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든 세계에서 천마는 홀로 자신의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한 점 자신의 색이 아닌 것에 묻어나지 않은 모습은 이 끔찍한 환상이 현실이 아님을 재차 상기시켜주었다.
그럼에도,
“…천마.”
덜덜 떨리는 이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다.
“정말, 언제 봐도 역겹고… 더러운 면상이구나.”
증오, 분노 그리고 공포.
그에게 가진 감정을 숨기지 않고 토해 내자, 천마 역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그래, 더럽게 오랜만이다.”
영영 보기 싫었건만, 이따위 환상으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저놈 정도 되는 놈이라면 꿈에라도 나와 전날 밤을 악몽으로 오탁시키는 날이 하루 이틀쯤은 우습게 나올 것이라 여겼거늘,
“언젠가 꿈에서 만나게 될 거라 생각은 했다. 그게 하필 이날 이 시점일 줄은 몰랐지만.”
어떻게 심상 공간까지 와서 마수 하나한테 처맞은 뒤에서야 만나는 게 이놈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쯤 돼서나 만날 수 있었던 걸까?
여전히 허망하게 내밀었던 손 말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공간이지만, 입이라도 살아 있어 다행이구나 싶다.
그때, 녀석이 입을 열었다.
“꿈이라. 이게 한낱 꿈이라 여기는가?”
“꿈이 아니면? 아, 개꿈이신가?”
“말장난인가, 아니면 현실 부정인가.”
“뭐래는 거야 진짜. 꿈도 개같으려니 뱉는 말도 개소리네.”
끔찍하다.
빨리 깨어나서 머리 일곱 달린 사족 보행 뱀이랑 싸우러 가야 하는데,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정도라니.
“그렇게도 이 몸이 싫은가?”
“그럼, 좋겠냐? 너는 나 보고 있으면 심신에 안정이라도 찾아와?”
“글쎄. 이 몸은 딱히 그대가 싫지 않느니라.”
천마가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천천히 가까워지며 놈의 모습이 확대되어 갔다.
까득―
자연스레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내가 두려운가?”
꿈이라서 그런가.
잘도 내 마음을 읽어내는 모습에 이를 악물고 이죽거렸다.
“흥! 두렵기는! 이미 한 번 죽인 놈한테 내가 왜 두려움을 느끼겠냐?”
“죽였다라……. 진정 그리 확신하는가?”
“하…….”
미혹(迷惑)이었다.
내가 만들어 낸 꿈이었기에, 녀석은 내가 가진 불안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을 마주쳤을 때부터 끝까지 느껴야 했던 공포도, 마지막 순간 진정 내가 녀석을 끝낸 게 맞나 싶은 의심도.
그 모든 걸 읽어내는 녀석과의 만남은 반칙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한 번 죽였다 했잖아. 듣자 하니 부활한다며? 걱정 마. 그럼 두 번 죽여주면 되니까.”
한 번 죽인 놈 두 번은 못 죽일까.
선언임과 동시에 의지 표명과도 같은 것.
두려움을 떨쳐내고 소리치자, 어느새 성큼성큼 가까워진 녀석은 돌연 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활이라…….”
덧없는 목소리였다.
증오하고, 또 분노하는 나와 달리 녀석의 목소리는 아무런 무게감도 없이 흘러들어 왔다.
“우스운 표현이구나.”
“왜, 내가 못할 것 같냐?”
“어쩌면… 그럴 수도?”
뭐 인마?
도발인가 싶어 인상을 팍 찌푸려 봤지만, 녀석은 하늘을 올려봤을 때처럼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애초에 죽지 않았으니 부활이라는 말도 우습지 않은가.”
“…뭐래는 거야? 너는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놈이다. 나는 분명 네놈 부하들에게 네놈이 부활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 와서 불안 따위로 기억의 혼란을 야기하려 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라고.
단호히 말해 보지만,
“생각은 자유겠지. 하지만, 너라면 모르지 않을 텐데.”
“…….”
나라면 모르지 않는다.
녀석의 죽음을 내 손으로 직접 해냈고, 녀석의 광신도들에게 부활을 획책한다는 소리까지 들었음에도 그것을 틀렸다고 부정한다라.
“…어디 사이비 사교도들의 수장 아니랄까 봐. 사람 홀리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군.”
꾸드득―
더 들어주기도 버겁다.
역겨움에도 정도가 있지.
애써 움직이려 발악하니 이제 두 손의 운신 정도는 자유로웠다.
“의심암귀(疑心暗鬼)라. 네 놈의 귀신 놀음 따위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다.”
그렇게, 어찌하면 저 역겨운 면상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내게 녀석은 말해 왔다.
“그대여.”
여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나는 꾸미지 않는다. 거짓으로 종용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롯이 믿음을 받는 이일뿐, 그것을 증명하는 이가 아니다.”
그건 실로,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음이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 않냐고.
“…이 새끼, 자꾸만 약을 파네.”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지. 구태여 그대가 이 순간을 끝내려 하지 않아도, 우리의 만남은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녀석의 두 손을 마주했다.
그것은 곧 하나의 원의 형상을 그렸으니,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어 보인 녀석이 말했다.
“언제까지 미몽(迷夢) 속을 헤맬 텐가. 반복되는 윤회 속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답이 운 좋게 손에 쥐어지길 바라는가?”
“…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나, 사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에 매달리는 것은 그저 영원한 허무가 아니던가?”
“이놈이 진짜… 그만 안 해? 어디서 자꾸만 약을……!”
주절주절 떠드는 녀석의 입을 막고 싶었다.
어째서일까.
더 듣다 보면 녀석이 한낱 광신도임을 아는 나까지 무언가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서둘러 녀석의 입을 다물리길 바라고 있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 여겼는가? 그렇기에 지키지 못한 것에 매달리는가? 실로 구천을 맴도는 가엾은 넋인지고.”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진다.
“멈춰!! 너 이 자식, 어디로 내빼려고!!”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저 온 곳으로 돌아갈 뿐.”
옅어지는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닌지, 녀석을 구성하던 형체가 점점 입자로 흩어지며 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흩어지는 형상.
이제는 있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 나는 내게 허락된 유일한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오직 홀로 자유로운 그대가 이 기나긴 영겁의 윤회 끝에 답을 내리길 기다리마.
녀석이 남긴 목소리만이 시산혈해의 지옥도 속에 맴돌았다.
* * *
정신을 차렸다.
아니, 사실 그렇게 표현하기도 그랬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검은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듯이 했고, 그것은 단순히 나를 감싼다 수준이 아니라 그냥 내가 존재하는 일대를 휘감고 있었음이니까.
그리고 그 너머 칠흑 같은 공간에서 마주한 것이 하필 얼굴 일곱 개 달린 사족 보행 뱀이니, 이걸 현실이라고 보기에는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진짜, 제일 꼴 보기 싫은 놈한테서 탈출했다 싶으니 하필 나오는 게 네놈이냐.”
- 크아아아!! 흉왕! 힘을 잃은 척 비겁한 술수를 부렸구나!! 당장 우리를 가둔 그 증오스러운 쇠사슬 속에서 나오지 못하겠느냐!!
누가 술수를 부렸다는 거야?
광신도 놈 아니랄까 봐, 지가 믿고 싶은 대로 믿다가 배신당했다 빼애액 소리치는 꼴이 실로 어이가 없지만 구태여 그에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광신도 놈이 괜히 광신도겠어.
해서, 나는 분노하는 대신 손을 곽 움켜쥐어 봤다.
왠지, 이러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자,
크르르르릉―
- 역시!! 내가 다루는 것이었구나, 그 사슬은!!
녀석들을 옭아매고 나를 보호하던 쇠사슬이 굉음을 내며 풀려나기 시작했다.
“…글쎄다. 누구나 마주하기 싫은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더 강해진다더라.”
- 무슨 헛소리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머리가 복잡해졌다.
왜 하필 이때 그런 꿈을 꾼 것이고, 왜 하필 그 꿈의 끝에서 나는 이것들을 다룰 수 있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자문을 던져보지만, 사실 그 답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어.’
두려움이라 여겼다.
하지만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진정 공포에 질린 이는 그것을 마주할 수도 없음이니, 천마 놈을 마주하고 바락바락 대들었던 내가 녀석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은 웃기지도 않을 변명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두려움을 느낀 걸까.’
모르는 게 있다.
어쩌면 부활하던 순간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당연하다 여겼던 마지막 기억들이, 어쩌면 틀렸을지 모른다는 그런 자연스러운 두려움.
그런 두려움 속에, 움켜쥔 주먹을 풀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넌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아니, 상관없다. 너를 보호하던 술수를 스스로 풀어헤쳤으니, 이제 너를 쓰러트리고 이곳을 벗어나겠다!
일곱 얼굴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놈 참,
“그러고 보니, 네 녀석 언제부터 그렇게 귀여워졌냐?’
- 뭐, 뭣?
“그래도 처음 볼 때는 어디 흑막같이 목소리도 쇠 긁는 것 같고 이리저리 늘어지며 무거운 분위기라도 풍기더니.”
이제 와서 보니, 숫제 식충초에 잡아먹힌 빵실이가 빵뎅이를 흔들어 재끼는 모습과 다름없잖아?
- 뭐라는 거냐!!
“아니지,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너 몇 살이냐?”
- 뭣?!
“암만 생각해도, 너를 본 기억이 없단 말이야.”
바로 좀 전부터 내 기억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라지만, 내가 마교 본진을 털어대는 동안 온갖 마수들을 봤지만 저런 놈은 본 적 없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너희는 마수라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기도 하고.”
- 내, 내가 나약해?! 이놈 흉왕!! 내게 모욕을 줄 셈이냐!!
“약한 걸 약하다고 하지, 그럼 뭐라 말해. 그리고, 너 진짜 몇 살이야?”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또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거 좋든 싫든 같이 갇힌 처지고. 이제 곧 한 놈만 살아나갈지도 모를 처지에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 켁!! 또 흉악한 술수를 부리려는구나!!
일곱 개의 얼굴이 바르륵 발악하듯 온몸을 떨어댔다.
우리 집 헥헥이의 꼬리만큼 귀엽진 않아도, 나름 자기도 꼬리 달렸다고 자신의 꼬리를 좌우로 신명 나게 흔들어대는 녀석은 곧 소리쳤다.
- 내 비록 영글지 못했다지만, 날 때부터 위대한 그분의 은혜를 받아 선대의 기억과 지식은 부족함 없이 습득하였다! 그렇게 벼려온 칼날은 결코 흉왕 너를 상대하기 부족함이 없음이니, 너는 나를 우습게 보지 말라!
“…이제 보니 말투도 병신이네.”
- 뭐라곳……?!
어떨 때는 어린 것 같다가, 또 어떨 때는 늙은 것 같다가.
전형적인 어린놈이 어설프게 보고 배운 늙은이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과 같았다.
“뒤지기 싫으면 빨리 말해. 이 어르신이 인마, 느그 선조 조상님들과 다 했던 사람이야. 빨리 어른 공경 안 해?”
실제로 할 건 어른 공격이겠지만, 어쨌거나 마수 놈은 발작하면서도 묻는 말에 답해 왔다.
- 어르신은 무슨!! 좋다, 네가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답해 주마! 나는 흉왕 네놈과 같이 사특하고 간사하여 상대를 속이지 않음이니……!
녀석은 가슴을 부풀리듯 한껏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 내가 태어난 뒤로 하늘의 달은 그 차오름과 쇠함이 세 번 바뀌었고, 그로부터 하늘의 밤과 낮은 여섯 번 바뀌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