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58화 (258/350)

258화

바람이 불어왔다.

칼바람이었다.

북방의 바람이란 대개 그런 식이어서, 정면으로 맞고 있다 보면 얼굴이 베여버릴 것만 같은 삭풍이었다.

그걸 가만 맞고 있자니 뒤편에서 히히힝― 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윤호야, 너 또 여기서 궁상맞게 바람이나 맞고 있냐?”

“형.”

을량이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어딜 보나 황량한 벌판뿐인데.”

맞는 말이다.

북방이란 풀 한 포기 자라나기도 벅찬 곳이기에, 굴러다니는 것이라고는 돌, 자갈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흙먼지가 끝이었다.

그런 세상의 지평선 끝을 눈에 담았다.

“그냥, 언제까지 이 지루한 전쟁이 이어질까 싶어서.”

“흐음… 이 전쟁의 끝이라.”

종전(終戰).

그 간단한 단어 하나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글쎄. 어쩌면 이 북방의 종전도 찾아오지 않을까? 듣자 하니 서편의 전쟁도 몇 년 전에 끝이 나고, 지금은 그 잔당에 대한 소탕 작전만 이어지고 있다 하잖냐.”

그 사교도들에 대한 이야기인가?

비록 사교도라 불리지만, 일개 사교도라고는 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어 이 제국에 셋뿐인 대장군 중 하나가 나설 정도라 들었다.

“그곳 역시 이곳 북방에 결코 밀리지 않는 거대한 전선이 유지 중이라고 듣긴 했는데…….”

“에이, 과장이겠지. 일개 사교도가 대단해 봐야 저 북방의 놈들보다 더하겠어?”

현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또 다른 제국을 무너트린 역사가 있는 북방 이민족 놈들.

그들과의 전선보다 더한 전선이 있다는 말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젓는 을량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바라보던 지평선 너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글쎄. 모르는 일이지.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쉽게 믿지 못하니까.”

“흐흐흐, 이놈 자식. 널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정말 한결같이 귀여움이라고는 없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으이구, 이놈아.”

을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너무 붙임성이 없어. 그 딱딱한 말투 좀 고쳐라.”

“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끝마다 요 자를 붙이는 것과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당연히 그 정도까지 바라지는 않지. 네가 얼마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녀석인데.”

평소 말버릇을 지적하며 묻자 을량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를 향해 어느 정도 숙여주라는 말이야. 솔직히, 우리가 대장군 눈에 들어서 운 좋게 휘하에 들어서 망정이지. 네가 다른 집단생활을 해야 했으면 꽤 힘들었을 거다.”

“그런가.”

일리는 있다.

다만,

“그래도 별 의미는 없을 고민일 거야. 우리는, 어차피 다른 생활을 할 일이 없을 테니까.”

“하긴, 이 전쟁이 끝나든 말든 해야 다른 생활이 시작되거나 하겠지.”

북방과의 종전이라니.

벌써 수백 년간 이어져 와 이 제국의 수명보다 더 긴 시간을 존재해 온 전선이 종결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망연함이 머릿속을 채울 때, 애써 그것을 털어내듯 을량이 크게 소리쳤다.

“이 자식아. 너 때문에 괜히 헛생각만 들잖아.”

“나 때문에?”

“그래, 대장군의 명령을 받아 전달하러 왔더니.”

에잉, 쯧.

머리를 벅벅 긁은 을량은 큼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중후한 풍을 흉내 내며 말했다.

“을량과 윤호는 들어라. 갈추산 인근의 이민족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각각의 부대를 이끌고 정찰 작전을 시행하라.”

“대장군의 명령이신가?”

“맞아.”

“명령서는?”

“없는데?”

“형, 그거 잘못 걸리면 명령 위조야.”

전장에서 명령 위조는 곧 참수고.

“참수라니! 진짜라니까? 너 나 못 믿어?!”

“…지난번에 웬 영약 하나 찾겠다고 애들 푼 것 같은데.”

“어허, 인마! 애들 듣는데 쉿!!”

다급히 검지를 세워 입술 앞을 막는 모습이 여러모로 안타깝다.

“형. 적당히 해둬. 애들이 눈감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눈감아 주다니!! 아니라니까!!”

“예, 예. 그러시겠죠.”

그런 을량의 어깨를 적당히 두들겨 주며 지나쳐 갔다.

바라보던 지평선 끝은 황량함만이 가득했지만, 그 반대편 방향에는,

“다들 들었겠지?”

“못 들었습니다!!”

“눈도 가렸슴다!!”

“저는 사실……!!”

이 황량한 벌판을 뒤흔들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들, 수천 명이 서 있었으니―

“그만, 그만. 명령을 말하는 거다.”

“그것이라면 들었습죠!”

“저도 들었슴다!!”

이곳 북방으로 온 지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동고동락해 온 녀석들.

한때 소년병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청년이 되어버린 이들이었고.

“그래, 대장군의 명이시다.”

그리고,

“가자. 갈추산으로.”

“천인장의 명을 따릅니다!”

“천인장의 명을 따릅니다!”

이제는 천인장이 되어버린 우리가 선두에 서 있었다.

* * *

풀 한 포기 자라나기 힘든 이 황량한 북방에도 식생이 자라나는 곳은 몇몇 있고, 개중 이민족들이 풀뿌리나마 캐가는 야산 역시 몇몇 있었다.

갈추산이 그런 곳이었다.

이 험지에서 자라나기 위해 억세고 험하게 자란 가시나무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인적이 드물기에 사람이 돌아다닐 만한 길도 얼마 없는 끔찍한 야산.

그렇기에, 사람이 숨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뭐 좀 알겠냐, 윤호야?”

“확실히, 사람… 아니, 최소 수십이 왔다 간 흔적이 남아 있어.”

지난 시간, 대장군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개중에는 추적술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 나뭇가지가 부러진 흔적, 바닥의 나뭇잎이 짓밟힌 흔적, 비정상적으로 흙이 파헤쳐진 흔적 등등으로 과거 이 장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봐봐.”

“이건 말똥이잖아?”

아직 그 구린내가 다 하지 않은 말똥을 나뭇가지로 꼭 찍어 들어 올렸다.

“아직 마르지 않았어. 그림자 진 곳이라 쉽게 마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곳에 사람들이 왔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하… 이거 무시무시한데? 최소 수십이 끝일까?”

“아닐 것 같아. 남은 흔적이 그리 많지 않고 바닥에 남은 자국 역시 깊지 않아. 장비 차림이 가볍다는 뜻이고, 그렇게 몸을 날래게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이라면 척후병이란 뜻이겠지.”

그들 입장에서는 적진에 더더욱 가까운 갈추산이다.

그곳에 수십의 척후병이 왔다는 건,

“무시무시한데. 어쩌면,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인접해 있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게 봐야겠지.”

척후는 본대의 일부일 뿐이다.

척후가 수십에 불과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척후만 수십에 달한다는 것.

갈추산은 산세가 험하고 깊어 수천의 군마가 숨어들 수 있는 곳이요, 평소 사람이 드나들지 않으니 은밀한 기동에 적합한 땅이다.

“우리 애들 숫자가 이천인데… 비벼볼 만할까?”

“힘들지.”

“젠장,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북방 이민족은 전투에 이골이 난 놈들이다.

수백 년간 제국의 북방을 어지럽혀 온 유목 민족들의 기마술은 경지에 이른 수준이고, 그런 이들을 상대해야 할 나와 을량의 부대는 이제 고작 소년병 티를 벗어난 정도다.

‘숫자야 엇비슷하지만, 맞서 싸워 봐야 우리 쪽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터다.’

애초에 명령 역시 동태를 살피는 것까지였으니, 이 정도면 유의미한 결과였다.

“뒤로 물러나자.”

을량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후퇴 의견을 낼 때,

뿌우우우―

저기 어디선가, 뿔나팔 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이건, 아군의 지원 요청인데?”

“그것도 천인장 이상급이야.”

곤경에 처했을 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부는 것이 뿔나팔. 부는 순간 적군에게도 그 소리가 들릴 텐데도 이걸 부는 것은 전투가 임박했거나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뜻.

“어떻게 하지?”

적의 숫자가 수천 이상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군의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다는 건 자신들의 추측이 옳다는 방증임과 동시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거기다 자신들이 가세해 봐야 뭐가 바뀔까 싶지만,

“가야지.”

“인마, 조금은 망설여 줘라. 물어본 내가 뭐가 되냐?”

망설임 따위는 선택지에 없었다.

“어차피 형도 갔을 거잖아.”

“그건… 그치.”

북부는 사람이 살기에 너무나 황량한 땅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결국 모두가 한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대장군의 이름 아래에서 모인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 진한 것이 흐른다고 믿는다.

그것이 ‘북부’의 맹세.

뒤편에 도열한 병사들도 다른 생각 따윈 없었기에 이미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 풀어, 새끼들아.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 주제, 그런 그들에게 농담을 건넨 을량이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가자. 내가 선두에 선다.”

“예, 장군!”

“예, 장군!”

행동은 빨랐다.

곧장 산길을 들이쳐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고, 산 중턱 하나를 넘기자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릿수 봐라. 저게 몇 놈이야?”

“일만이 넘겠는데? 어떻게 저들이 여기까지 올 동안 몰랐던 거지?”

야만족의 복색을 갖춘 이들은 물경 그 수가 일만을 넘겼다. 산길을 가득이 메우고 있는 게 야만족의 군대였고, 그들에 맞서 싸우는 북방의 아군은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여기서 더 가세해 봐야 쉬이 전세를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일단 지휘관 되는 이를 구해야 달리 방도가 생길 터.

저 부대를 이끄는 이가 누구인지 찾아보니,

“저기다! 무명(無名) 장군이다!”

“뭐? 만인장 무명의 부대라고?”

어릴 적, 자신을 구해 주었던 북방 출신의 만인장 무명(無名). 그가 열 명도 넘는 장수급 이민족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 이거 도망 못 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그 모습을 발견한 을량은 옷자락을 찢어 손아귀와 검병에 단단히 휘감았다. 설령 불의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쉽게 검을 놓치지 않게.

“내가 후방을 교란하마. 너는 장군을 구해라.”

“알겠어.”

딱히 어느 쪽도 쉽지는 않다.

무명을 구하려면 소수의 정예 고수들을 상대해야 하고, 후방을 교란하라면 다수의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나마 개인 무력이 뛰어난 자신에게 전자의 임무가 떨어진 것이고, 그 사실에 불만 따위는 없었기에 곧장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상황은 백중지세.’

한눈에 보기에도 상황은 팽팽했다.

무명의 무력은 북부 내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만인지적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그 사실을 이민족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열 명이 넘는 장수급 이민족 전사들이 그의 발을 묶는 동안 나머지 압도적인 군세가 무명의 군세를 지워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상황에 균열을 만드는 게 급선무!’

열 명도 넘게 뭉쳐 하나를 상대하는 게 고작이지만, 정작 그 자신도 저 열 명 중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균열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방법은 여럿 있었으니까.

“대장군!!”

배에 힘을 주어 소리치자 쩌렁쩌렁한 외침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산속을 메우고 있었지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외침에 무명은 물론 이민족 전사들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덕분에 이민족 병사 몇몇이 추가로 달려왔지만,

“비켜!”

천인장이라는 직급은 비석치기로 딴 게 아니었다.

파파팟!!

“크아악!”

“으악!’

마상검술이 펼쳐지며 대 여섯의 목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덕분에 뚫린 길이 보이자 말 등에 매달아 놓았던 손도끼를 꺼내 들어 투척했다.

“웬 놈이… 억?”

그에 반응한 이민족 전사 하나가 검을 휘둘러왔지만, 이 손도끼는 사실 적의 병장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휘리릭―

손도끼의 손잡이에는 말의 안장과 연결된 긴 동아줄이 달려 있었고, 상대의 검에 휘리릭 휘감겼으니―

그 순간 ‘나’는 이미 말의 옆구리를 한번 걷어차고 뛰어내린 상태였으니, 이민족 전사 하나는 엉겁결에 내가 타고 온 말에 이끌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버렸다.

“크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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