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사제의 시체가 사라졌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녹림투왕조차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음… 유감이네.”
짧은 침묵 후 짧은 소견.
과연 그 유감이 여기 있을 흑시문주만을 향하는 것인지, 혹은 그 휘하에 있다가 시체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해 머리가 깨질 부하들을 향하는 것인지.
어쩌면 물리적으로도 깨졌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투왕이 작은 애도를 표하고 있을 때, 흑시문주는 상대방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오해하고 있군. 딱히, 나는 휘하의 부하들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소.”
“응? 정말로?”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억울하군. 적어도 내 쪽이 당신보다 부하들을 아끼는 것 같은데.”
“허허허…….”
아끼기는 아끼겠지.
죽어서도 아까운 그릇이었다고 그 시체를 강시로 재활용하는 것 역시 아낀다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면야.
“그리고, 이번 경우가 특별한 건 그 시체를 내가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흑시문주가 직접?”
“그렇소. 사실 감시라고 말하기도 뭐한 것이, 내가 그것을 직접 실험하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가진 소체인지, 사흘 밤낮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곁에 두고 각종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지.”
‘끔찍하군.’
투왕 자신 역시 시산혈해의 중앙에서 병나발을 불 수 있는 호걸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그걸 곁에 두고 사흘 밤낮 동안 부대끼며 살 자신은 없었다.
“그럼 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네의 기감마저 속일 신투(神偸)가 찾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군. 내가 오해의 소지를 두었군.”
그 말에 흑시문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첨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아내렸다네.”
“…그 시체가?”
“그렇다네.”
“허…….”
이건 또 신박한 이야기구만.
신기하다는 듯 고깃덩이 하나를 입에 넣고 질겅이며 투왕은 물었다.
“거 혹시, 독액을 너무 많이 뿌린 건가?”
“아닐세.”
“그럼 그… 기이한 비약을 뿌려 굳히려다가 녹아버렸다던가?”
“그것도 아닐세.”
“그럼…….”
“생각하는 모든 게 아닐세. 그저 그 자리에서 녹아내린 걸세.”
“기사(奇事)군.”
“기사(奇事)지.”
기이한 일.
다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흑시문주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었다.
“강시의 발전에 혁신을 이룩할 것이라 여겼던 그 소체는… 애초에 가짜라는 것일세.”
“잠깐, 가짜라고?”
그 말에 이번엔 투왕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럴 리 없네. 자네도 직접 그 존재와 맞부딪쳤지 않나.”
마교의 사제라는 자는 강했다.
술법이라 불리는 기이한 수법을 부리는 것은 물론, 개인이 익힌 무공의 성취 역시 결코 낮지 않을뿐더러, 그 육신이 가진 단단함이 파산대부의 흉악무도한 날과 부딪쳐도 흠집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시체가 가짜라고?
“술법 중에 그런 게 있다더군. 인형과 같은 가짜 육체를 만들고, 그것을 멀리서 조종하는 수법.”
“당치도 않는……!”
쾅!
흥분으로 가득 찬 주먹이 탁자를 후려쳤다.
덕분에 산해진미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지만 이 자리에 누구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내가 직접 부딪친 그놈이 가짜라고? 그러면… 그러면……!”
그의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본체는, 더 강한 놈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그 불꽃의 이름은 투기(鬪氣)였으니, 진정 강자와의 투쟁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광인에게는 이보다 더 매혹적인 것이 없었다.
다만,
“그건 모를 일이지.”
돌아온 답은 그 불꽃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본신의 힘을 나누어 만든 분신인지, 혹은 본체는 약하지만 그 분신의 힘은 강건한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네.”
“…뭔가, 실컷 다 아는 듯이 말해 놓고는.”
“이중 주술적 지식이 그나마 제일일 뿐, 나 역시 무공과 강시 제작이 특기라는 것을 잊지 말게.”
단호히 선을 그어버린 흑시문주의 모습에 투왕의 입술에 심술이 가득해졌다.
“젠장, 그게 끝인가? 고작 가짜라는 말을 하려고?”
“당연 그것이 끝이 아니지.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술법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거야.”
“술법적 지식? 설마, 그 말은 그 말은……!”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던 투왕은 곧 그 진의를 깨닫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네. 모용세가, 그들을 공격하세.”
모용세가.
중원의 동북방, 요령의 지배자.
한때는 오대세가의 일원이라 불렸으나, 주술에 손을 대며 변모하기 시작한 그들은 이제 구패의 일원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명색이 사패천이라 불리는데, 아직 남은 구시대의 잔재가 많군. 서둘러 정리도 하는 겸, 그들로부터 주술적 지식을 가진 이들을 데려오기도 할 겸. 복속시키든 정복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겠지.”
이젠 그 표현마저 구시대의 것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파의 기준이 될 이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선언했다.
“흑상과는 이미 의논을 마쳤네. 한 달 뒤. 우리는 모용세가를 공격하려 하네.”
* * *
엉망이 된 연회장.
잔뜩 흥분해 버린 투왕이 결국 탁자를 부숴 먹는 덕에 산해진미‘였던 것들’이 쏟아져 엉망이 된 그 장소를 사용인들이 신속한 동작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이 하나.
‘모용세가라.’
달리 흑상이라 불리며 이 회담을 준비했던 중년인은 멀어지는 두 동업자들을 시선으로 좇으며 회담 전 흑시문주가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모용세가를 공격하세.”
첫 마디에 용건부터 꺼내는 직설적인 화법.
그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흑상은 당시 웃으며 그를 맞이했었다.
“어서 오시지요, 흑시문주.”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모용세가를 공격하고 그들을 복속시키세. 그들에게서 얻을 비단과 북동의 유통 경로는 상인인 자네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을 터. 군략을 준비해 주세.”
자신의 거절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 말해 오는 모습에 흑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어져 오는 말들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교도의 시체가 사라졌네.”
“시체가 사라졌다면?”
“금선탈각. 그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나, 그 시체는 가짜였네.”
갑작스레 녹아 사라져버렸고, 시체였던 것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단 하나의 잔재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이게 남더군.”
그리 말하며 흑시문주가 보여온 것은 작은 흑옥(黑玉).
“이게 무엇입니까?”
“잘 모르겠네.”
놀랍게도, 강시술을 비롯한 각종 사술(邪術)에 통달했다 전해지는 흑시문주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이었다.
“…강시에 미친 흑시문주조차 전부를 알아내지 못해 내게 도움을 청해 왔다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결코 떼어낼 수 없다는 다섯 가지 감정이 있다고 한다. 달리 오욕(五慾)이라 불리는 것이 그 정체지만, 흑시문주의 경우 강시에 대한 욕망이 그것조차 넘어선 지 오래인 광인이었다.
‘그를 사패천의 이름으로 합류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시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인 협조를 해주었기 때문. 그렇기에, 그가 내게 강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거늘.’
간혹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 자랑하고 싶어 떠벌릴 일은 있어도, 이렇게 전면적인 협조 요청을 받을 줄은 천하의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재밌군.’
흑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손안에 쥔 흑옥을 이리저리 굴렸고, 그때마다 그것은 음습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것이, 마기(魔氣)라는 것이지.’
그것은 실로 괴이했다.
느껴지는 음습함은 사술을 부리는 이들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싶지만, 정작 그 사술에 통달한 이가 말하길 그보다 훨씬 정순한 기운이라고 한다.
사람 수십은 족히 파멸시킬 만한 기운이건만, 단순히 순도로 따지면 도가의 정종 무공, 개중에서도 절정 무공을 수십 년간 익힌 이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니―
‘사술로는 어림없어 정통과 체계가 있는 주술적 지식이 필요하다라…….’
모용세가에 대한 정복을 주장하던 흑시문주의 요구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재밌어.’
실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흐름이다.
그전까지 만가쟁패라 부르며 별다른 변화도 없이 기득권층의 밥그릇 싸움이나 하던 때가 아닌, 서로의 쪽박마저 깨버릴 듯한 죽고 죽이는 투쟁의 시대가 이 드넓은 무림 전역을 대상으로 열린 것이다.
“난세(難世)인가.”
이제 시대는 진정 난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가 눈치만 보는 가짜 난세가 아니라, 누가 먼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내는 진짜 난세.
이런 난세야말로 상인에게는 최고의 시기였다.
‘난세가 되면, 평소라면 사고팔 수 없던 것조차 거래할 수 있게 됨이지.’
부모가 아이를 팔고, 연인이 신뢰를 팔아 넘긴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떠들던 것들도 옳은 가격이 측정되는 그런 시대.
이 어찌,
“큭… 큭큭큭… 즐겁지 않을 수가 있나……!”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지금 이 순간 모용세가를 정복한다거나 하는 것 따윈 정녕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구패의 하나?
고작해야, 이 사파라는 세력을 아홉으로 쪼갠 것 중 하나가 아닌가.
“벌써부터 모용세가를 토벌하는 것은 원래의 계획과 맞지 않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변경할 수 있지.”
창밖을 내다보며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풍경을 바라보는 흑상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하 세력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개중 모용세가에 대한 토벌은 또 다른 계획의 첫 단추에 불과할 뿐.
‘그곳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흑시문주에게는 새로운 병기가 완성되었으니, 무력적으로는 크게 부족함이 없으니.’
그들에 대한 토벌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실패한다면 그것 나름대로도 이득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수면 위로 드러난 세력 따위가 아니라 이제 겨우 일각이 드러난 세력.’
즉,
‘마교(魔敎).’
얼마 전까지 그의 세력도에 존재하지 않던 세력이지만,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집단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미 하오문의 본단과 손을 잡고 광동성의 어둠을 지배하고 있던 그들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하나의 성도 내에서 그 정도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분명 중원 다른 어딘가에도 잔가지가 뻗어 있다 봐야 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자극했다.
‘그 말은, 최소한 나와 동급 수준의 정보망을 둔 이가 나를 방해했다는 뜻이 될 테니…….’
일단, 하오문은 아니었다.
‘제대로 규합조차 되지 못한 반푼이들이 내 정보망에 혼선을 둘 수는 없지.’
그렇다면 결국 떠오르는 이들은,
‘흑상, 혹은 개방.’
무림 삼대 정보 집단으로 통하며, 자신과 같은 흑상의 다른 거상들이 견제를 했다거나 정파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개방마저 마교의 뿌리가 뻗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악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를 일이지.’
최악을 가정한다면, 삼대 정보 집단 전체에 마교가 뿌리를 뻗친 경우.
“큭… 큭큭… 그야말로 걸작이군.”
지금껏 설계한 판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다시금 짜올려야 할지 모를 수준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흑상의 머릿속에는 돌연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고객님께서는, 어디까지 눈치채셨을까.”
광동 땅에서 자칭 정파란 것들이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바둥거리고 있을 때, 홀로 자신들을 막아서던 아직은 앳된 티를 벗어내지 못한 청년.
“기대가 되는군.”
운명의 장난일까.
하필 무대의 반대편에 올려진 이는 삼십 년 전 그들 가문의 대적이었던 마교이니―
“부디, 나를 실망시켜 주지 않기를.”
천하에 둘 없을 거대한 대국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