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생각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느 곳인지를.
‘정점은 이미 한번 도달해 봤다.’
천하제일독인으로서 정점에 도달해 봤고, 그 길도 알고 있을뿐더러 그 길의 끝에 있는 결과도 알고 있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독인(毒人)의 한계는 진작 깨부쉈다.’
일정 수준 미만의 이들에게만 강한 효과를 발하고, 그 이상의 고수들에게는 위력이 급각하는 독인의 한계.
절정의 경지에만 이르더라도 어지간한 독에 저항력을 가지고,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웬만한 극독조차 내공으로 불태운다.
그리고 진정한 벽을 넘어서면 만독불침에 이르니 독이란 실로 무용하다고 떠드는 이들―
그런 이들의 턱주가리를 돌려주며 독의 위대함에 대해 설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녀석들이 옳았지.’
자기들이 천하 십대 고수니 나발이니 떠드는 놈들에게조차 당가의 독 맛을 보여주며 만인의 인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천마(天魔). 놈에게는 어떤 독도 통하지 않았다.’
당가가 보유한 모든 독과 내가 직접 만들어낸 극독의 배합까지 전부 맛보여 줬음에도 천마는 죽지 않았다.
그를 쓰러트린 것은 우연과 기적의 산물.
그렇기에, 내가 한번 걸어본 길을 좋다고 다시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혼원신공이었고.’
독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이고 다룰 수 있도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위해 이 자리에 혼원신공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그 길을 위해. 마기(魔氣) 역시 받아들인다.’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주변은 어둠이 많이 자리해 있었다.
“역시. 있긴 있었구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원도 없고, 흐르던 지하수도 없으며, 기이한 독물들도 존재하지 않는 곳.
야명주의 빛도 들지 않아 어둠만이 흐르는 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상 공간이라 부르면 되나?”
의식을 침전시키다 보면 도달하는 곳이 있다.
무의식(無意識)의 영역이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내 내면의 어딘가.
이곳이 존재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분히 탐(貪) 녀석 덕분이었다.
‘혼원신공을 처음 익히고, 내 내면에서 녀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지. 그리고 그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머무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즉, 달리 말해 이곳은 탐(貪)의 거처라 할 수 있었다.
“어이, 세입자. 나와서 얘기 좀 하자.”
마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마기(魔氣)가 필요로 했다.
하지만 내 단전은 물론이요, 체내 어디에서도 마기는 존재하지 않는데, 정작 지금까지 마공을 사용할 때 어디선가 마기는 잘도 흘러나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네가 삼킨 것들. 내가 제공한 건데 우리 건실한 노사협정을 진행해 보자고.”
녀석이 마기를 독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
어째, 돌아오는 답이 없다.
“…자니?”
맨날 그 거대한 몸뚱이를 돌돌 말고 게으르게 잠만 자는 녀석이란 건 잘 알지만, 자기 욕만 하면 귀신같이 반응해서 으르렁거리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미동조차 없다니.
“…집 주소를 잘못 찾아왔나?”
대충 둘러봐도 이 공간은 무척이나 방대했다.
전후좌우는 물론이요, 삼십육방이 전부 어둠이라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느껴지는 공간감만으로도 내가 발을 디뎠던 공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십만대산에 올랐을 때 수준인데?’
광막한 어둠 속을 거닐고 있자니 더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참 답이 없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자연스레 깊은 분노가 차오른다.
“아니 이 자식이, 무법 임차인 주제에 집주인이 부르는 데 안 나와?”
자고로 조물주 다음이 건물주라고 하였거늘.
심지어 월세도 꼬박꼬박 안내는 악성 임차인이면서 이렇게 집주인 행차에 꾸물거리고 있다니.
“…….”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그것은 이내 차갑다 못해 낭막한 분위기에 식혀갔다.
“…진짜, 어디 있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광막한 어둠 속 나의 목소리만이 정처 없이 퍼져 갔고, 자연스레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차오른다.
‘설마, 나 미아된 건가……?’
현실이란 부정하고 싶어도 악덕 건물주마냥 찾아오는 법.
애써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보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는 현실이란 놈을 내가 처한 상황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다급한 마음에 일단 달려봤다.
어느 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떨어지듯 솟구치든 뭐든 나오겠지 싶어 한쪽 방향을 정해 달렸다. 비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지만, 초인의 경지에 달한 신체 능력은 방향성을 잃지 않게 해주었고,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은 돌부리도 없어 발이 걸려 넘어질 일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헉, 헉… 더, 더 못해! 나 안 해!”
이 초인적인 신체가 한계에 달할 때까지 뛰고 또 뛰었으나 보이는 게 없다.
이젠 정말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을 때,
“…응?”
문득, 모든 것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주변과는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형체를 인지하는 순간 점점 더 윤곽이 선명해졌고, 그것은 어째서 이제야 발견했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게다가,
“…왜 여기에 저런 게 있는 거야?”
그 생김새도 상당히 특이했으니, 그것의 전체적인 생김새는 일 장이나 되는 거대한 알이었고 온 주변에는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쇠사슬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취향 한번 독특한 놈이구만.’
세상에 유별난 취향을 가진 놈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걸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엮이지 말자.’
저런 놈들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상책.
조용히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을…….
투두둑―
“……?”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공간의 균열이 아니라, 저 거대한 알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였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장난치지 마…….”
투두둑, 두둑―
소리가 커진다.
게다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추가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니겠…….
“…아.”
보인다.
깨진 알의 틈 사이로, 무언가 꾸물꾸물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거대한 촉수.
- 그오오오오오오오!!
“아니, 왜……?!”
틈 사이로 촉수를 빼낸 녀석이 우렁차게 포효한다.
이윽고―
콰아아아앙!!
“이런, 젠장!!”
말 그대로 간발의 차.
내가 있던 자리를 강타한 촉수가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좌우를 돌아본다.
‘나를 찾는 건가?’
이 공간의 어둠은 녀석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는지, 처음 일격 이후로는 날 찾지 못해 멍청하게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훑을 뿐이었다.
‘잘됐다. 보아하니 저놈도 눈이 없는 것 같은데, 이 틈에 도망치면…….’
투두둑―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
거대한 알에 추가로 균열이 생겨나더니, 또 다른 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꿈뻑―
“…내가, 보이니?”
거대한 눈알.
- 그오오오오오!!
그것과 정확히 마주쳤음을 긍정하듯 녀석은 한 번 더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고, 녀석을 감싼 알이 맹렬히 진동하더니 그 안에서 대여섯 개의 촉수가 추가로 뽑혀 나왔다.
“소면 제면소냐? 왜 이렇게 뽑아내!!”
오랜 인심과 전통을 자랑하는 국숫집마냥 끝도 없이 면발을 뽑아내듯 촉수를 뽑아내는 모습에 녀석의 정체를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팔초어. 그놈이 여기 있었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을 휘감은 쇠사슬은 쉬이 끊어질 것 같다.
‘근데 그럼 뭐 해, 저 촉수는 길이가 늘어나는데!!’
콰콰콰콰쾅!!
미친 듯 퍼부어지는 촉수 세례가 주변 일대를 광폭하게 후려치며 반죽 다지듯 다져버렸다.
“…좋아, 해보자 이거지?”
장소가 장소인지라 웬만하면 피하려 했다.
막말로 이곳이 내 내면의 공간인데 내가 멋대로 난리 치다간 그냥 자폭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상황이 그딴 고민은 사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늘 팔초어 숙회로 무쳐주마!”
어차피 한번 썰어본 놈, 두 번은 못썰어 버릴까.
진지하게 놈을 상대하기 위해, 단전 깊은 곳에 잠든 내공을 일깨웠다.
“와라, 단칼에 숙회로… 어?”
뭐, 뭐지?
내공을 일깨우려 했는데, 그래야 하는데…….
‘왜… 내공이 안 움직이냐?’
단전에 있어야 할 내공은 돌덩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싶을 때,
- 그어어어어어어어!!
우렁찬 포효와 함께 촉수 세례가 주변을 뒤덮었다.
“자, 잠깐!! 잠시만!!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겨우겨우 피해 내며 노조 간의 갈등을 타파하기 위한 협의안을 제시해 보지만,
- 그어어어어!!
콰콰콰쾅!!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방망이질뿐.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투쟁뿐이라 소리치듯 촉수를 휘둘러오는 놈의 모습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깐만, 이거 설마 위기 상황인가……?’
천지 사방은 구분도 안 되는 어둠뿐인데, 그곳에서 저런 거대 마수와 내공도 없이 맞닥뜨렸다.
그나마 정확도가 떨어져서 어째어째 피하고는 있지만―
‘저걸 어떻게 다 피해?’
있는 것이라곤 경지에 이른 신체 능력뿐.
하지만 그마저도 내공이 없기에 반푼이 뿐이란 사실이 아득함을 선사해 왔다.
그리고,
- 그어어어오오오오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노로 일그러진 포효를 내지르는 녀석이 추가로 촉수를 뽑아내 주변을 에워쌌다.
희번뜩―
이번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살의 가득한 눈빛.
죽음이란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
- 크르르릉!!
팔초어 마수의 것보다 더한 포효가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동체가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 그오오오오……!!
단순한 내려찍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압도적인 물리력이 주는 충격은 어마무시한 것인지, 팔초어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자체로도 꽤 치명타인 듯했으나, 나타난 거대한 존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알 자체를 단단히 둘러쌌다.
쇠사슬에 둘러싸인 거대한 알은 거대한 동체가 추가로 자신을 휘휘 감아버리자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렀고, 그에 저항하듯 대여섯 가닥의 촉수를 뽑아내 자신의 적을 향해 내리쳤다.
콰콰콰쾅!!
상당한 충격이 왔을 게 분명한 상황.
하지만 거대한 동체의 주인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포악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는,
콰직―
알껍데기 채로,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광포히 물어뜯어 버렸으니―
“세상에나…….”
그 압도적인 모습에 나는 입 벌려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좀 전에 말한 거 취소…….”
탐(貪).
녀석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