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62화 (262/350)

262화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바닥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전에 절벽 중앙에 준비해 둔 밧줄을 잡고 버텼고, 그곳에 만들어둔 은신처로 몸을 숨기며 살아났다.

“하아… 하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은신처로 도달한 뒤에는 등에 멘 주머니를 벗었다. 이미 가죽은 찢어져 있고, 그 안에 채워 놨던 돌멩이들은 등 뒤에서 날아온 암기에 부딪혀 대부분 부서져 있었다.

“…일단, 살긴 했구나.”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로 세워둔 경우의 수.

그것은 바로 금선탈각의 계였다.

‘일견하기에 중요해 보이는 주머니를 내가 넘겨받는다. 그렇게 나를 뒤쫓게 만들고, 낭떠러지로 유인해 대화로 시선을 끌다 을량 형이 산길 위에서 화살로 저격하는 계책.’

성공한다면 좋은 것이고, 실패한다면 불의의 일격을 받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경우의 수로 넘어간다.

‘무언가 중요한 게 있어 보이는 듯한 가죽 주머니에 넣은 돌멩이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척 은신처에 몸을 숨기는 것이 이 계책의 주요 골자.’

강자를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없기에, 어떻게든 구사일생의 수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계책은 분명 이번 절체절명의 분기점에서 목숨을 구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큭.”

마지막 동창의 환관과 나누었던 대담에서, 상대 역시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호야!!”

잠시 기다리자 은신처 입구 근처로 밧줄이 내려오며 을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겁지겁 뛰어온 을량은 내게 어디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이놈의 금선탈각인가 뭔가 하는 계책은 몇 번을 연습해 봐도 영 익숙해지지가 않으니… 난 진짜 네가 죽는 줄 알았다.”

뒤에서 볼 때는 영락없이 무언가에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꼴이었으니, 연신 십 년 감수했다며 가슴을 쾅쾅 두들기던 을량이 문득 물어왔다.

“그런데, 뭐에 맞은 거냐?”

“이거.”

“그게 뭔… 뭐야, 그거 비녀 아냐?”

“맞아.”

환관이 던진 것은 비녀였다.

그것도 여인네들이나 착용할 것 같은 금장식 비녀.

“어처구니가 없네. 그걸 던져서 널 날려 보냈다고?”

“그나마 돌멩이들이 완충 작용을 해주지 않았다면 죽었겠지.”

“하… 진짜 무슨 괴물인지.”

절레절레.

혀를 내두르며 신음을 토하던 을량은 이내 손을 내밀어왔다.

“어쨌거나 무사하니 다행이다. 아까 그 괴물은 무슨 일인지 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더니 발걸음을 돌려 돌아갔다.”

“형은 녀석과 내가 나누는 대화를 못 들은 거야?”

“대화? 그러고 보니 뭐라 하는 거 같긴 했는데… 녀석이 뭐라 했냐? 너는 원래 적의 말은 대개 궤변이니 뭐니 하며 안 듣는 쪽인 걸로 알았는데.”

적이 하는 말은 대체로 들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적이 우리에게 진실된 얘기를 해줄 가능성은 적고, 설령 진실이 섞인 얘기를 하더라도 우리에게 도움 될 가능성은 더욱 적다.

그렇기에 적이 하는 말은 문답무용으로 잘라버리고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이롭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

그런 내가 적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먼저 말하자 을량은 기이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평소의 나는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른 것 같아.”

을량에게 그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말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눈을 크게 뜨던 을량은 종국에 달하니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그 말은… 곧 대장군부에서 사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지.”

“이런 젠장!!”

“어디 가려고?”

“몰라서 물어? 당장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뭐 하게?”

“…뭐?”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 우리가 돌아가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미 만인장들은 우리 생각을 앞서 있고, 그 말은 대장군께서는 한참 전에 이 모든 걸 예상하셨다는 뜻이야.”

괜히 동창 제독 앞에서 우리들의 임무를 숨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때 잘 몰라도 일단 장단을 맞춘 것은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

물론, 이 모든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지만―

“…윤호야.”

세상만사가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내가 지금 혹시 착각했을까 봐 묻는 건데, 네 말은 우리가 가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으니, 얌전히 중원으로 내려가 지원 요청을 하자는 거냐?”

이를 바득바득 갈려 물어 온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설마설마하는 당황과 분노가 꾹꾹 눌러져 뱉어진다.

그것만으로도 대답했을 시 돌아올 반응은 뻔하지만,

“…정확해.”

“웃기지 마!!”

펼쳐질 미래를 뻔히 알면서도 내뱉은 답은 곧 뻔한 분노와 함께 되돌아왔다.

“네가… 네가 냉철한 녀석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 어쩌면 지금 네 말이 최선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딴 것을 따질 줄은 몰랐다.”

“형…….”

몹시 흥분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을량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심호흡 몇 번으로 애써 분을 가라앉힌 을량은 목구멍에서 뱉어지려는 말을 애써 되삼키며 허리춤에 찬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최선일지 모르는 수준이 아니라 네 말이 아마 최선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최선을 택하고 싶지 않아.”

“…가려고?”

“같이 가 달라고는 하지 않으마. 너는 이 길로 중원으로 남하해라. 네 말마따나… 정말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누군가 하나는 중원에서 만에 하나 존재할지 모를 가능성이라도 찾아야 하니까.”

단지, 그게 내가 아닐 뿐.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을량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을 때―

“…같이 가.”

결국, 내뱉고 말았다.

“응?”

“형 혼자 가면, 무조건 죽어.”

“너 이 자식…….”

어리석은 선택인 것을 안다.

하지만 어찌할까.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을.

“그래도 나랑 같이 가면, 살아남을 확률이 일 푼… 아니, 일 리는 붙겠지.”

“핫… 이 자식, 진짜 형님에게 말하는 말본새하고는.”

결국 참지 못해 웃음을 터트리는 을량과 함께 절벽을 타고 올랐다.

올 때는 두 마리 말에 나눠 타고 왔지만, 그중 하나가 죽어버린 이상 한 마리 말에 둘이서 같이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가자.”

우리는 곧장 말을 타고 달렸다.

양동작전을 펼치느라 거칠게 몰았던 말은 하필 운반해야 할 인원이 두 배로 늘어버렸기에 그 발걸음이 더뎠지만, 우리는 애써 말을 독려하며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어쩌면, 우리가 알아낸 이 정보가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러나,

“…아.”

저 아래, 북방의 군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보고 말았다.

“…아아… 아……!!”

거대한 화마에 집어 삼켜져, 활활 타오르는 막사들을.

“이런 젠장!”

늦었다.

늦어버렸다.

아니, 사실은―

‘당연한 것… 이었다.’

짐작할 만한 정황 증거들은 넘치도록 있었다.

대놓고 추적이 붙은 것이나,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환관이 굳이 사실을 전부 일러준 것.

내가 절벽에 떨어진 뒤 굳이 확인 사살을 이행하지도 않고, 또한 을량 형이 절벽 위에 있는 걸 알면서도 휘적휘적 돌아가 버린 것.

그 모든 것이―

‘이미, 전부 끝이 난 것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윤호야!!”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몸은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냉철해야 한다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일수록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생각했다.

하나, 현실에 부딪쳤을 때 그게 얼마나 가망 없는 망상인지 절절히 실감했다.

타오르는 군영, 여기까지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알던 이들의 비명이 고막을 때릴 때, ‘나’의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 개자식들아!!!”

빠르게 거리를 좁힐수록, 적들의 모습이 더더욱 선명해졌다.

대부분은 북방에서 흔히 보기 힘든 정규군 갑주를 찬 이들이었고, 그 가운데 사이사이 비단옷을 입은 이들이 북방의 군인들을 향해 병장기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금의위, 동창!!’

그들의 숫자는 북방군보다 현저히 적었으나, 하나하나가 착용한 무장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고, 특히 동창의 환관으로 보이는 자들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산보하듯 여유로이 걸으며 북방군을 거꾸러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죽어라!”

화려한 갑주를 착용한 채 말 위에 올라탄 하나의 금의위가 거대한 월도를 들어 올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주변엔 이미 북방군의 시체가 여럿 쌓여 있었고, 바로 앞에 있는 이는 마침 익숙한 이였으니-

“이놈!!”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느끼며 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어 있는 힘껏 투척했다.

푸욱!!

“커헉?!”

거병을 들어 올린 상태인지라 빈틈을 드러내고 있던 금의위 소속 장수 하나는 자신의 가슴 앞으로 비쭉 튀어나온 칼날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뒤통수에도 눈을 달고 있어야지.”

재빨리 장수를 걷어차 쓰러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을 탈취했다.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던 북방군 병사 하나가 그런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자, 장군님!”

“괜찮나, 몽휼?”

그는 내가 이끄는 부대에 속한 병사였다.

“더… 덕분에 목숨은 구했습니다!!”

“그럼 됐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나는 밖에 나가 있느라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른다. 가장 중요한 내용만을 보고해라.”

“그, 그게…….”

당황해 마지않는 몽휼이었지만, 이내 내 휘하에 있던 병사답게 자신의 뺨을 세차게 두들기더니 대답했다.

“자세한 것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귀 이후 저희의 군영에서 대기하며 신변 정리 중에 갑자기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저들 금의위와 동창에서 왔다는 이들이 갑자기 군영의 통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가만히 있으면 끝난다는 말과 함께 대장군께 가는 길을 막아섰습니다.”

“너희는 대장군께 가려 했고?”

“그렇습니다. 윤호 장군은 물론 을량 장군도 보이지 않아 그곳에 있으리라 짐작해 길을 뚫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구나.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금적금왕.

‘저들의 최우선 목표는 역시…….’

“윤호야!!”

어느 정도 다음 행보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허겁지겁 뒤따라온 을량 형이 숨을 헐떡였다.

“이게 대체…….”

“형.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저들의 최우선 목표는 대장군이야. 대장군을 구하러 가야 해.”

“…젠장, 숨 돌릴 틈도 없구만.”

마땅한 설명도 없었지만 을량 형은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고쳐잡았다.

“말은?”

“몰라, 인마.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데려오지도 못했다.”

“그래? 그럼.”

나는 곧장 품에서 지니고 있던 비수 하나를 꺼내 저편에서 싸우고 있던 금의위 병사 하나의 등판에 내다 꽂았다.

단말마와 함께 병사는 바닥으로 거꾸러졌고, 그로써 없던 말이 두 필 생겨났다.

“…비도술은 언제 익혔냐?”

“어쩌다 보니.”

하나는 장군이 타던 말이고, 하나는 병사가 타던 말.

비록 급의 차이는 있었지만, 둘 다 금의위 소속 군마답게 관리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가자.”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는 내 증오를 볼 수 있었다.

그 증오를 씹어 삼킨 후 말을 뱉었다.

“대장군을 구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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