맞으면 검 끝이 떨린다. 대장군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요?”

“닥쳐라!!”

가을량은 생각했다.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는 하윤호이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 뿐이라고.

아니, 분명 녀석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내거나 쳐 내는 것은 맞지만, 그 여유는 얼마 남지 않았음이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몰아친다면―

“…어?

다시금 상승 무공을 사용하기 위해 내공을 움직이려 하는 그때,

덜컥―

가을량의 몸이 녹슨 맷돌마냥 멈추었다.

좀 더 정확히는,

‘내공이……?’

좀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내공이―

‘움직이지 않는다!’

돌처럼 딱딱히 굳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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