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저건 또 뭐야?”
무심코 내뱉은 을량의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처음 보는 깃발이 다른 곳도 아닌 대장군부의 중앙에 떡하니 걸려 있었으니, 어디 새로운 부대가 왔나 싶어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천인장 중 하나가 깃발에 그려진 상징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저건… 동창의 상징이군.”
“동창의 상징?!”
“이전 근무지가 낙양이라서 알아. 저건… 동창에서도 제일 지독하다는 제독 직속 부대의 상징이야.”
“그 환관 놈들이 왜…….”
동창은 남성성을 포기한 이들만이 될 수 있다는 환관들의 집단이었다. 황실의 친위부대인 금의위와는 또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는 이들로, 금의위가 황실 양지에서의 무력을 상징한다면 동창은 음지에서의 무력을 상징하는 이들.
하나하나가 무공의 고수라고 알려져 있을뿐더러, 스스로 남성성을 포기할 만큼 독한 놈들이란 것 역시 그들을 따라다니는 소문이었다.
“…동창은 제독의 명령만 듣지. 그리고 놈들은 음흉하기로는 정평이 난 놈들. 뭐가 됐든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천인장들은 저마다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장군, 어찌하겠습니까?”
그에 고민하던 이들이 무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들의 상관인 만인장의 의견에 따라야 하기에 모두 시선을 모으자 가만히 막사를 바라보던 무명은 입술을 달싹였다.
“…복귀한다.”
“끙… 알겠습니다.”
“후, 장군이라면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동창이 왔든 금의위가 왔든 무명은 임무의 수행을 제일 우선 과제로 두는 유의 사람.
그들에게 내려진 임무가 북방 이민족의 동태 관측과 보고인 이상, 갈추산의 일을 보고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무명이 그렇게 결론 내리자, 그의 휘하 천인장들은 두말없이 따르기로 했고,
“윤호야, 우린 어떻게 하지?”
을량은 나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돌아가서 보고해야지.
“아니, 인마. 딱 봐도 불안하잖아. 동창이라니,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형님들에게 그놈들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다 들었다.”
사람 고문하기를 즐긴다거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취미로 매일 밤 의문스러운 행각을 벌인다거나, 그들의 기분에 따라 손짓으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거나.
어느 쪽도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이들이라는 이야기를 장대하게 하고 있는 을량의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상황을 보자는 거지. 굳이 먼저 매를 맞을 필요는 없잖아? 솔직히, 무명 장군이라면 몰라도, 우리 같이 쩌리들은… 야, 야? 너 인마 어디가! 사람이 얘기하는데!!”
“헛소리 그만하고 따라와.”
어차피 매맞는 건 늦게 맞든 일찍 맞든 똑같이 아프다.
그러니까,
‘어찌 돌아가는지 상황이라도 봐야지.’
심상치 않은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수밖에.
* * *
대장군부.
밖에서 보기도 심상치 않던 그곳의 분위기는 안으로 들어서니 더더욱 흉험하기 그지없었다.
군기를 유지하더라도 따로 보는 이들이 없을 때는 서로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북방이었는데, 지금 보초를 선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야, 윤호야. 이거 진짜 심상치 않은데?”
“그 얘기 벌써 세 번째야, 형.”
대장군부의 막사는 하나의 건축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막을 잇고 또 이어서 안쪽에 내부 통로까지 만들어버린 그곳에는 세 걸음 간격마다 위병이 지키고 있었으니, 매번 보아 왔음에도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막사 속의 막사 앞에 도달했다.
“대장군. 천인장 윤호와 을량이 명을 수행하고 복귀하였습니다.”
무명의 배려로 먼저 대장군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곧장 대장군 막사에 들어서 임무 복귀를 알리자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우후후, 굉장이 어린 친구들이군요.”
웬, 못 보던 남성이 대장군의 곁에 서 있었다.
‘저자는?’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시선이 향할 때,
“대장군을 뵙습니다!!”
을량이 크게 소리치며 바닥에 엎드렸다.
‘아…….’
그제야 실책을 깨달은 나 역시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동시에, 그 찰나의 순간 보았던 낯선 이의 행색을 떠올렸다.
‘폭이 넓은 옷,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에 귀한 신발.’
무장(武將)은커녕, 무인(武人)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행색이었지만―
‘위험하다. 정확히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 수 없어 더욱 위험해.’
이 북방에 어울리지 않는 그 행색이, 오히려 그 자에게서 더욱 진한 흉험한 향기를 풍기게 만들었다.
“돌아왔느냐.”
대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답했고, 그러자 곁에 있던 환관 사내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우후후, 장군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뛰어난 아이들이군요.”
“어릴 적부터 황상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받고 자란 아이들이요.”
“장군이 아니라 황상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제국의 만백성들은 황상을 어버이로 여기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소.”
대장군의 심드렁한 어투에 재밌다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화답했다.
“좋군요. 아주 좋습니다. 이 북방의 황량한 땅에도 황상에 대한 은혜를 아는 어린 새싹들이 저리 파릇파릇하게 자라나니, 참으로 나라의 미래가 밝습니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들일 뿐. 누가 뭐라 해도 당대 황상을 모시며 현재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은 대감 아니겠소?”
“후후후, 장군도 참. 농이 지나치십니다.”
별것 아닌 일상 대담처럼 느껴졌지만, 그사이에 들려온 단어가 심상치 않다.
‘대감이라고? 그건…….’
동창에 대해 일러준 천인장에게 들었다.
동창의 우두머리는 제독이라 하고, 그들을 일컫는 다른 말 역시 제독이라는 것을.
즉,
‘저자가 바로, 동창의 정점!’
동창 최고 고수이자, 황실 삼대 고수라 불리는 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땅바닥에 처박은 머리를 더욱 깊게 짓눌렀다.
‘다행이다.’
을량이 눈치를 줘서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더 그를 빤히 쳐다봤다가는 어떤 일에 휘말렸을지 알 수 없었다.
그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때, 불현듯 대장군이 말했다.
“그래. 식수 확보를 위한 인근 수원 정찰을 완수하고 돌아왔다고?”
식수 확보?
수원 정찰?
둘 다 낯선 말이지만, 내 입에선 곧장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렇습니다, 장군! 다행히 별다른 이민족의 동태는 없었고, 인근 야생 동물만이 둥지를 치고 있었기에 쫓아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잘했다. 전쟁을 위한 물자 확보는 언제나 중요한 법. 식량도 식수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선 밑기둥이 튼튼해야 하는 것이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대장군은 이내 우리의 공로를 치하하며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 말에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막사를 빠져나왔고,
“윤호야, 이거 내가 생각하기에…….”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어. 확실해.”
대번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민족의 심상치 않은 동태가 관측되는 시점에 동창의 제독이 직접 이 북부로 행차하였다.
거기다 대장군은 그를 경계하며 자신들을 밖으로 빼돌리려 하는 상태.
그 모든 증거들이 경계심을 잔뜩 자극할 때,
“어이, 꼬맹이들.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태용 장군님?”
고개를 돌리니 만인장 태용이 저편에서 건들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 자식들아, 오늘 우리 회식하는 거 잊었어?”
“옙?”
“빨리 가자, 다른 녀석들이 늦었다고 성화부리겠다.”
그는 곧장 우리의 목덜미를 잡고 이끌었고, 의아함 속에서도 일단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천막에 들어섰을 때―
“어? 다들 어째서 여기에…….”
“애들 데려왔다.”
태용을 비롯한 북방을 대표하는 만인장 다섯이 모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왔나, 태용.”
“무명은?”
“몰라, 알아서 살아오겠지.”
조금 전까지 불량스럽게 웃고 있던 태용의 표정이 딱딱히 굳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고 우리는 눈치만 보다가 그의 곁에 시립했다.
“저… 형님, 이게 대체?”
사석에선 형 동생 하고 지내는 우리였기에 을량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자 태용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동창의 제독이란 양반이 직속 부대는 물론이요, 금의위의 관군까지 이끌고 찾아왔다.”
그들이 방문한 시기는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갈추산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고 했다.
동창 제독을 위시로 한 일단의 군대가 북방의 대장군부로 찾아왔으니, 그들은 이민족 토벌을 지원하기 위해 왔음을 알렸다.
이후 빠르게 자신들의 막사를 추가로 설치하며 병력을 주둔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위치가 묘하게도 대장군의 막사를 빙 둘러싸는 형태였다.
“이거, 너무 수상한 것 아닙니까?”
“수상하지. 안 그래도, 바로 어제부터 동창의 눈과 귀가 우리 뒤에 붙기 시작했거든.”
“예? 그럼 우리 대화가 지금…….”
“여기 안은 괜찮아. 우리가 기(氣)로 외부로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차단하고 있으니.”
대장군의 막사를 포위하고, 그 주요 인물 뒤로 사람을 붙이기 시작하는 동창.
딱 봐도 수상했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놈들이 빌어먹을 황명(皇命)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거든.”
황명(皇命).
동창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
그 칼끝에 선 자는 삼대가 형장의 이슬로 화할 수 있는 최강최흉의 무기였기에 그 말이 나오자 막사 안의 분위기는 더욱 딱딱히 굳었다.
“대체 어째서…….”
“공식적으로는 말했듯 이민족 토벌과 그에 대한 지원이 우선이야. 하지만… 당연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 젠장, 이래서 황실의 뱀 새끼들이랑은 얽히기 싫었는데.”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황실에서 정치하는 놈들은 온갖 사특한 귀계를 보따리 속에 넣고 다니기에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낙양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고참 병사들 역시 제아무리 생활 환경이 각박해도 차라리 북방이 훨씬 낫다고 첨언했던 것들이 떠오르자 나 역시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그들이, 대장군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까?”
“인마, 말조심해.”
뱉는 말은 부정적이지만, 그 내용은 빼도 박도 못할 긍정이었다.
“…저희가 할 게 있습니까?”
조심스레 묻자 안색을 딱딱히 굳힌 만인장들은 서로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사실, 네 녀석들에게 미안한 부탁을 할 일이 있어서 부른 거다.”
태용이 잔뜩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미안한 부탁이라니요, 저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이라 그렇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는 품에서 각패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예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을 거다. 내가 사천 출신이다. 그리고 그때 말하지 않은 건… 내가 그냥 사천 출신이 아니라, 하오문 사천 지부 출신이란 거지.”
“하오문이라면…….”
“그 기녀와 배수들의 문파 아닙니까?”
“그래, 맞아.”
무림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뭉쳐 만들어낸 문파.
그곳의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태용은 말을 이었다.
“내가 떠나올 때 사천은 한창 전란이 진행 중이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그때 분위기는 북방의 전란으로도 감히 비교하기 힘들 수준이었지. 그래서 도망치듯 북방에 오게 된 것이지만… 내가 아직 그때의 끈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해.”
“그럼 이건…….”
“사천은 여기서 멀지. 하지만 섬서나 산서에도 하오문 지부는 있어. 그곳에 이 각패를 맡기면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거, 꽤 비싼 각패거든.”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담긴 듯한 각패를 건넨 그는 우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분명 무슨 음모가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 같은 북방 촌놈들이 그것을 알 턱이 있나. 정보는 정보를 다루는 집단에서 얻어내야지. 그리고, 그걸 얻어오는 게 너희들의 임무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모여 있다간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을 테니, 황량한 북방을 가로질러 내륙에서 정보를 구해 오는 것이 유일한 생로.
하지만 그 길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동창 놈들, 사람을 배치시켜 뒀을 거다. 너희가 몰래 떠나는 입장이니, 좋다구나 하고 너희들을 생포해 우리들의 속셈을 밝혀내려 할지도 몰라. 그만큼 위험한 일이지.”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욱 끔찍한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심장을 죄여 왔고, 우리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
찰나의 순간 서로 간에 질의가 오갔지만,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그게 뭐 대수일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