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65화 (265/350)

265화

어느 동굴 속에서 맞잡은 두 손에 힘을 풀었다.

한때 굳은 맹세를 나누었던 손은 더 이상 같은 것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이제 시체가 되어버린 이가 어찌 살아생전처럼 손을 맞잡고 맹세를 나눌 수 있을까.

“…이제는 가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스륵―

손을 풀자 을량의 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윤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품에서 꺼낸 화골산(化骨散)을 가을량의 시체 위로 뿌렸다.

“…….”

그 뒤로 짧게 고개를 숙였으니, 이제는 세상에 없을 이를 위한 작은 애도를 끝낸 뒤 가져온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였다.

탁탁.

“자영. 바깥쪽의 상황은 어떻지?”

“정천맹의 진법 파훼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고 합니다. 곧 도달할 듯합니다.”

“그래도 영 바보들은 아니란 뜻인가. 그래,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아무도 자신들에게 손을 내뻗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던 우리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기에, 그들에게 줄 가을량의 유산은 하나도 없었다.

화륵―

부싯돌로 피어난 작은 불씨에 가져온 약품을 더하자 곧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그것은 곧 맹렬한 화마로 피어나 이 공간 전체를 삼켜버리겠지.

“가자꾸나,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또다시 가면을 쓰고, 하오문 사천지부장 하윤호로 돌아갈 시간.

그 말에 자영은 망설이다가 우물거리던 입을 뗐다.

“저… 지부장님.”

“왜 그러느냐.”

“언제까지 계속 그런 연기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굳이 지부장님께서 직접 정파 놈들에게 얕보일 이유는 없으시잖습니까.”

“…….”

말끝마다 요 자를 붙이는 웃기는 말투에, 박박 손을 비비며 생존을 구하는 값싼 행동.

하오문도로서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기본 소양을 굳이 지부장인 그 자신이 직접 할 필요가 있는가.

자영의 말을 얼핏 듣기 타당하다 할 수도 있지만―

“글쎄.”

하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가진 정파에 대한 깊은 혐오는 나 역시 잘 안다. 기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너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예?”

“하지만, 정파 전부가 혐오해 마지 않던 위선자는 아니더구나.”

북방을 떠나고 중원 땅에 자리를 잡기까지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과정 중에 겪은 실망스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아, 당장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파란 한결같은 쓰레기 족속이라 여겼다.

그러나,

‘당유혼. 그 사람 하나만큼은 달랐지.’

입으로는 늘상 불공평은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정작 상황이 닥치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공평을 두고 보지 못하는 인간.

‘빈곤하기 짝이 없을 때도, 꼭 하나씩 먹일 입을 몇씩 달고 와서 꾸역꾸역 챙겨 넣는 인간.’

자신을 정파인이라 부르면 스스로를 그런 위선자 놈들이랑 엮냐고 끔찍하다며 혐오스러워하지만, 누구보다 정파다운 인간.

“그런 이들이 아직 있기에, 내가 하오문도의 가면을 쓰는 동안은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 말하며 하윤호는 다시금 자리에서 떨쳐 일어섰다.

“더군다나, 내가 이렇게 홀로 개인의 감정에 젖어 있으면, 그 인간이 나를 가만 놔두겠느냐?”

“지부장님.”

“가자꾸나.”

이제 다시 일할 시간이다.

* * *

“엣취!”

재채기를 했다. 평생 잔병치레 없이 살아온 내가 재채기를 하다니, 이건 역시 마교도의 저주술이 아닐까? 더러운 마교도 놈들, 벌써 나의 정체를 깨닫고 저주를 펼치다니.

“소금이라도 뿌려야 하는데, 에잇, 퉤.”

소금 대신 괜히 땅바닥에 돌멩이를 걷어찼다.

“헥!”

근처에 있던 헥헥― 아니, 무민이가 깜짝 놀라 펄쩍 튀어 올랐다.

“거기 있었냐? 아이고, 미안하다.”

“헥헥…….”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은 헥헥이가 시무룩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큼지막한 왕눈에 물방울이 하나 맺히자 죄책감이 물씬 피어올랐다.

“아, 아니… 내가 진짜 하려 한 게 아닌데…….”

억울함이 잔뜩 차올랐지만,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은 채 빵실거리는 빵뎅이만 흔드는 저 녀석만 할까.

“끙… 괜찮냐?”

조심스레 묻자 녀석은 헥헥거리며 다가와 내 발을 핥았다. 대충 괜찮다는 듯했다.

“그래그래, 너도 참 고생이 많다.”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헥헥이는 다시금 자리로 돌아갔다. 녀석은 내가 지정해준 침상 아래로 들어가 엉덩이를 붙이고 몸을 웅크렸다. 물론, 저래 봐야 활동성 때문에 곧장 방 안을 헥헥거리며 돌아다니겠지만.

‘생긴 건 조그마한데, 활동성은 어지간한 말보다 더 왕성하네.’

처음 데려올 때부터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던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적당히 달랬다.

“조금만 참아라. 곧 마음껏 뛰놀게 해줄 테니까.”

“헥헥!”

이 녀석이 영물은 영물인지, 사람 말을 곧잘 알아듣고 짧은 꼬리가 당긴 빵뎅이를 열렬히 흔들었다.

실로 붙임성도 좋고 나와의 주종 관계가 확실한지 다 잘 따라오는 녀석이지만,

딱 하나―

‘역시 이 녀석의 이름은 무민인가 뭔가 하는 거보다는 헥헥이나 빵실이가…….’

“헥? 헥헥?”

“왜, 왜 그래?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속으로 녀석의 개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때만 되면 벌떡 일어나 불안한 눈빛을 보내오는 건 좀 뜨끔했다.

“이리 와라, 이놈아.”

결국 녀석은 품에 안아주고 적당히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불안한 안색을 지우고 얌전히 몸을 말았다.

누구네 뱃속에 전세 내고 있는 놈이 진작 헥헥이 반만 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통탄을 금할 수 없으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저 아래 깊숙한 어딘가에서 으르르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니 망념은 여기까지만 하자.

청승맞은 사색은 여기까지 하고, 창가로 향해 슬쩍 천막을 걷었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따스한 햇살이 아닌,

“당가는 진실을 밝혀라!”

“정천맹은 진실을 규탄하라!”

열띤 시위대의 비난 소리.

하나같이 멀쩡한 마빡에다 투쟁이니 각성이니 하는 것들이 붉게 적힌 흰 천을 동여매고 있으니―

자신들을 ‘정천의협회’라고 부르짖으며, 진정한 의협을 이루겠다 소리치는 정천맹 속 소모임이 바로 저놈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여기 가둔 새끼들이란 말이지.”

으드득―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리는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 * *

감히 누울 자리를 알아보지 않고 발을 뻗으려는 사파 놈들의 싸대기를 갈겨줬다.

어디선가 또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는 마교도 놈들의 골통까지 분쇄시켜 줬다.

전 중원이 놀라고 온 무림이 경악할 만한 대영웅의 행보가 따로 없다.

하지만 그런 영웅적인 발자취를 걸어온 나의 행적은 세간에 알려질 수 없었다.

“크, 이게 영웅의 비애지. 세상을 구하고도 그 세상이 알아주지를 않으니.”

“…것보단, 그냥 장물 들고 튀신 게 문제가 아닙니까요?”

“어허. 장물이라니!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일 뿐!”

기껏 강남을 구하고 돌아오니 음해 공작이나 퍼부어대는 하오문 지부장 놈. 역시 간악한 사파의 졸개가 아니랄까 봐 초장부터 허튼소리나 하고 있다.

기껏 불러서 와줬더니 영웅에 대한 중상모략만 행하다니.

“이래서 근본 없는 사파 잡것들은 안 돼!”

“…예, 그렇습죠, 제가 다 잘못했습죠.”

결국 하윤호는 얌전히 백기 투항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왜 바쁘신 이 몸을 부른 거냐?”

“그런 것 치고는 좋다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요? 보나 마나 장물 세탁하실 마음에 한달음에 오신 것 같은데…….”

“어허, 장물 세탁이라니! 내가 직접 이 죄 많은 녀석들을 금분세수(金盆洗手)시켜 주려는 거지. 아니, 그리고 니들은 뭐 다르냐?”

마교도 놈들 소굴에서 캐내 온 여러 가지들. 그런 것들은 당연히 그냥은 못 써먹는다.

‘애초에 한 번에 풀리면 대륙 금품의 시세가 휘청할지 모르는 것들이니 적당히 시일을 두고 환전되야 하는 것들이니까. 이 녀석에게 맡겨 놓으면 최대한 제값 받고 팔리겠지.’

대표적으로 야명주나, 야명주라든가 야명주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이건 녀석에게도 분명 돈이 되니까.’

장물 세탁.

당연하지만 이건 세탁해 주는 입장에서도 돈이 된다.

그것도 엄청 많이 된다.

‘괜히 흑상 놈들이 밥 먹듯이 국법을 어겨대며 그 짓을 하겠냐고.’

흑상이 그 머릿수가 가장 적음에도 삼대 정보 집단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 장물 세탁에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걸 이 녀석들에게 맡기는 거니 하오문에서도 열과 성의를 다해 협조할 것은 당연한 노릇.

하지만,

“그렇다고, 니들이 단순히 장물 세… 아니, 금분세수를 위해서만 부른 건 아니겠지.”

그게 오늘 부른 주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요. 소협의 장물 세…….”

“쓰읍!”

“…금분세수도 중요한 과업이지만, 그보다 당면한 문제들이 더욱 많습지요.”

확실히 일을 많이 벌리기는 했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 손으로 꼽기 힘든 수준이라 뭐부터 나올까 싶어 기다리고 있자니, 녀석은 돌연 허리를 숙여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요. 다른 무엇보다도, 본문의 일을 저희 손으로 끝맺게 해드린 것에 대해, 비록 일개 지부의 장이지만 본문을 대표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요.”

“어? 잠깐만…….”

“겸양하실 필요 없습니다요. 이건 분명…….”

“아니, 그게 아니라.”

겸양이 아니라,

“감사는 돈으로 표현하라고. 거, 오고 가는 금전 사이에 싹 트는 정 같은 거 몰라?”

어디서 말로만 하고 입 닦으려고?

“…아, 예. 그렇습죠. 물론입죠.”

“말로만?”

“…장물 수수료의 일 할을 떼어드려야지.”

“흐흐흐,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감사 표시가 좀 되지.”

거래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이것 봐. 확실한 수치와 성분 표기가 되니 신뢰도도 알아서 쭉쭉 늘어나잖아.

하늘로 승천하려는 입꼬리도 좋다고 하더라.

“흠흠. 그래서, 본론이 뭐라고?”

“…본론은 많습죠. 당장 본문의 문주 자리가 공석이 된 만큼, 전 중원에 그 여파가 들이닥칠 겁니다.”

“그건… 꽤 곤란하지.”

구천이라 해도 가장 말석인 데다가, 가장 하류층이 모인 문파의 우두머리가 죽었다는 게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생각보다 꽤 별거였다.

‘다른 말로 하면, 전 중원의 밑바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는 뜻이니까.’

이 넓디넓은 중원 땅에는 수많은 문파가 있어서, 성 하나 건너뛰면 이름도 알기 힘든 중소 문파의 숫자가 기백을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아서 무림 문파라 부르기도 힘든 흑사파 놈들의 숫자는 감히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고 하고.’

그런 놈들을 규합하고 최소한의 규율을 만들어 오던 것이 다름 아닌 하오문이었다.

그런데, 그 수장이 사라졌다?

“다른 것보다 그걸 먼저 수습해야 되는 것 아냐? 너희들 뭐… 지부장 회의 같은 것 안 해?”

문주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시 각 하오문 지부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벌인다. 이 정도 안건이면 충분히 공문이 돌 만한데…….

“물론 이미 공문은 돌았습니다요. 이미 몇몇은 저들끼리 뭉치려는 움직임도 있을 정도입지요. 하지만, 소협께서 신경 쓰실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요. 그것보다는,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셔야 합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윤호는 창가로 걸어가 드리워진 발을 걷어냈다.

그렇게 모습이 드러난 창밖에는,

“…규탄하라!”

“정천맹은 각성하라!”

무수히 많은 이들이 대열을 이루어 아우성치고 있었으니.

그 광경을 흘깃 바라본 하윤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안해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소협, 당분간 봉문에 드시지 않겠습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