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우린 대장군부를 빠져나갔다.
수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머물러야 하는 만큼, 일개 마을 수준으로 넓은 대장군부를 빠져나가는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현 상황에 대한 우려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걱정, 여기서 어떻게 해야 이 난제들을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상념들이 밀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런 상념에 바질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윤호야. 벌써 따라붙었다.”
“알고 있어.”
말을 타고 달리는데도 시선이 느껴진다.
전장을 구르고 구르며 자연스럽게 익혀진 육감이 누군가 따라붙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동창인가?’
금의위 고수들이 말을 타고 전장에서 펼치는 마상무술에 특화되어 있다면, 동창의 고수들은 개개인이 무림인들처럼 뛰어난 무공을 펼칠 수 있다고 들었다.
특히나, 환관만이 익힐 수 있는 특별한 무공은 그들의 경지보다 한층 더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들었기에 경계심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형. 그거로 가자.”
“뭐? 너 제정신이야?”
“그럼, 이대로 산서까지 데려갈까?”
“…진짜, 넌 목숨 내걸고 사는 놈이야.”
신호를 주자 을량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딱히 이렇다 할 반대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워낙 엄살을 많이 부려서 그렇지, 북방에서의 생활은 목숨 내걸고 벌이는 도박에 이골이 나게 만들었기 때문.
결정이 내려지자 우리는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았고, 평소 자주 가던 산으로 향했다.
‘형과는 많은 걸 생각해 왔다.’
그냥 막연히 살아갈 뿐인 나와 달리, 을량은 계속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꿔왔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다 보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상상하기 마련.
개중에는, 이민족의 전사장이라는 강자에게 쫓기는 상황에서의 유격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때의 상황은 하나의 고수를 우리 둘이 나눠서 처리할 때를 상정한 것이지만.’
어차피 둘 이상의 고수가 우리를 쫓으면 얌전히 목을 내밀고 죽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를 쫓는 이가 하나뿐이라는 희망 사항을 내걸고 계획을 이행해야 했다.
“형.”
“좋아. 살아서 보자고.”
그렇게 말을 달려 계획의 시초가 되는 두 갈래 길에 도달했다.
하나는 산을 타고 오르는 비탈길이요, 또 하나는 평지처럼 보이는 길.
그 길에 도달했을 때,
“받아라, 윤호야.”
을량은 내게 보따리 하나를 던지고 비탈길로 말을 몰아 달렸다.
“후우.”
보따리 안의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고, 그걸 등 뒤에 맨 채 다시금 말을 몰아 달렸다.
그리고 약 한 식경을 달려 도착한 곳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앞둔 지점.
평지로 향하는 길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더 이상 길이 나 있지 않은 그곳에서 천천히 말을 멈추며 숨을 돌리고 있을 때,
“……!!”
머리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재빨리 몸을 숙였다.
휘익―
안장에 납작 엎드림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것은 주먹만 한 돌멩이였지만, 그게 앞쪽의 절벽에 부딪쳐 쾅 하고 굉음을 일으키는 걸 보니 저게 머리에 적중했다면 골통이 깨졌을 게 분명했다.
“우후후, 감이 좋은 아이구나.”
순간적으로 서늘해진 심장을 달래고 있자니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
천천히 말을 몰아 방향을 돌리니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는 네가 굳이 알 필요 없단다.”
상대의 복색은 특이했다.
동창 대감은 마주한 것이 찰나에 불과했기에 그 복장만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 나타난 자는 자세히 마주 보니 얼굴에 분칠을 하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손 화장?’
여인네나 할 법한 꽃물을 손톱에 들이고, 귀에는 금으로 된 장신구까지 착용한 것이 실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하지만, 나는 네가 궁금하기는 하구나. 아이야. 너의 이름이 무엇이니?”
그 말투와 함께 이어 남자와 여자를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기이한 목소리는 절로 거부감이 일었다.
“…윤호.”
“윤호?”
“예쁠 윤(贇)에, 이름 호(號) 자를 씁니다.”
“예쁜 이름이라, 후후. 감도 좋은데, 이름도 좋구나.”
품평하듯 뱉는 말들엔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마치 나라는 존재를 도축장의 소 돼지로 보는 듯했다. 자신은 얼마든 이쪽을 도축해 버릴 수 있지만, 나라는 존재는 상대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는 무해한 존재인 것처럼.
어느새 허리춤에서 꺼내든 섭선까지 여유로이 부치는 것이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빈틈이 안 보여.’
강자의 오만은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도 모자랄 노릇. 그렇기에 상대가 무려 ‘대화’를 나눠주는 동안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려 했지만, 도통 그런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만들어 낼 수밖에.
“특이하십니다.”
“무엇이 말이니?”
“보통은 저보고 운이 좋다고들 하는데, 감이 좋다고 칭찬해 주셨잖습니까.”
“어머, 얘도 참.”
그 말에 상대는 섭선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미 내가 쫓는 걸 눈치채고 자신의 동료와 함께 함정을 파는 아이를 어찌 단순히 운이 좋다고 말하겠니? 당장 지금도 내가 여유를 부리는 걸 눈치채고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것을.”
“……!”
다 눈치채고 있었다고?
“게다가 말이지.”
놀라워하는 자신의 앞에서 상대는 눈가에 호를 그리며 말했다.
“이미 나를 만난 시점에서, 네 운이 나쁘면 나빴지. 좋았을 리 없잖아?”
“…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빠지는 말들에 이를 악물고 있자니, 상대가 돌연 물어왔다.
“그런데 말이지. 그래도 모르니 제안 정도는 하나 해볼까 한단다.”
“…무엇을 말입니까?”
“얘는 참, 알면서도 그리 말한다.”
재미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반응하며 상대는 섭선 끝을 쭉 뻗어왔다.
“그거. 뭔지 모르겠지만 얌전히 넘기렴. 그럼 고통 없이 보내주마.”
“…보통 그런 제안을 하시려면 살려준다거나,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영입 제안을 하지 않으신가요?”
“에이, 화근을 남겨둘 수는 없잖니. 게다가, 네가 어디 들어오란다고 들어올 아이겠니? 내 눈에는 죽어도 내 밑으로 들어올 것 같지는 않는구나.”
소름이 끼쳤다.
‘미치겠네.’
상대는 오만할지언즉, 방심은 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상위 포식자나 다름없는 맹수가, 한낱 토끼를 사냥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 듯한 모습.
군인으로서는 귀감이 될 만하지만, 상대로 만나니 악몽이 따로 없다.
“그래서, 어쩌겠니?”
“당연히 거절입니다.”
“후후, 그럴 줄 알았단다.”
팟!
예상이나 했다는 듯 웃음과 동시에 그의 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졌다.
동시에 말머리에 강철로 된 섭선의 부챗살이 날아와 꽂혔다.
“히히힝!!”
단말마와 함께 군마는 죽어 나자빠졌고, 그 몸부림에 위에 타고 있던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 도망칠 곳은 없단다.”
“…가뜩이나 말만큼 빠른 사람이.”
혹시나 도망칠 경우의 수를 막아서듯 말부터 죽여버린 상대는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요대를 풀어헤쳤다.
요대인 줄 알았던 그것은 한 손에 드니 낭창낭창한 연검(軟劍)이 되었고, 그것을 꼬나 쥔 상대는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왔다.
서걱!
“……!”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진 검에 가슴팍이 베이며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 그건 뭐니?”
“큭!”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팍에서 옷이 베이고, 그 사이 구멍으로 두 조각난 철판이 떨어져 내렸다. 여별의 목숨이라 생각하고 구비해 둔 한수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소모되었다.
“재밌네. 실전파 군인들의 잡기술이니? 그런데 벌써 소모되어서 어떡해?”
깔깔 웃음을 터트린 환관은 이내 머리 뒤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아와 잡히는 화살이 한 대.
“우후후, 상대를 방심시킴과 동시에 뒤편에서 기습? 하지만 너무 뻔하구나.”
아까 갈라졌던 을량이 절벽 위에서 쏴 갈긴 화살이 허무하게 잡힌 것이다.
“뭐, 뭐 저런 괴물이?”
낮은 포복으로 은밀하게 접근해 화살을 갈긴 을량이지만, 그 기습이 수포로 돌아가자 질려버린 표정을 지었다.
그 사실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환관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니. 나는 너희들이 갈라질 때부터 진작 이럴 것을 알고 있었는데.”
“설마… 우리 대화를 들었다는 겁니까?”
“너희, 무림 고수는 처음 보는구나?”
들은 적은 있다. 무림에서 활동하는 무인들은 가히 초인과 같아서, 그들의 오감을 비롯한 신체 능력은 범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이라고.
하지만 분명 수십 장 밖에서 나눈 대화일 텐데 그걸 듣다니…….
“…잠깐, 설마. 그럼…….”
“아, 물론 너희가 만인장이라 불리는 이들과 되지도 않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들었단다. 참 우습더구나. 그렇게 투박한 기막으로 도청을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다니. 황실 정보 기관인 동창을 너무 가소롭게 여기는 게 아니니?”
당장 우리들은 너희 북방 대장군부 휘화를 고위험군으로 판단해 이렇게 금의위의 지원까지 갖춰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에 왔는데 말이지.
첨언하는 환관의 말에 두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래, 뭐 여기까지 왔으니 말 해주마. 사실, 너희들에 대해 크게 기대한 건 없단다. 애초에, 너희가 왜 여기 왔는지. 너희조차 알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거든.”
“뭐……?”
“우리의 대계는 이미 진행되고 있단다. 사실 너희들이 따르는 그 만인장이란 녀석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했는데, 역시 너희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뜻이지?”
“정말 모르는 것이니,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그게 한낱 현실 부정에 불과함을 깨닫는 내게 상대는 말해 왔다.
“뻔하지 않겠니. 너희가 추적당할 위험이 있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밖으로 내빼려는 이유. 하오문인지 뭔지는 핑계일 뿐이고, 너희들이라도 살려보려 했다는 것을.”
“…아.”
친절한 말투로 첨언해 오는 말들은 비수가 되어 박힌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그걸 다 알고도…….”
“그야 당연하잖아?”
그렇게 비수를 쑤셔 박은 상대는 입술을 달싹였다.
“한낱 여흥이지.”
“이… 이익……!!”
오만도, 방심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압도적인 강자가 누릴 수 있는 한낱 여흥일 뿐.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뒤돌아 내달렸다.
“사실은, 살 수 있다면 살려 보내주려 했단다.”
그런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니까, 살 수 있다면 살아보렴.”
그와 함께―
푸욱!
날아든 무언가가 꽂히며―
“아…….”
날개 없는 육신은, 절벽 너머로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