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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254화 (254/350)

254화

“너희는 무공(武功)을 익히는 게 아니다. 무술(武術)을 익히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첫날 들은 말이다.

“무(武)로써 공(功)을 쌓는 것은 그로써 도(道)를 닦는 이들이나 하는 것.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로써 무예를 익히는 우리들은 이를 무술이라 칭해야 한다더라.”

‘형’은 또 어디서 주워들어 왔는지, 그리 일러주었다.

“고참 병사 형들이 그렇게 말해 주던데?”

굳이 묻지 않은 출처까지 첨언해 주는 형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 익히는 것이면 이걸 무술이라 부르든, 무공이라 부르든, 무예라 부르든 무슨 상관일까?

“그나저나, 너 진짜 무공에 재능 있는 것 아니냐?”

“글쎄.”

“반응이 왜 이렇게 심드렁해? 네가 동기 중에 제일 잘 치잖아.”

확실히 진도라든가, 성취라든가 하는 것들은 자신이 가장 빠르기는 했다.

하지만 딱히 그 사실에 기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딱히, 쓸모는 없잖아.”

무공, 무예, 무술… 하나의 형태에 이름은 세 개나 되는 그것을 열심히 익힌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계는 명확하다.

평생 북방의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피를 튀기다가, 어느 날 이름 없는 주검으로 싸늘히 버려지겠지.

잘나가는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무명을 떨치며 명성을 얻고 부귀영화를 탐내보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들에게 무공이란 고작해야 살아갈 날을 하루 늘리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니, 이 자식 또 답답한 소리하네?”

그러나 ‘형’의 생각은 ‘나’와 다른 듯했다.

“야 인마, 쓸모없는 게 어디 있어? 뭐든 조금씩 조금씩 모아가다 보면 결국 뭐든 되는 거야. 자, 저거 봐.”

‘형’은 군막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평소 ‘형’이 쌓아 오던 돌탑이 보였다.

“꽤 많이 모였지? 우리가 여기 올 때부터 내가 쌓아놨던 돌탑.”

훈련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형’은 나뭇가지든 돌멩이든 하나씩 주워와서는 저곳에 쌓고는 했다.

“도저히 의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아주 작고 미세한 것도 쌓이면 저렇게 되는 거야. 배움이란 그와 같지. 그때야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단 쌓고 보면 결국 무엇이든 되는 거야.”

“무엇이든…….”

“그래, 무엇이든.”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있다는 그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고.

덕분에,

“우승자! 이십칠 번!”

“와아아아아!!”

“너 이 자식!! 진짜냐고!!”

무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허억……. 헉…….”

“대단하구나.”

비처럼 땀을 흘리는 ‘나’에게 대장군이 직접 다가왔다.

“말한 대로, 우승자에게는 내 직접 상을 내리기로 했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헉, 허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이 순간,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우승하면, 무조건 십인장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

형은 그렇게 말했다.

비록 고작해야 열 명을 이끄는 가장 작은 소대의 장이 되는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가진 놈’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가진 놈은 불릴 수 있어. 가지지 못한 놈은 더할 뿐이야. 그러니 우선 가진 놈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일까?

소원을 말해 보라 말하는 대장군보다, ‘나’의 시선은 관중 한편에 있을 ‘형’에게로 더욱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축하한다, 이 자식아!!’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아, 그렇구나.’

‘나’라는 존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을, 주십시오.”

“응? 뭐라고?”

“…책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책을 주십시오.”

“책이라고?”

대장군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냐?”

나중에 듣기로, 지금까지 이런 무술 대회를 주관한 적은 많아도, 그 무술 대회의 우승자가 ‘책’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제게 형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알 생각도 없던 나는 덤덤히 입을 열어 답했다.

“배우기 좋아하는 형입니다. 그런데, 글을 몰라 무언가 제대로 익히질 못한다고 합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구전으로 전해 듣기만 하는 형을 위해.

“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책을 주십시오.”

이제 직접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지식’이라는 것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도록.

“큭… 크, 크하하하!!”

그런 ‘나’의 말에 대장군을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좋아. 주지. 부관!”

“예, 대장군!”

“원하는 대로 해주거라!”

대장군의 명령은 즉흥적이었고, 그것이 이행되는 것은 신속했다.

당장 무술 대회의 끝을 축하하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한 보따리의 책이 도착했으니까.

“대장군께서 호의를 베푸셨다. 익히기 쉽게 주석까지 달린 것들로 구해 줬으니 감사히 여겨라.”

부관이 직접 가져다준 한 보따리의 책.

그것을 받아든 ‘나’는 곧장 그걸 들고 ‘형’에게로 달려갔고,

“야 이 개자식아!!”

그날 처음으로, 진심으로 화를 내는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왜?”

“이 개자식아!! 이 멍청한 새끼가!! 이 평생 빌어 처먹을 새끼가!!”

얻어맞았다.

얻어맞은 얼굴보다도,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더욱 아팠다.

아니, 사실은.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왜 그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버렸냐고!!”

정작 때린 사람은 자신인 주제, 엉엉 울고 있는 ‘형’의 모습이 더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형…….”

멱살을 쥐고 소리치다 못해 울부짖는 ‘형’은 무엇이 그리도 속상하고 서러웠는지, 한참을 울다 지쳐 쓰러져버렸다.

“…이불 덮고 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뭉클거려, 이불 대용으로 쓰는 모포를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운 날이었기에 모포 한 장만 가지고 나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빠악!

“이 새끼야! 입 돌아가겠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언제 잠들었던 건지.

정수리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형?”

재우고 나왔다 생각했는데, 어째 푹 자버린 자신과 달리 ‘형’은 밤을 새운 듯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고 있으니―

“…거, 미안하게 됐다.”

“…어?”

“어제 인마. 미안하다고. 아팠냐?”

아팠냐고 묻는다면, 조금 전 얻어맞은 정수리 쪽이 더 아팠다만…….

“그… 사과라고 하기는 뭣하고. 자, 봐라.”

옆에 털썩 주저앉은 ‘형’은 돌탑에서 가져왔는지 나뭇가지 하나를 가져다가 바닥에 죽죽 줄을 그었다.

“잘 봐라. 예쁠 윤(贇)에, 이름 호(號)다. 보통 이 호라는 게, 무림에서 고수들에게 주어지는 별호라는 단어에 쓰이는 글자라더라. 어때?”

“…응?”

“응? 은 무슨 응? 이야. 어떻냐고.”

“뭐… 가?”

“이 새끼. 똘똘한 놈이 이럴 땐 또 멍청한 표정을 짓네.”

‘형’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이름 말이야. 이십칠 번이 뭐냐, 이십칠 번이.”

우승자 호명 당시 불렸던 이름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예쁠 윤(贇)에, 이름 호(號). 시팔 더럽디더러운 인생이지만. 그래도 갈 때는 이쁘게 가야지. 안 그러냐?”

가진다는 것.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 이름이란 그런 것이었다.

“화난 것… 아니었어?”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묻자,

“화났지. 더럽게 났지. 기껏 ‘가질’ 기회를 얻은 동생 놈이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도 무지하게 화났고, 그게 바보 병신 같은 이 형 놈 때문이라서 더더욱 화났다.”

‘형’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시팔 우리가 화낼 틈이 어딨냐. 그럴 시간에, 차라리 더 나아갈 노력을 해야지.”

그래서 ‘형’은 고민했단다.

괜히 ‘나’에게 분풀이해 버린 자신의 모습이 쪽팔려서 자는 척을 했고, 홀로 남겨지자 슬그머니 일어나 책 보따리를 풀어헤쳤다고 한다.

“아, 물론 내 이름도 있지. 네 녀석, 혼자 이름 가지라면 또 안 가질 것 아냐. 그래서 내 이름도 지었다.”

‘형’은 또다시 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끼적거렸다.

“새 을(乙)에 두 량(兩)이다. 둘 다 두 번째와 숫자 둘을 상징하는 글자들이지.”

“…왜, 둘이야?”

“암만 봐도 나보다 네가 더 잘나 갈 것 같거든.”

“…응?”

“뭘 그리 멍청한 표정을 지어? 네가 첫 번째 하고, 내가 두 번째 하는 거야. 잘난 동생 떡고물 좀 얻어먹어 보자고.”

“…나?”

“뭐야, 서… 설마, 안 시켜주는 거 아니지?”

혼자 몹시 당황해하는 ‘형’의 모습에,

“…큭.”

‘나’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 너… 웃었다? 와, 너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럼 웃지. 나도 사람인데.”

“이 자식아, 너랑 만나고 웃는 거 처음 보는데 무슨.”

그런가?

이 형 덕분에 꽤 많이 웃었는데, 생각해 보면 소리 내어 웃는 건 처음인 듯했다.

“…그래, 시켜줄게. 우리 형. 두 번째, 꼭 시켜줄게.”

“흐흐, 약속했다? 너 그 약속 어기기 없기다?”

“알았어.”

이 거지 같은 인생이 어찌 될지야 알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마따나, 어찌 될 수 없으니 정말 그 소원을 이루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다짐하던 날,

“둘 다 어서 나오거라! 대장군님께서 찾으신다!”

책을 나눠주었던 부관이 막사로 찾아왔다.

“예, 예? 대장군님께서 찾으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가보면 안다.”

당황하는 ‘형’과 ‘나’는 대장군께 호출되었고,

“고개를 들어보거라.”

대장군과 독대하게 되었다.

“…대, 대장군을 뵈, 뵙습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바짝 얼어붙은 ‘형’은 맘을 절었고, 나는 처음으로 대장군의 얼굴을 또렷이 보게 되었다.

바로 어제 우승 보상을 얘기할 때 보았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제대로 대장군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었다.

‘이 사람이… 대장군.’

두꺼운 눈썹.

강렬한 눈빛.

두툼한 입술.

천장(天將)이라 불릴 만한 존재를 글로 표현해 쓰자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 강렬한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허허, 재밌구나. 마음이 들떠 날밤을 새워야 할 녀석은 분명 이쪽인데, 전혀 다른 녀석이 날밤을 새운 듯하군.”

‘형’의 충혈된 눈이 다 낫지 않은 모습을 보고 껄껄 웃은 대장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이름이 있느냐?”

“이, 이름 말씀이십니까? 저… 저는… 으, 을량이고, 이… 이 녀석은, 유, 윤호입니다…….”

“을량? 윤호? 설마, 너희가 직접 지었느냐?”

“그,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하하하, 재밌는 놈이로고. 한 녀석은 눈 빤히 뜬 채 나를 바라보고, 한 녀석은 덜덜 떠는 주제에 할 말은 한다라.”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숨기지 않는 대장군은 툭 하고 던지듯 말했다.

“어떠하더냐. 너희 둘. 내 밑으로 오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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