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두 명의 거인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서로 경쟁하듯 부딪치며 저 하늘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기둥이 되었다.
갑작스레 생성된 용오름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앗아가기에 충분했으니, 그 중심에 서 있던 대장군은 자신의 언월도로 강하게 바닥을 두들겼다.
“선언한다!”
대장군의 우렁찬 함성이 장내를 휩쓸었다.
“지금부터, 그 누구도 이 일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선포였다.
대륙의 북방을 지키던 수호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선언하는 외침이었다.
그 누구도 흘려들을 수 없는 엄중한 경고였고, 장내에 있던 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일백이 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조금도 쇠하지 않는 기백.
나 역시 그 기백에 눌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뭐 해! 가야지!!”
어느새 뒤따라온 것인지, 을량 형이 말 한 필을 끌고 오며 소리쳤다.
“혀, 형?”
“대장군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빨리 올라타!!”
을량 형의 다급한 외침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때,
“어딜 감히!!”
금의위 하나가 장창 한 자루를 꼬나쥐며 달려들었다.
일개 금의위 사병이 아닌지, 최소한 만인장 급의 기세를 뿜으며 달려오는 상대가 창극을 날카롭게 세우며 소리쳤다.
“분란의 종자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헉?!”
나를 구해 달아나려던 을량 형은 상대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는 바람에 딱딱히 굳어버렸고, 우릴 태워야 할 말은 비명을 지르며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야말로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멈춰라.”
동창의 제독과 대치 중이던 대장군이 선 자리에서 언월도를 휘둘렀다.
콰콰쾅!!
“크헉?!”
그러자 수십 장 길이에 달하는 강기가 날아들어 금의위가 있던 자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강기 세례.
모두가 그 무시무시한 위용에 놀랄 때,
짝짝짝.
“우후후, 과연 대장군이시군요. 세월의 흐름이 홀로 비켜 간 그 모습이 실로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동창의 제독은 놀러 나온 아이처럼 웃으며 박수를 칠뿐이었다.
“대감은… 구경만 하실 텐가?”
“잔뜩 독이 오른 독사에게 구태여 덤벼들 이유가 있겠습니까?”
“기어이 부하들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군. 하지만… 겨우 이 숫자로 되겠나?”
황궁의 특사를 핑계로 대장군 막사 심부까지 파고들어 역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그들이지만, 절대적인 인구수 부족은 어찌 메울 것인가.
그리 묻는 대장군의 질문에 제독은 더더욱 환히 웃어 보였다.
“글쎄요. 제가 가지고 놀 장난감들이, 고작 이것뿐이라 확신하실 수 있겠습니까?”
“뭐? 자네, 설마?”
“북방의 이민족. 요즘 동태가 심상치 않더군요. 누가 그들을 움직였을까요?”
“이런… 자네 진정 제정신인가? 그들을 끌어들여 이 늙은이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할 생각인가!!”
“후후, 그건 대장군께서 생각할 것이 아니지요. 자, 사담이 길었습니다. 이제 곧 초대받은 손님들이 몰려올 텐데, 연회장이 너무 번잡해서야 초대한 입장에서 면목이 없지 않겠습니까?”
짝―
“뭐 하느냐, 어서 정리하지 않고.”
광기 어린 미소가 절정에 달하고, 금의위와 환관들이 일제히 대장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큭!! 젠장, 미안하다, 윤호야. 다리가 풀려서!!”
혼돈의 전장.
그 혼란스러운 와중 을량 형이 엉금엉금 기듯이 내게 다가왔다.
“가자!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혀, 형? 대, 대장군이… 대장군이……!!”
“젠장. 미안하다!”
짝―
번개가 일었다.
시야가 순간 흔들렸고, 눈을 떠보니 얼얼한 감촉이 뺨 어귀에서 느껴졌다.
“이, 이게…….”
“정신 차려! 우린 슬퍼할 여유도 없어!”
슬퍼할 여유도 없다.
그 말이 절절히 다가왔다.
‘그래… 맞는 말이야.’
있는 자들을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만, 없는 이들에겐 그럼 감정의 소모조차 사치였다.
“가야지… 그래, 가야지…….”
“정신 차렸냐? 젠장, 뺨 때려서 미안하다. 일단 살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가자!”
을량 형은 혹시라도 내가 주저앉을까 봐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됐어……. 나도 뛸 수 있어.”
“그런 말 할 시간에 뛰어!”
아비규환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
대장군이 스스로의 진면모를 드러낸 덕에 다른 북방군의 병사들도 이 난전에 뛰어들었고, 밤을 밝히고 있던 횃불들이 넘어지며 여기저기에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람 그림자가 어지럽게 얽히는 난리통 속에서 우리는 이렇다 할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밖으로 향했다.
그때,
“어머, 여기서 다시 만나는구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소란스레 울려 퍼지고,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귀 아프게 터져 나오는 곳에서도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진원지에는 주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홀로 유유자적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당신은……!”
“이번이 두 번째구나. 악연도 연이라면 이름이나 알려줄까?”
나를 절벽 너머로 떨어트렸던 동창의 환관!
“광효라고 부르거라. 물론, 그것도 이제 마지막이겠지만.”
그가 자신을 소개하며 나타난 것이다.
“나도 같은 이의 목숨을 두 번이나 노릴 줄은 몰랐단다. 내 생에 두 번 없을 경험을 하게 해주어 고마울 따름이야. 그러니, 고통 없이 보내주마.”
“고통은 개뿔. 저리 안 꺼져?!”
“후후, 절벽 위에서 화살을 쐈던 아이구나. 겁도 많은 것 같은데 그렇게 나대도 되겠니?”
“웃기고 있네. 안 나대면, 살려줄 생각은 있고?”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단다.”
“그럴 줄 알았다!”
버럭 소리친 을량 형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발악하는 것과 같은 행동.
‘안 돼!’
깜짝 놀란 내가 뒤이어 달려들려 했으나―
“입담도 그렇고, 칼 솜씨도 그렇고. 네 동생만 못하구나?”
어느새 을량 형의 목전까지 접근한 환관, 광효가 잔혹하게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쩌엉!
“커헉!!”
“형!!”
단 일수에 피 분수를 내뿜으며 나가떨어졌지만, 그 상태를 확인하러 갈 여유도 없었다.
다음이 내 차례임은 뻔했으니 이를 악물며 자세를 취했고, 예상대로 광효는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로 내게 접근하며 말을 걸어왔다.
“너는 좀 더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구나.”
“이익!!”
진정 악의로 가득 찬 미소에 가진 내공을 전부 담아 철검을 휘둘렀다.
무쇠라도 자를 듯한 검기를 심은 검격!
하지만,
까앙―
‘뭇……!’
“좋은 표정! 나는 사람이 절망에 빠진 표정이 좋더라.”
사람의 손과 검이 부딪쳤건만, 부서진 것은 검 쪽이었다.
수도로 검날을 깨부순 광효는 연격을 이어 가지 않고 내 표정을 빤히 바라봤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내 모습을 관찰하고 싶다는 악의가 가득 담긴 그 모습에,
‘흡……!’
반파된 검병을 놓으며, 더 안쪽으로 다가가 팔꿈치를 휘둘렀다.
“호오?”
불의의 기습이라 여겼지만 광효는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예상한 노릇. 발끝으로 땅을 걷어차며 흙을 뿌리고, 손아귀를 펼쳐 그의 안면부를 할퀴었다.
‘한 방이라도.……!’
하나같이 사각을 노린 기습들이었지만,
“너, 칼질보다 주먹질이 더 재능이 있구나?”
“컥……!”
“그래도 여기까지란다.”
그 전부를 가볍게 피해 낸 광효는 그대로 성큼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버둥버둥.
지면에서 떨어진 발이 덧없이 흔들리고, 나를 들어 올린 그가 씨익 미소 지었다.
“진작 이쪽을 팠으면 제법 빛을 봤을 텐데.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히느라 대성이 늦었어.”
“닥… 쳐……!”
“훗.”
저 짜증 나는 면상에 한 방이라도 갈기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봉쇄되었다.
“말 안 듣는 녀석이야. 조금 얌전해지면 좋겠는걸.”
“웃기지… 컥?”
푸욱―
서늘하고 뜨거운 감각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유, 윤호야……!!”
하단전을 꿰뚫는 끔찍한 고통.
“…커헉!”
“이제 좀 얌전해 졌으려나?”
피 묻은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는 광효의 시선이 번들거렸다.
“이 개자식아……!!”
을량 형이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들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손 놔, 이 새끼야!”
휘리릭―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세찬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흠……?”
그 검기는 무척이나 날카로워서 광효 역시 내 목을 잡은 손을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용 장군님!!”
만인장 태용의 등장이었다.
“몰골을 보니 괜찮냐고는 도저히 못 묻겠군. 애 챙겨서 도망쳐라.”
“하, 하지만 장군은…….”
“어서!!”
우리 못지 않게 엉망진창인 몰골의 태용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길을 막을 테니 우리에게 도망칠 걸 재촉했다.
“큭… 죄송합니다!!”
“어머, 누가 보내 준다고… 이크.”
부웅―
우리를 잡으려던 광효였으나 태용의 검격은 매서워 그의 추격을 허용치 않았다.
몇 번 더 시도해 보던 그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태용을 마주했으니―
“으후,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닌데.”
“다행이군. 나 역시 당장이라도 네 상판대기를 갈아버리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말하는 본새하고는.”
그 틈에 나를 들쳐업은 을량 형은 죽어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혀, 형…….”
“꽉 잡아! 아니다, 대충 잡아도 돼! 걱정 마,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든 나를 살릴 거라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괜찮…….’
눈이 점점 감겨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일까?
무언가가 흘러나가는 듯한 감각 속에, 의식은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다.
* * *
“……!”
정신을 차렸을 때 깨달은 것은 내가 짙은 약 향으로 가득한 어느 동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 죽은 건가?’
죽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상황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일어났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을량 형?!”
“그래, 나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거나 을량 형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둘 다 목숨이 무사하다는 것을 뜻하니까.
“형,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고? 우리 둘 다… 자, 잠깐… 형?”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떠오르는 의문들을 참지 않고 쏟아냈다.
아니, 정확히는 쏟아내려 했다.
“그, 그 손……!”
피범벅이 된, 을량 형의 손을 보기 전까지는.
“흐… 뭘 그렇게 놀라냐? 누가 보면 사람 죽기라도 한 줄 알겠네.”
“그 손… 어, 어떻게 된 거야?!”
“뭐… 보는 대로다.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필 눈먼 화살이 날아와서 말이야.”
쩝― 하고, 그저 운이 없었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형이었지만,
“뭐가 보는 대로야!! 그 손… 그 손……!!”
다시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그 말은 차마 뱉어지지 못하고 내려갔다.
그런 내게, 을량 형은 그나마 멀쩡한 반대쪽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래, 인마. 우리 둘 다 겁나게 운이 나쁘다. 태어나길 둘 다 천애고아로 태어나서는, 노예병으로 팔려서 남들 다 즐기는 이팔청춘에 전쟁터만 전전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러다가 이제 겨우 자리 좀 잡고 팔자 폈다 싶으니 웬 범국가적 음모에 휩싸여버렸지.”
기구해도 이렇게 기구할 수가 있나.
“한 놈은 팔 병신이요, 한 명은 다리 병신이 되어버렸으니. 이건 뭐 하늘이 우리에게 사람 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삶이 곧 악운의 연속이니, 하늘이 이리도 야속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잖냐.”
“…형?”
“야속하고 더러운 세상이지만, 마냥 또 야속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더냐.”
을량 형은 웃었다.
“천애고아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형제 한 놈씩은 건졌다. 겨우 잡았다 싶은 자리는 씨도 없는 놈들에게 다 털렸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맨몸으로 쫓겨난 건 아니잖냐. 배울 것도 많이 배웠고, 이 근본 없이 빌어먹던 놈들도 한 가족이라 여겨준 이들에게 넘겨 받은… 그런 것들이 있잖냐.”
환히 웃고 있는 을량 형의 어깨가 엷게 떨렸다.
“형…….”
“그러니까, 우린 살아가야 된다. 그래, 우린 살아가야 해.”
이 빌어먹을 삶.
죽지 못해 살아남은 이들의 업이란 그런 것이니까.
“가자, 하오문으로. 다행히도 실직자 신세는 면했잖냐.”
을량 형은 내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거기도 사람 취급 못 받는 꼴은 똑같다더라. 그러니까, 다시 올라보자. 거기도 대장군 같은 괴물이 있지는 않을 테니, 이번엔 그 정점을 향해 기어올라 보는 거야. 어때?”
“하오문의… 정점?”
“그래, 설마 손 병신이랑 일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
“저, 절대 아니지!”
씨익 웃는 형을 보며 나도 억지로 입꼬리에 힘을 주어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해보는 거야. 그 정점에 올라서, 한번 다 뒤집어보자고.”
지금은 도망치지만, 언젠가 와신상담하여 다시 돌아오리라.
그렇게 맹세하는 우리는 어느 동굴 속에서 맞잡은 두 손에 힘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