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73화 (273/350)

273화

* * *

산해진미(山海珍味).

그 표현이 결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고급지고 다양한 요리들이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귀한 재료에 뛰어난 숙수의 솜씨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고급 요리들 위에는 금가루가 장식되어 그 가치를 더 했고, 그 풍미에 결코 모자라지 않은 명주(名酒)들이 곁들여지며 상을 완성했다.

이 상이 만들어지려면 일반적인 농가를 이루는 일가가 몇 년을 고생해도 결코 벌지 못할 금액이 필요로 하겠지만, 이 연회상을 구린 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등 고민할 가치도 없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흑상(黑商).

검은돈의 주인이라 불리는 이가 이 연회를 주도했으니까.

그리고 이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이 상이 그저 하룻밤 즐길 거리에 족할 정도의 자격이 있는 이들이니까.

사패천(四覇天).

만가쟁패의 혼란한 시대, 그 시대에 새로이 사파의 하늘이 된 이들이 모인 연회였으니, 산해진미에 온갖 미주가 곁들여진다 한들 결코 차고 넘친다 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자신의 앞에 놓인 것에 관심을 주는 이는 딱 하나뿐이었으니,

유일하게 명주를 꿀꺽꿀꺽 들이켜고 상위에 올라온 고기를 통째로 집어 들고 뜯어대던 녹림투왕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들, 자네들 평소 성미를 모르는 건 아닌데, 이렇게나 훌륭한 정찬을 앞두고 그리들 무표정한 건 너무한 게 아닌가?”

암만 여기 모인 이들이 당금 사파 무림의 하늘과 같은 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연회 자리에서까지 이렇게 딱딱해서야.

평소 술자리라 함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어젯밤 기억이 운중을 거닐듯 흐릿흐릿해야 함을 지론으로 삼는 투왕에겐 이 자리가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그런 투왕의 볼멘소리에 흑상이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두를 어찌 꺼낼지 몰라 고민하던 중, 의도치 않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에잉, 쯧. 자네가 가볍게 꺼내는 말이 없다는 걸 누가 모르나? 천하 패도를 노리다 보면 자연스레 분위기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도 가능한 즐길 땐 즐기자는 말일세.”

“그렇군요. 노력하겠습니다.”

“…됐네.”

텄다, 텄어.

솔직히, 녹림투왕 그 자신도 평범한 기준에서 스스로가 대하기 어려운 인간 부류임은 잘 알고 있었다.

평생 투(鬪)에 미쳐 살았을뿐더러, 녹림칠십이채 전부를 통일해 낸 업적을 달성한 자신이니, 감히 마주 잔을 나눌 이가 이 무림에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거야 자신의 위상적인 측면에서의 말일 뿐이고, 개인 대 개인라면 꽤나 유흥을 즐길 줄 알고 풍류를 아는 호걸이라 자부했다.

그에 비해,

‘한 놈은 음모 꾸미기를 좋아하는 놈이요, 한 놈은 시체 만지기에만 모든 관심이 쏠린 변태 성욕자이니… 쯧.;

자신은 그나마 위상이 문제이지 개인의 성격이 문제는 아닌데, 함께 있는 이들은 인간 자체가 문제였다.

‘이런 놈들이 사파의 정점이니, 사파가 괜히 사파 소리 듣는 게 아니지.’

에잉, 쯧,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의 사패천은 답이 없다.

그래도 자신이 있어서 이곳의 평균 수준이 바닥에 처박히는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끌어 올려지는 거라 자위하는 투왕이었으나, 사실 그런 상황에서 병나발을 불고 고기를 뜯는 것만으로도 그 역시 결코 평균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해서, 이리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풍류와 흥취를 즐길 수 없다면 이런 모임 따위는 빨리 끝내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진정 풍악을 울려보자, 그런 생각으로 논제를 꺼내는 투왕의 말에 흑상은 탁자 위로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예. 이번에 이리 회담을 주최한 것은, 다름 아닌 지난번 강남에서의 일을 복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강남? 아아, 그런 게 있었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일이지만 이미 다 옛날 일인 것처럼 반응하던 투왕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왜 그랬나? 자네가 전음으로 물러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진작 끝냈을 것일 텐데 말일세. 웃기지도 않은 정파 시늉을 내는 장강수로채와 그 건방진 정파 꼬맹이를 말일세.”

그랬다.

당시 그들은 당유혼의 사화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것은 사실 전부 연극이었다.

‘그 꼬맹이 놈이 뿌린 독기가 꽤 지독하긴 했지만, 한 달 정도 앓아누울 각오로 덤볐다면 밀어버리지 못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당유혼이 목숨 걸고 펼친 사화(死花)였으나 여기 있는 당대 무림의 절대자들. 그 후유증을 각오한다면 뚫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고,

“게다가, 장강의 후계자는 실종됐다던 전대 용왕의 유지를 제대로 계승했더군. 지금이야 미약하지만 이제 곧 빠르게 강해질 터, 진정 장강의 용왕으로 자라나기 전에 미리 목을 쳐야 되지 않았나?”

당시 황금빛 서기를 발하던 백경의 성장 가능성은 투왕이 보기에도 꽤나 위험 수위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 마교의 사제인지 뭔지 하는 놈과 싸워서 혈기가 어느 정도 식지 않았다면, 진작 승부를 결했을 테지.’

그때를 떠올리는 투왕은 지금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파산대부가 그리워 손을 움찔움찔거렸다.

평생 강자와의 싸움을 누리며 살아온 그였기에, 아직 송사리에 불과한 이들에게까지 제대로 투기가 솟구치지는 않지만, 그런 송사리에 불과함에도 이 정도 투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기억의 한편에 존재를 새기기는 충분했다.

그에, 흑상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선, 당시 저의 의견에 양보해 주신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네가 하자는 것이야 다 필요하니 그런 것이겠지. 그건 의심치 않네만, 해서 연유가 뭔가?”

“그건, 정파의 특성 때문입니다.”

흑상은 탁자 위에 올린 두 손을 모으며 마치 모래성을 쌓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정파라는 족속들은, 백사장에 놓인 모래로 만들어진 모래성 같은 이들입니다. 겉에서 보기에 아름다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흩어지기 쉬운 알갱이 같은 이들이지요.”

“흠… 그래서?”

“한데 그들은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영웅의 존재입니다.”

영웅.

달리 대협이라 불리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항시 어느 시대건 겁난이 불어닥칠 때가 되면 그 영웅이라는 이를 구심점으로 하여 모였습니다. 모래알 같은 것들이 잘도 영웅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뭉치지만, 그들은 그 겁난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하면 스스로 자신들의 구심점을 흩트려 놓아 왔습니다.”

저 스스로 추대한 영웅을 저 스스로 거꾸러트린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흘러왔지만 그때마다 반복되어 온 그들의 역겨운 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나고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놓고, 정작 쓸모가 다 하면 온갖 것들로 흠을 잡아 추락시킵니다. 저 자신들에게는 관대히 넘어가는 작은 트집도, 영웅에게는 마치 천하의 역적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질하여 목을 매달게 합니다.”

“…흐음, 그건 맞는 말이지.”

사파와 정파의 차이가 그것이었다.

사파는 힘이 모든 걸 대신하는 집단이었다.

힘센 놈이 모든 것을 취하고 정점에 오르고, 그 힘이 다하면 강제로 끌어내려진다.

하지만 정파는 별 같잖은 걸로 스스로 하나를 추대하다가도, 또 별 같잖은 걸로 스스로 추대한 그 하나를 추락시킨다.

“해서, 이번 대의 영웅은 그 꼬맹이… 그러니까…….”

“당가입니다. 사천당가. 향후 십 년, 정파 무림은 사천당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허어…….”

투왕은 불현듯 갈증이 느껴져 들고 있던 술병을 입 안에 역으로 꽂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병 하나를 통째로 비우고도 그 갈증을 해소되지 않았으니, 연달아 독하디독한 화주 두 병을 추가로 비운 뒤에야 이 갈증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흐으, 재밌군. 그들은 삼십 년 전까지 천하제일세가라 불린 이들이었고, 그때 멸문에 가까운 몰락을 겪었지. 하지만, 고작 삼십 년만에 다시 부활하여 십 년 안에 다시 그 세를 복구한다는 말인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자네의 예측이라면 반드시 실현될 확신이겠지.”

재밌었다.

고작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따위가 아니라, 천하제일세가라는 현판을 걸 이들과의 투쟁이라니!

“그때 본 꼬맹이가 그 정도로 자라난다고 보나?”

“그의 무력만이라면 삼 년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큭… 큭큭… 삼 년이라.”

고작 삼 년만에 이 중원의 정점을 노릴 수 있는 그릇이라니.

“재밌군, 아주 재밌어.”

투왕은 실로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 위험하지 않겠나? 자네가 노리는 천하에 그 정도의 경쟁 상대가 있다니.”

분명 자신은 재밌는 게 사실이지만, 네게도 재밌는 게 맞는가?

그리 묻자 흑상은 여상한 어조로 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정파는 백사장의 보기 좋은 모래성 같은 이들이지요. 작은 흠에도 쉽게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이들이니, 그때 보았던 장강수로채와의 유착 관계라면 결코 작지 않을 흠이 될 것입니다.”

“크흐흐, 재밌군. 아주 재밌는 투쟁이 되겠어.”

머리 아프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투왕이지만, 투쟁이란 오히려 혼란스러워야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투왕이었다.

일대일로 맞부딪치는 것도 흥취가 있지만, 진정 적아를 구분할 수 없는 난투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싸우는 것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것도 선사할 수 없는 쾌락을 준다 여겼다.

천하의 산해진미도, 목구멍에 넘어가는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은 미주도 줄 수 없는 그런 진정한 즐거움!

그 역시, 결코 정상 범주의 사내는 아니었다.

그렇게 투왕이 흉소를 숨기지 않고 피워올리고 있을 때, 흑상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하여, 정천맹의 일은 제가 추가로 계획하는 복안이 있습니다. 다만, 오늘 논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때 본 마교에 관한 안건입니다.”

“마교… 그래, 그들이 있었지!”

사제라고 했었다.

자신의 피를 들끓게 했던 투쟁의 상대.

한낱 몰락 해버린 과거의 망령이라 여겼건만,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던 적수의 존재는 투왕에게 식었던 투쟁심을 되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존재를 찾은 건가? 또 달리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이 있는 건가? 거기가 어디인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하는 그 모습에 흑상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들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에 앞서 그들의 대처에 대해 논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처라니?”

“그 부분부터는 내가 말하도록 하지.”

둘만의 대화가 계속되던 중, 그저 묵묵히 앉아 듣기만 하던 흑시문주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음? 자네도 할 말이 있었나?”

시체가 아니라면 별다른 관심도 없을 이가 목소리를 내자 자연스레 투왕의 관심도 커졌다.

“지난번에 내가 수습해 간 그 사제 놈의 시체를 기억하나?”

“그랬지. 자네가 이번에 만들 강시의 소체가 늘었다고 좋아라 하던 기억이 나는군.”

어쩌면 강시 역사의 새로운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난리 치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억을 되새기며 묻자 흑시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소체가 문제일세.”

“문제라면?”

“사라졌네. 감쪽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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