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내 밑으로 오지 않겠느냐.
툭 하고 내뱉듯 던져진 그 말에 ‘나’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무슨 뜻이지?’
이곳 북방에서 대장군은 곧 왕과 다를 바가 없다.
더 이상 중원이들이 살지 못하는 척박한 지역, 그곳에 지어진 군락에는 오로지 그의 말을 법처럼 따르는 이들만이 존재할 뿐이니―
‘굳이 밑으로 들어오라 할 필요가 있나?’
저런 말을 하지 않아도, ‘나’와 ‘형’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대장군의 밑에 고개 조아린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 말에 담긴 진위를 자연스럽게 의심하게 될 때,
“평생… 아니, 삼대의 영광입니다!! 대장군!!”
바로 옆에서 천둥이라도 내리꽂혔는지, 고막을 아프게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형?’
말할 것도 없이 을량이었다.
“삼대의 영광? 큭큭, 어린 녀석이 어디 낙양에서나 들을 법한 말들을 하는구나. 그곳 출신이더냐?”
“헤헤, 그건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들은 말이 많습니다요.”
“그렇군. 하면, 곁의 아이는 어떻더냐?”
“제 동생도 좋다고 합니다요!”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귀도 좋구나. 본 장군도 듣지 못한 동의인데…….”
“아이고… 이 녀석이 워낙 숫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이 녀석의 평소 숨소리나 행동 방식, 몸의 움찔거림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습죠!”
이 형이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저 웃기지도 않은 말투는 또 무엇이고.
‘나’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었고, 그사이 둘의 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긴, 우승 상품마저 형에게 넘길 정도라면 각별한 사이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대장군과 순간적이나마 움찔 몸을 떨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는 을량은 합의점에 도달했는지 결론을 지었다.
“좋다. 부관을 따라가라. 새로운 막사를 내어주마.”
* * *
이렇게 될 걸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은 우리에게 새로운 막사로 안내해 주었다.
외곽에 있던 막사가 아닌, 군영의 중심부에 가까운 그 막사는 근본이 막사답게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훨씬 튼튼하고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캬! 이걸 봐라, 윤호야. 가죽이 보통 가죽이 아니야!! 완전 새 가죽인데?”
을량은 그 사실이 좋은지 연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구멍이 하나도 없어! 이제 비 오는 날에 물샐 틈 찾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겠는데?!”
전에 살던 막사는 여기저기 누수가 많아서, 비 오는 날이면 진흙을 퍼 바르느라 고생했어야 했다.
어느 구멍을 가죽으로 덧대봐야 곧 새로운 자리에 구멍이 뚫리고, 또 새로운 자리를 막으면 또다시 새로운 구멍이 생긴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아까운 가죽을 낭비하는 것보단 차라리 매일매일 진흙을 바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리 결정했지만, 그때마다 맨몸으로 비를 다 맞고 들어와 볏짚에서 자야 했던 기록이 새록새록하다.
“…그렇게 좋아?”
“흐흐, 물론이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씨익 웃은 을량은 말했다.
“윤호야. 넌 좀 더 이런 기회에 기뻐해야 할 줄 알아야 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맨날 무덤덤해서야 원.
목석 같다고 핀잔을 주는 을량의 말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왜?”
“응? 왜냐니?”
“형은 그분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 수상하지 않냐고?”
“너무나 수상… 응?”
‘나’라는 존재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동시에 말하고는 당황해하는 ‘나’의 표정을 본 을량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수상하지,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걸 아는데 어떻게…….”
“흐음, 어떻게라…….”
그 말에 을량은 척― 하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윤호야. 내가 볼 때, 너는 분명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을량이 나보다 떨어지는 것은 무재(武材) 하나뿐이었다.
그 외의 것에서 을량은 다재다능했다.
단 하루 만에 서책을 뒤적여 글자들을 찾아내 좋은 이름을 짓는 것도 그렇고, 비루한 막사에서도 남들 다 하는 잔병치레를 최소화시키는 생존 능력도 그렇고, 천지사방이 막막한 이 세상에서도 ‘기회’와 ‘가능성’을 물어오는 게 그러했다.
‘형’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을량이었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을량은 손을 뻗어 ‘나’의 머리를 헝클어왔다.
“윤호야, 윤호야. 넌 아직 재련되지 않은 원석과 같아. 재련만 된다면 나보다 훨씬 아름답게 가꾸어질 녀석이지. 그리고 나는 이미 재련이 거진 끝난 광물과 같아. 네가 보기엔 내가 좀 더 다재다능할지 몰라도, 그건 그저 경험의 차이에 불과해.”
“경험…….”
“그래. 그리고 그 경험의 차이에서 보건대, 너의 생각은 조금 근시안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나이로 따지자면 비슷하지만, 이럴 때마다 훨씬 연장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을량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생각이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어차피 모두가 자신의 발아래인 대장군께서 왜 우리를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직접 제안하셨을까? 무술 대회 우승자라는 신분은 제법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래 봐야 그 대회의 출전자들은 아직 제대로 된 소년병 역할도 다 하지 못하는 얼치기일 뿐일 텐데 말이지.”
게다가,
“무재가 뛰어나다? 분명 윤호 네 무재는 나보다 뛰어나지. 하지만 그마저도 중원의 수많은 후기지수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할 게 없을지도 몰라. 원래, 재능 있는 이들은 진작 대문파에서 데려가기 마련이니, 설혹 그들의 거름망을 천운으로 피했다 치더라도 대장군께서 우리를 눈여겨본다는 것은 영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맞아.”
대부분의 생각이 자신과 동일했다.
“당연히 의심될 거다. 우리를 데려가서 어디 쓰려는 걸까?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심을 가지도록 키운 뒤, 어디 일회성으로 쓰다 버릴 자객으로 양성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밀명이랍시고 이민족 막사에 들어가 적 이민족 수장의 목을 따버리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도 마구마구 들어 버릴 거야.”
“그렇게 잘 아는데…….”
대체 왜?
“큭큭. 윤호야, 윤호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아는 것은 대장군이 우리에게 내민 기회인지 낚싯대의 미끼일지 모를 의심스러운 것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처지다.”
“우리의… 처지?”
“그래.”
을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연스레 엉덩이에 깔린 바닥의 흙이 밀려나고, 을량은 그것을 한 줌 쥐어 손아귀 위에서 아래로 떨구었다.
“우리의 처지는 이 흙과 같지. 누군가 아무런 적의도 호의도 없이, 그저 무념무상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깔고 앉았을 때 밀려나는 흙이요.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의 눈에 들어 한 줌 손으로 들어 올렸다가 흥미로서 바닥으로 떨어트리면 이렇게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우리의 처지와 같지 않으냐?”
그것은 실로 처량하고 무력한 신세.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고, 또 익숙하다 보니 무던해지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도 반복되면 사람은 익숙해지지. 그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인지, 그 고통에서 눈 돌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만……. 어쨌거나, 우리 상황은 대충 이런 상황이야.”
그러니까 봐보라고.
“이런 우리가, 대장군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손해가 되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없지.”
“그래, 없어.”
가볍게 흙먼지를 털어내며 을량은 히히 웃었다.
“어차피 소년병으로서 정식으로 전쟁에 출전하게 되면 우린 화살받이 신세야. 지금의 대장군은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강해서, 어느 정도 소년병이 되기까지 훈련 기간을 주고 의식주도 최소한이나마 챙겨주지만… 전쟁에 돌입하면 그런 거 없어질 거야. 화살받이 신세가 되기 싫다고 탈주하는 소년병? 즉결 처형 처벌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지.”
어차피, 지금의 우리는 최악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덥석 물어야 한다.
“설령 그게 낚싯대의 미끼가 되건 덫 위에 놓인 고기가 되든 말이야. 땅바닥에 놓인 먼지나 먹고 사는 집 진드기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훨씬 영양가 높은 먹이일 거거든.”
그마저도 감지덕지인 우리니까.
“…이해했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있다면 이럴까.
시야의 일부가 갑자기 트이며,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무조건 강해진다. 없이 태어난 우리들에게는, 이런 위험천만한 미끼조차 감지덕지니까. 이런 고기라도 하나하나 씹어먹으며 무럭무럭 성장해 보자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린 아직 성장기잖아?
마지막 농담 섞인 을량의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숙소를 안내해 주고 끝인 줄 알았던 부관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따라와라.”
부관을 따라간 곳은 그들의 막사가 위치한 중심부에서도 특히 최중심부가 있는 곳이었다.
대장군의 전용 막사가 있는 곳이었으며, 그곳에는 이 밤중에도 환하게 밝혀줄 횃불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대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부관이 먼저 인사하자 을량이 곧잘 따라 했고, ‘나’는 한 박자가 늦어버렸다.
하지만 대장군은 개의치 않는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과례(過禮)는 되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아까 시간이 없어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하고자 불렀으니 말이다.”
준비된 의자에 앉은 채 대장군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너희들에게 제안을 하마.”
제안.
아까에 이은 두 번째 제안에 ‘나’는 바짝 정신을 집중했다.
‘형은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 했지.’
이건 두 번째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가볍게 던져진 말에도 내 인생이 크나큰 전환점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이번엔 실수치 않고 제대로 경청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렇게 던져진 두 번째 기회,
“너희들. 나에게 무공을 직접 배우지 않겠느냐?”
‘이건…….’
이전 것보다 훨씬 큰 기회였으니―
‘역시, 을량 형이야.’
‘형’은 이런 일이 연달아 생길 줄 알고 진작에 가르침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건 확실히 ‘나’라도 꽤 동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일지 복잡한 고민이 차올랐다.
‘…그래, 내가 내릴 최선의 답은 역시 이것이지.’
곧 머릿속에 답이 정해지며, 나는 자연스레 눈짓으로 ‘형’ 쪽을 바라보았다.
내 답은 이미 선명하지만, ‘형’이라면 나보다 더욱 좋은 답을 결론짓지 않았을까 싶으며.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형’은,
“네네, 그그, 게게, 무무, 스슨, 마말, 쓰씀, 이이, 시신, 지지……?”
어느새, 고장 난 맷돌마냥 버벅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