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세상은 나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볼 부모의 웃음은 물론,
어릴 때 가장 즐겨 입었다고 기억할 의복 한 벌도,
유년기의 즐거운 추억조차.
남들이 당연하게 떠들 것들을 난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사실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내가 자라온 곳은 전화(戰火)에 휩쓸린 곳이었으며,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제법 볼 수 있었던 곳이니까.
반복되는 불공평한 일은, 어느새 그 사실에 분노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태어났기에 살아갔고 죽지 않았기에 그저 살아갈 뿐인 삶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람이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무뎌지지도 않는다. 굽혀지더라도 펴지는 것이 사람이고, 부서지면 또다시 나아 나아가는 것이 사람이지.”
그리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난 한낱 도구 따위가 아니라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비록, 아직도 그가 해준 모든 말들이 이해 가는 것은 아닌지라 많은 것들의 의뭉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모든 것이 사그라지게 둘 수 없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북방.
그 황량한 대지 위에서 세상에 내몰린 이들에게 하룻밤 포근함을 선사해 주었던 막사들이 불길 속에 타들어 가고 있다.
시간은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 가는데도, 온 세상을 밝히는 불꽃은 오히려 더더욱 그 세를 키우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만 같았다.
“윤호! 속도를 늦춰!!”
“…….”
“전열을 유지해야 한다고!!”
뒤따라오는 을량이 무어라 소리치지만, 귀에 잘 닿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 따위 없어.’
전열을 갖출 여유 따위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순간의 돌파력.
일대를 전부 뒤덮으며 넘실거리는 거대한 불길을 꿰뚫고 나아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달려라! 다른 무엇도 생각할 것 없이 내 뒤를 따라 달려라!”
스스로가 화살이 된다.
시위를 떠나 쏘아진 화살처럼,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한 발의 화살이 되어야 한다.
“따라붙어!!”
“뒤처지지 마라!”
뒤쪽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내가 이끌어왔고, 나와 함께 대장군의 뒤를 따랐던 이들이다.
그들이 함께 한 발의 화살이 되어 종횡무진 막아서는 이들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렸다.
“북동편 이상 발생!”
“한 무리의 집단이 빠른 속도로 접근 중!”
그런 우리를 발견한 이들이 소리 친다.
금의위를 필두로 한 환관들이 듬성듬성 섞인 이들.
창칼이 앞으로 내밀어지며 방어 진형을 구축하려 하지만―
‘그전에, 돌파한다!’
이곳은 이미 전투가 벌어진 혼란스러운 전장.
제아무리 조련된 부대일지라도 재정렬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우리들은 이미 쏘아진 화살과 같은 기마 부대였다.
“뚫어라!”
군진이 완성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강행 돌파.
무수히 이어지는 쇳소리 사이를 가로질러 오로지 목표만을 바라본다.
그 끝에―
‘보인다!’
드디어, 이 혼란의 전장 속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곳이 보였다.
이전까지 상대했던 이들이 일개 병졸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듯, 느껴지는 대기의 밀도마저 다른 진정한 사지(死地)!
최소한 만인장(萬人將) 정도는 되어야 그 자리에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그런 사지가 보였기에,
구우웅―
나는 있는 힘껏 검병을 쥐고, 그 안에 투박한 내공을 담았다.
그리고,
“길을 비켜라!!”
온 힘을 다해―
구우우우우웅!!
내던졌다.
* * *
때로 현실은 도저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너무나 압도적인 폭거가 들이 닥쳐와, 꿈속에서처럼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운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분을 체감시킬 때는 이게 질 나쁜 악몽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흐음?”
아직은 삼십 장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을 텐데도 그 너머에 있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주어 내뱉은 것도 아니고, 그저 흥미가 동한다는 듯 흘린 얕은 콧소리에 불과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 들렸고, 그 소리를 내뱉은 이는 이쪽을 돌아보며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이 내가, 말을 타고 달려오며 실었던 온 힘을 다한 검을 향해.
그러자,
턱!
“……!!”
놀랍게도, 투박한 내공은 물론이요, 온 힘을 다해 실은 검병이 마치 실이라도 달린 듯 날아가 상대방의 손에 잡혔다.
‘저자는!’
기억이 있다.
화려한 의복과 기이하게 느껴지는 외모.
남성과 여성의 중간에서 섞인 듯한 목소리.
그러니까,
‘대장군의 곁에 서 있던… 동창의 제독!!’
이 모든 일의 주범이 바로 저기 있었다.
“으아아아!!”
말 안장에 묶여 있던 예비용 철검을 뽑아 들고 달렸다.
그와의 거리는 삼십 장여 정도지만, 그 사이에 놓인 이들은 일백이 넘으니 갈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한데,
“오게 두어라.”
제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막아설 줄 알았던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나뉘어졌다.
‘어째서?’
의아했지만 굳이 그 연유를 따지지는 않았다.
어디 있는 자들의 변덕이 하루 이틀 일이던가?
내 모습이 부나방 같아서 우습든, 당랑거철의 고사를 보아 유쾌하다 여기든, 어쨌거나 내게는 한 번의 기회가 생긴 것이니 고사하지 않고 써먹기로 했다.
그렇게 그와의 거리를 일장 안으로 줄이는 순간―
“그만.”
우뚝―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미증유의 거력이 내 전신을 옭아맸다.
사력을 다한 돌진이 허무하리만치 멈추고, 내밀었던 검극은 고작해야 세 치 앞에서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흐으…….”
미간 바로 앞까지 드리운 검극, 그 끝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는 동창의 제독이 입을 열었다.
“우후후, 제법 아끼는 아이인가 보군요.”
그리고는, 어느새 한 치 앞까지 드리워졌던 손끝을 내 목전에서 치워 내며 웃었으니―
“대장군께서 이런 변덕을 부리실 줄이야, 실로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목전에 닿아 있는 거대한 언월도를 바라보면서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신 것인지요?”
“…….”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건 어느새 내 주변으로 수십의 금의위가 포위 태세를 갖추어서도 아니었고,
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수 없는 괴물 같은 놈이 목전에 언월도가 들이 밀어져서도 아니었다.
그건,
“대장군… 어째서?”
나를 멈추어 서게 만든 이 기의 운용이, 대장군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감. 내 부탁 하나만 하겠네.”
“우후후, 어찌 소인에게 ‘부탁’이나 되는 것을 하시는지요.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주시지요.”
“이 늙은이의 목을 주겠네.”
“…흐으?”
옆으로 가늘고 길게 호를 그리고 있던 던 동창 제독의 눈이 번뜩였다.
“제가, 지금 잘못 들었는 것…….”
“대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은 아닌가 보군요?”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후후, 천하의 대장군께서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다니. 저 아이가 과연 특별하긴 한가 봅니다.”
동창 제독이 옆에서 무어라 떠들었지만, 내 귀에는 잘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흘려듣는 것은 대장군도 마찬가지.
이 순간에도 웃고 떠드는 동창 제독의 목에 겨누었던 언월도를 거두어들이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이 고집불통 녀석. 세상으로 내보냈더니, 기어이 이 황량한 땅으로 돌아왔구나.”
“대, 대장군! 역시 저희를 보내신 건…….”
“다 알면서 왜 묻느냐. 생목숨 죽이는 것보단 살리는 게 낫다 싶었고, 너희들은 아직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다 싶었기에 살리고자 했음이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
담백하게 우리들을 빼돌리려 했음을 시인하는 대장군의 모습에 가슴이 더욱 먹먹해졌다.
“어째서…….”
“어째서 너희냐고? 혹시나 그렇게 묻고 싶다면 전부 착각이니라.”
“…예?”
“딱히 너희라서 살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지. 어디 너희들이 따라다녔던 이 늙은이가 누구 하나 편애하고 그러던 노괴더냐?”
“그건…….”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기에는…….
알 수 없는 의구심이 차오르는 그때,
“하지만 그렇다 하기에는 이 늙은이가 변덕이 생기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더구나.”
돌연 대장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간 지켜 보아온 너희라면, 이 세상을 조금 더 낫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더구나.”
“저, 저희가 말입니까?”
“그래. 내가 아닌, 너희가 말이다.”
“어찌 저희 따위가……!”
당치도 않은 말.
허겁지겁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윤호야.”
대장군은 주름진 눈가를 더욱 주름지게 만들며 웃었다.
“나의 천명(天命)은 여기까지니라.”
“…예?”
“북방에서 태어나, 한평생 이 땅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그 끝을 맞이하는 게다.”
“대장군!!”
“이놈아, 머리 울린다. 소리 지르지 말거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대장군이 여기서 죽어야 하고,
그럼에도 대장군은 이리도 담담한지.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대장군은 말했다.
“윤호야, 중원으로 가거라. 모른다면, 가서 배우고 알아내거라. 나의 천명은 여기서 다하였음이니, 너의 천명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거라.”
“대장군……?”
“내게 실로 많은 불만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참 많은 것을 가졌을 내가 어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실망했겠지. 그럼에도 여기까지 참고 따라와 주었으니, 실로 고마울 따름이다.”
턱―
굳은살이 짙게 박인 손이 머리 위를 덮었다.
“그러니 살거라. 너의 천명을 찾아, 그것을 행하거라.”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대장군! 장군께서 하시면 되시지 않습니까! 저보다, 저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대장군께서 직접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나는 할 수 없다.”
“예……?”
고개를 내리누른 손에 위를 볼 수 없었지만, 대장군은 어느 때보다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너는 할 수 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렇단다. 내가 보아온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게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버린 대장군께서는 할 말을 다 한 듯 뒤로 물러섰다.
“기다려주어서 고맙소, 대감.”
“너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다만… 소인은 지엄한 황명을 다 하기 위하여 머나먼 이곳, 북방까지 온 몸. 조금 전 대화를 그저 흘려들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내게 거대한 살기가 드리웠다.
‘이, 이게……!’
살기의 진원지는 당연 동창의 제독으로부터였다.
자연체의 상태로 서 있음에도 흘러나오는 기세가 자연스레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었다.
항거할 수 없는 무력감.
맹수 앞에 놓인 토끼처럼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런데 그 순간―
“거기까지.”
한 자루 언월도가 들이 밀어졌다.
자연스레 시야가 가려질 때, 대장군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그대 역시 이곳에 가만 있는다. 그것이 우리의 약속이 아니었는가?”
“우후후… 설마, 그 약속을 이리 쓰실 생각이었습니까?”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곧 천태만상(千態萬象)일진데, 내 어찌 모든 것을 예측할까.”
“훗, 군략으로는 천하 삼대 대장군 중 제일이라는 분께서 하실 변명으로는 너무나 조잡스럽군요.”
구구구…….
대기가 요동쳤다.
두 명의 거인(巨人)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