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무(無)에서 유(有)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인(因)이 없는 과(果)는 없으며, 모든 일에는 그 연유가 있는 법이다.
혼원신공은 내가 세상 모든 힘을 다룰 수 있길 탐했던 결과이며, 그렇게 탄생한 탐(貪)은 내 자아에서 발로된 소산이다.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흉폭스러운 그 성격 역시 결국 내게서 이어진 것이다.
‘어리석은 질문에는 굳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
나 역시 쉬이 답을 찾을 수 있는 멍청한 질문에 구태여 답하지 않으니, 탐 역시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까, 그걸로 된 것이다.
“…답하지 않는 걸로 보면 내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이제 이 힘을 쓰는 것에 굳이 허락을 구하지는 않으마.”
- 크르르르…….
선포나 다름없는 말이지만, 탐은 낮은 울음과 함께 스르르 사라졌다. 그게 동의를 표현하는 것임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니, 이제부터 나는 더욱 효율적으로 마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우.”
폐부에 고였던 숨을 내쉬며 쇠사슬에 둘둘 감긴 다른 두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전히 봉인되어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중단전을 의식하며 힘을 끌어냈다.
그러자, 등 뒤로 자연스레 날개가 뻗어 나오며 촉수 다발 역시 바닥에서 솟구쳤다.
“이렇겐가?”
질투종의 마수를 상대할 때도 사용했던 방식이지만, 이번엔 훨씬 부하가 덜했다.
그때는 있지도 않은 중간 과정이 있다고 생각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힘을 뽑아냈다면, 지금은 처음부터 내 힘이라 생각하며 쑤욱 뽑아낼 수 있었다.
탐(貪)을 나와 별개의 존재이면서도 또 동격의 존재로 생각하는, 그런 간단한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중단전의 힘을 사용하는 게 훨씬 편해졌다.
‘편해진 것뿐 아니지. 부상도 적고, 육체에 걸리는 부하도 적다.’
즉, 이제 하단전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전신 혈맥에서는 혼원신공으로 쌓은 내기를 다루고 중단전에서는 마공을 위한 마기를 뽑아내는 식의 깔끔한 정리가 된 것이다.
“…좋아. 이걸 연마하면 무당의 양의신공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겠어.”
좌수로는 마공을, 우수로는 정종의 무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훗, 이걸 결국 해내 버리다니.”
정말이지―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스르르…….
돋아났던 마수의 잔재를 소멸시키며 고개를 돌렸다.
마기 중에서도 정순하다 할 수 있을 마수의 마기를 직접 다루게 되었으니 앞으로 가능성은 무궁무진.
하지만 이걸 다루는 수련은 일단 뒤로 하고,
“어이.”
- 왜, 왜?
“왜? 이 새끼가, 지금 말 까냐?”
우선 교통정리부터 가보자고.
- …요.
시선을 돌린 대상은 질투종의 마수.
크기는 삼 장에 달하는 거대 괴수지만, 지금은 내게 서열 정리를 당해 쭈구리 상태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하… 왜요?”
- 왜… 그러십니까……?
“그래, 인마. 앞으로 나를 대할 때는 다나까로 끝내도록. 알겠냐?”
- 아, 아니 내가 왜… 꾸엑!!
녀석은 꼴에 마수라고 개기는 것을 시도해 봤지만,
“어쭈, 개기냐? 그럼 펴줘야지!”
콰쾅! 쾅!!
- 악!! 그, 그만!!
어둠 속에서 뽑아낸 촉수로 빨랫방망이처럼 두들겨 주자 녀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만? 그마아아안? 이 자식아, 내가 다나까로 끝내라 했지.”
- 이, 이걸 어떻게… 그, 그만해 주십… 다나까!!
“그래, 인마.”
뭔가 이상하긴 했다만, 필사적인 면모가 보여서 봐줬다.
“우리 대화 좀 해보자.”
어느 정도 대화할 자세가 갖춰지자 녀석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굉장히 위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미 쇠사슬에 칭칭 감긴 녀석은 현재 무척이나 무해한 상태.
바로 코앞까지 와서 쭈그려 앉은 내 모습에도 녀석은 일곱 얼굴에서 동시에 눈물방울을 뚝뚝 흘릴 뿐 이렇다 할 반항을 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에게 조금 동정심이 들려 할 때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야, 너희는 왜 그렇게 천마를 믿지 못해 안 달이냐?”
- 시, 신성 모독을……!! 어찌 감히 그분의 이름을……!!
“신성 모독은. 너희들이야 우러러볼 최고 존엄이시겠지. 난 그 양반이랑 칼맛도 서로 주고받은 관계라니까?”
나도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녀석이랑 맨살 구경 서로 한 것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인마, 그 양반이랑 맨살은 물론이고 속살까지 다 봤어!”
정확히는, 속살뿐 아니라 줄줄 흘러내리는 내장까지 다 봤다.
- 어, 어쩌란 겁니까……?
“그러니까 그냥 말하라고. 어쩌면 너희보다 내가 그 양반을 더 잘 알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솔직히 너희도 알잖아. 걔들은 너희가 믿어 의심치 않든, 눈물 나는 광신을 가져다 바치든… 결코 그 믿음을 증명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천마는 이 세계에 강림한 이후 그들에게 그 어떤 것도 해준 적이 없다.
그들의 숭배는 실로 일방적인 것이라, 마교도 놈들이 천마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바쳐도 그에 천마가 대갚음한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녀석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 …그건, 저도… 아니, 저희들도 잘 압니다…….
“그래, 잘 아네. 너희들도 그 사실은 분명 전승될 것 아니야.”
실제로도 이놈들 교리에는 천마가 자신들에게 어떤 것도 해주지 않을 존재임을 명확히 표기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리 믿음을 바치는가?
그에 대한 의문에, 녀석은 무언가 처연한 어조로 답했다.
-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뭐?”
처음에는 처연한 어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주시는 것이… 그분이라는 것을.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 …당신들, 중원인들은 모를 겁니다. 알 수가 없지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정(正)인 이들은. 존재가 사(邪)이고, 마(魔)이며, 악(惡)이라 불려서 결국 부정(不正)당하는 이들의 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
어린 녀석이다.
하지만 그 안에 새겨진 것은 끝없는 시간 흘러 내려온 한(恨)이었다.
- 흉왕, 당신은 알 것입니다. 우리 마수들이 속한,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동포들이 속한 일곱 종파를.
“칠죄종(七罪宗)을 말하나?”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죄악이요, 허물에 속한 저희가 정녕 그 존재부터 그릇된 것입니까?
원래라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당연하다 고개를 끄덕였을 물음이다.
전생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암기를 뿌려댔을 물음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지금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음을.
- 날 때부터 인간을 잡아먹는 동물은 존재 자체가 잘못된 동물입니까? 초식 동물이 풀을 뜯고, 육식 동물이 고기를 뜯든.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고,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새가 뱀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진데,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이들이 있어 그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까?
그것은 한(恨)이었고, 기백 년 내려온 마교가 세상에 던지는 질의였다.
- 십만 대산. 우리의 동포들은 날 때부터 그 험준한 오지에서 눈을 떠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가며 중원인들에게 배척당합니다. 중원인들은 우리를 사(邪)로도 칭할 수 없어 마(魔)라 칭하고, 사(邪)라 불리며 배척되는 이들조차 우리를 마(魔)라 부르며 멸시합니다. 그것은 옳은 일입니까?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
영수가 영수의 새끼로 태어나고, 마수가 마수의 새끼로 태어나듯.
누군가는 머리가 커서 마교도가 되지만, 또 누군가는 날 때부터 마교도인 경우도 있다고.
- 우리가 세상에 물을 때 세상은 우리를 틀렸다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선 우리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있는 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있는 대로 저희를 이끌어 주십니다. 저희의 가치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주시는 하늘 아래 오롯이 유일하신 분.
그런 분을,
- 어찌 저희가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 *
심상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한바탕 봄의 꿈과 같으면서도 감각에 선명히 남는 기억이었다.
“…천마, 천마라.”
끝까지 죽고 죽이며 맞서 싸웠던 상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나와 녀석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다만,
“그놈도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기준인가.”
인생사 요지경이라.
세상이란 참으로 얄궂고 기괴막측한 것이라, 언젠가 이렇다 할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았다고 좋아라 하다가도 곧잘 그것을 부정하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는 한다.
무인이 수련을 하여 벽을 넘고 또 넘을 때마다 이전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진리를 체득하듯, 세상사 모든 것이 이전까지 자신이 쌓아온 세계관을 부정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언제나 미혹에 빠지고 미홍을 헤매며 절대적인 진리를 갈구한다.
결국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이라지만, 한때 자신이 헷갈리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정표를 찾고 싶으니까.
“나한테는, 사유 녀석이 그랬지.”
대독협 당사유.
언제나 나를 비롯한 당가의 혈족들이 믿어 의심치 않고 따를 수 있었던 녀석.
일신의 무력이 뛰어난 것은 맞으나, 결코 제일이 아님에도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었던 녀석.
녀석에게는 단순히 무공의 고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굳건하고 정명한 의지가 있었기에 모두가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정말로 모르겠구나, 사유야.”
이럴 때일수록 유독 녀석이 보고 싶었다.
“천마, 그놈이 마교도에게는 너와 같은 등불이겠지.”
이 얄궂은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유일하고 또 오롯한 등불.
실로 기구하게도, 당가나 마교도의 몰락은 그런 등불을 잃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가는 당사유가 전사하면서 몰락했음이고, 마교는 천마놈이 내 손에 죽으며 몰락했음이지.’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당가와 마교도는 기이할 정도로 비슷했다.
둘 다 그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다가, 어떻게든 이 악물고 모여들어 그때의 영광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떠나간 사람은, 돌아올 수 없지.”
천마 놈은 사람 새끼가 아닌지라 돌아올지 몰라도, 사유는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은 녀석이다.
치사하고 비열한 마교도 놈들은 다시금 자신의 등불을 밝히려 하지만, 당가는 그 등불을 되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을 오롯이 이어받은 내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음이다.
“모르겠구나, 정말로.”
무공을 이어 주는 것은 쉽다.
당가의 모든 무공은 섭렵한 지 오래고, 그것들을 훨씬 강하게 개조하여 넘겨줄 수도 있다.
이미 그 끝을 보았던 나라면, 오히려 전대보다 빠른 속도로 전대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보여 주었던, 당가의 혼(魂)만큼은… 자신할 수 없구나.”
당가의 혼.
한낱 비렁뱅이였던 나 같은 놈마저 저며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그것.
과연, 내가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어둠 속을 헤쳐 나왔고, 지금은 야명주가 찬란히 빛나는 천장 아래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여전히, 나는 어둠 속을 전전하고 있는 것만 같구나.”
내가 바라보는 시계는, 변함없이 어두컴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