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엣취!”
“헥헥?”
“응? 아, 아니야. 그냥 재채기가 나온 거야.”
재채기가 나왔다.
앞서 아장아장 걸어가던 헥헥이가 걱정스레 돌아보는 모습에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고 코를 훔치며 생각했다.
‘누가 날 욕하나?’
자, 머릿속에 범인을 떠올려보자.
우선 하오문의 하가 놈이 있고, 본가에는 방계 서른세 명이 있다. 무림맹에는 의문의 노사부인 나를 시기 및 질시하는 놈들이 수두룩 빽빽하니,
“…의심되는 놈이 너무 많은데?”
이건 뭐, 한두 놈이 아니잖아?
“후우, 세상 살기 힘들구만.”
하늘은 천재를 시기한다던가?
닭장 속 학은 언제나 닭들의 질투를 받느라 제 명에 못 산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헥헥!”
“아휴. 괜찮아, 이 녀석아.”
내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니 헥헥이는 곧장 품에 안겨서 볼따구를 핥아 왔다.
이런 충직한 녀석 같으니.
당가칠대금기(唐家七大禁忌).
외식(外式).
마구마구 쓰다듬기.
“헥헥헥!”
“이게 다 어쩔 수 없는 천재의 숙명이니까 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너도 대비해 둬라.”
마구마구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좋다고 발라당 뒤집어 누워버리는 녀석이지만, 이래 봬도 영수의 핏줄.
온갖 음해와 핍박 속에서 모진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네게는 특별한 두 가지 무기가 있으니까.”
그건 바로 말랑말랑한 뱃살과 토실토실한 빵뎅이.
그 파멸적인 두 가지 무기라면, 어떤 고난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헥헥!”
“그래그래.”
밝은 미래가 기다리는 녀석을 품에 안고 연공실 문을 열어젖혔다.
녀석의 미래처럼 쏟아져 나오는 밝은 햇빛.
눈부신 빛살을 손으로 가리며 폐부에 쌓인 숨을 내뱉었다.
“후우, 가볼까?”
봉문 기간이 끝났다.
* * *
봉문이라 해야 할지, 금고라 해야 할지.
어쨌든 그 기간이 끝나자마자 향한 곳은 하오문의 비밀 안가.
기다리고 있던 하윤호 녀석이 허리를 푹 숙여왔다.
“오셨습니까요, 소혀… 눈빛이 왜 그러십니까요?”
“내 눈빛이 뭐.”
“뭔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응, 그러게.”
지난번에 먹은 영단을 제대로 소화한 건지 때깔이 고운 게 무척이나 아니꼽다.
누구는 저 지하동에서 근신과 옥고를 반복하고 있었거늘.
부들부들.
‘왜지? 왜 이렇게 아니꼬운 것이지?’
하윤호 주제에.
마구마구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물씬물씬 차오른다.
“아이고, 소협. 일단 앉으시지요. 제가 다, 상을 차려 놨습니다요.”
불편이 폭발하기 직전, 녀석은 허겁지겁 손에 잔을 쥐여주며 술을 따라왔다.
“강남 땅에서 들여온 오곡미주 입니다. 일 년 생산량이 일백을 넘지 않는다는 특급 한정품이지요.”
“…크흠, 그래?”
생존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 같으니라고.
‘한정품은 못 참지.’
목 넘김이 아주 녹아내리는 것이, 쌓인 울화통도 사르르 녹아내려 버렸다.
“큼, 맛있네.”
분노까지 녹여 내리는 맛이라니.
일단 자리에 앉자 녀석은 헤헤 웃으며 두 손을 비벼 왔다.
“근신 기간은 괜찮으셨습니까요? 무료함을 느끼시지 않게 아랫것들을 시켜 섭섭지 않게 챙겨드렸는데…….”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챙기다니, 나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는데?
“넵……?”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오가는 시선.
녀석은 재빨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 분명 이것저것 챙겨드렸습니다요!”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요!! 이 하윤호, 신용에 살고 신용에 죽는 놈입니다요!!”
“아, 그래? 그럼 오늘 신용에 뒤지는 거다.”
병나발을 불던 술병을 그대로 역수로 쥐자 하가 놈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전 결백합니다요!! 분명, 당가의 총관을 통해 입금 완료했단 말입니다요!!”
그것은 실로 피를 토하는 외침이었다.
“응? 잠깐. 궁상이 놈을 통해 줬다고?”
“그, 그렇습니다요……!”
사파 놈은 일단 거르고 보는 나지만, 이 정도로 진정성 넘치는 외침까지 눈 돌리기는 버거웠다.
“…내부에 적이 있었던가.”
철저한 내부 감찰의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좋아,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우선, 찾아온 본론부터.
“해서, 내가 저 지하실 바닥에 처박혀 있는 한 달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지?”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연공실 바닥에서 지낸 지 어언 한 달이다. 요즘같이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국에 그간 있었던 일들이 한둘일 리가 없고, 그걸 요약해서 듣자면 이 녀석에게 직접 듣는 것만 한 게 없다.
“헥헥이 아침 산책도 건너뛰고 온 거니까, 잘 읊어봐.”
“헥헥이란 게… 그 혹시 품에 안겨 있는…….”
“용맹하고 민첩한 녀석이지.”
“헥헥헥!”
제 부르는 줄 알고 좌우로 꼬리를 왕복 운동하는 녀석을 바닥에 내려다 주며 팔짱을 꼈다.
“빨리 말해 봐. 이 녀석 산책시켜 줘야 하니까.”
“…예, 그렇습죠.”
여러 가지로 복잡한 표정을 짓던 하윤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요. 현재 시국은, 굉장히 복잡, 아니… 난잡합니다요.”
“난잡하다니?”
“일단 정천맹 내부 상황부터가 좋지 않습니다요. 강남 원정은 맹이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대규모 원정, 그것을 성사시킨 덕에 맹의 위세는 당연 연일 승천 중입니다요.”
비록 시작은 타의로 점철된 원정이라지만, 강남 원정대는 무려 구패의 일익인 하오문 본단을 토벌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그들이 실제 사패천과 연관이 있었는지야 미지수였지만, 자고로 증거란 조작하기 나름.
역사라는 것 자체가 대개 승자의 입맛에 맞게 개편된다는 걸 생각하면, 근 한 달 동안 정천맹에 속한 내부 인사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공로를 과대 포장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홍보 효과도 어마어마했겠군. 그렇게 많은 인원을 추려갔으니.”
“그렇습죠. 장강수로상단의 대규모 함대를 추려 갔으니, 물길이 닿아 있는 도시들은 전부 정천맹의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하게 되었습니다요.”
“이거 완전 남 좋은 일만 해준 꼴이잖아?”
어디 몰래 기습 작전을 행한 것이면 모를까. 중원 무림 전역에 우리가 간다! 라고 외치며 움직인 꼴인지라, 아직 정천맹이 무림맹의 계승자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의심하던 이들에게 확실히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장강수로상단 역시 그 이름부터 슬슬 풍겨오는 장강수로채와의 연관성을 벗어내고 당당한 정파의 일원으로 변태하는 데 성공하고 또한 그 주가를 갱신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정천맹 내부 문파들의 명성이 더 올랐다는 거지?”
“장강수로상단은 소협의 눈치를 보기에 굳이 자신들의 존재를 대외에 알리지 않았습니다요. 하지만 다른 문파들은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습죠.”
문제는 다른 놈들 이득이 더욱 크다는 것.
그들은 사패천이 사파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정천맹이 정파 전체를 아우르길 바라고 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구시대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세간의 인식 속에 정천맹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새겨 놓는 것.
그 확고한 목표를 다 하기 위해 온갖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다 하고 있다.
그래, 거기까지면 괜찮은데,
“…그런데, 왜 우리 가문한테 지랄들이야?”
문제는 이놈들이 당가에까지 수작질을 벌인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분노가 차오르자 하윤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금 무림의 지자(知者)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 때문입니다요.”
“그런 게 있어?”
“예. 꽤 중요한 내용입니다요. 이제, 무림의 중심이 무한에서 사천으로 옮겨진다는 것입지요.”
“…뭐?”
무한(武漢).
한때는 정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던 도시였다.
이전 시대, 정파의 대들보라 할 수 있던 무림맹이 있던 도시인만큼 전성기에는 수도 낙양에 버금갈 만큼 많은 이들로 들끓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말 그대로 한때의 이야기.
‘제국의 수도가 낙양이었다면, 무림의 수도는 무한이었지. 그래서 마교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최고 존엄 천마가 골로 가버린 후, 마교도 놈들은 개미집이 무너져 버린 개미 떼마냥 무림으로 쏟아졌다.
첫 번째 표적이 당가였다면, 두 번째 표적은 무림맹이 있던 무한.
마교와의 대전이 한창일 때, 갖은 요인 암살과 마교 세작들의 자폭 공격에 시달리던 무한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그 최후의 일전을 버티지 못하고 쫄딱 망해 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사천은 본가가 있어 빠르게 복구되었지만…….’
무한은 지금 말 그대로 무주공산.
듣자 하니 마교도 놈들이 뿌린 기이한 역병마저 아직 남아 있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 돼버렸다고 한다.
물론, 그 인근에는 정파의 태산북두라 불리던 두 문파가 있었지만―
‘하필 그들이 지금 봉문 상태라고 했던가?’
그쪽들도 한번 찾아가 봐야 하는 곳인데, 닥친 일이 많아 미뤄두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도 그걸 해결할 수는 없으니,
“…우선은, 이쪽 일부터 해결해야겠네. 그래서,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 모를 놈들이 데굴데굴 굴러와서 박혀 있던 우리를 빼버리려고 한다는 거지?”
“그렇습죠. 그들 입장에서야 당가는 말씀하신 대로 훌륭한 ‘알박기’를 보인 이들이지 않겠습니까요.”
“알박기라.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구만. 다 망해서 땅덩어리만 더럽게 넓던 이곳이 언제 그렇게 금덩어리 땅이 돼버린 건지.”
삼십 년 만에 돌아온 당가는 말 그대로 거대 흉가였다.
숫제 속 빈 강정과 다를 바 없어서, 안에 있던 것들은 싹싹 긁어다 빚을 갚기 위해 팔아넘긴 지 오래였고, 딱 맨땅에 낡은 건축물만 올려져 있는 상태가 끝이었다.
그러나 일 년 만에 내 피땀 어린 노력으로 사천 자체가 부흥하기 시작하니 부동산 가격은 연일 상한가를 갱신해 지금이 되었다.
애초에 당가 자체가 가문 명 앞에 사천을 붙일 만큼, 사천에서도 노른자위 땅에 지어져 있다 보니 그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행정, 군사, 교통 등등 최상위 입지를 거머쥔 채 아득한 규모의 범위까지 수용해 버렸으니, 새롭게 들어오려는 이들 눈에는 그야말로 철옹성으로 보일 수밖에.
진짜, 부동산 불패 신화는 앞으로 천년이 흘러도 영원할 것이다.
“이제 여러모로 다른 문파들에서 공격이 들어올 것입니다요. 어쩌면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어대며 당가와 충돌을 일으키려 할지도 모릅니다요.”
“빈틈이 보이지 않는 철옹성이니, 자신들이 손해를 감수할지라도 억지로 갈등을 만들어 빈틈을 만들어내겠다는 건가?”
“흔히 타지에서 규모 있는 상단들이 새로운 지역에 돗자리를 펼 때 사용하는 수법입지요.”
용독문을 오체분시시켜 버리고, 사천삼주라 불리던 놈들도 갈기갈기 찢어버린 지금 사천은 당가의 독주 체제라 봐도 무방했다.
그나마 사천성주 이문학의 눈치를 봐서 어느 정도 적정선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다른 거대 문파들이 보기에는 압도적이겠지.
즉,
“청룡단이랑 백호단, 그 두 놈들이 손을 잡고 당가를 견제할 수도 있다?”
“그 이상일 수도 있습죠.”
당가는, 이제부터 당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거대 문파들과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구시대의 잔재는 물론이고, 새로운 시대에 머리 좀 컸다고 깝죽거리는 놈들까지 덤벼들 것이란 말이지.’
그것참,
“익숙하네.”
언제는 당가가 다른 이들과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사이좋게 지냈던가.
‘당가는 원래 유서 깊은 친구 없는 집안이거든.’
폐쇄적으로 유명한 가풍에, 여인을 시집보내기보다는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여오는 것까지.
오대세가 주제에 다른 오대세가들과 가장 안 어울리는 가문으로 유명한 게 당가였다.
“다 덤비라 그래. 지역 유지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지.”
자신감을 활활 불태우며 선언했다.
물론,
“그전에, 집안 정리부터 좀 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