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뚝뚝 끊기는 듯한 단어의 배열이었다.
힘주어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쌓인 감정이 딱딱하게 굳어 배여 나온 것인지―
그 어느 쪽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녀석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 믿으라며 큰소리치던 놈이었지. 실제로도, 모두가 믿지 않을 수가 없던 놈이었지.”
그래, 분명 그런 놈이 있었다.
“그래, 사실 나 역시 그놈을 믿었다.”
자신을 싫어해 마지않던 놈에게 마저 믿음을 받았던 그런 놈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었지.”
모두의 믿음을 굳게 사던 놈은, 그 모든 믿음을 가지고 실패해 버렸으니까.
“…….”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이 시대에 깨어난 이후 수많은 죽음의 순간을 겪었지만, 그 어느 때도 지금처럼 끔찍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가장 예리한 비수로 나를 찔러오던 녀석이 물어왔다.
“어째서 그놈이 실패했는지 아나?”
“…그놈이, 멍청해서겠지. 무능했을 테고 말이야.”
멍청했고, 무능했다.
모두에게 자신만 믿으라 큰소리 떵떵쳐 놓고, 멋대로 실패해 버렸으니까.
입술이 비틀리며 흘러나온 말에 당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은 멍청했다.”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무능하지는 않았다.”
“…뭐?”
“오히려, 넘치도록 유능했지.”
유능, 했다고?
‘이 녀석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이죽거리는 조소도 짓지 않으며, 더없이 진중한 모습으로 말했다.
“다만, 넘치도록 유능했던 게 녀석에게는 독이었다.”
“…어째서?”
“모두가 믿었던 그 녀석은, 정작 아무도 믿지 못했으니까.”
“그건…….”
생각도 못한 말이었다.
‘내가, 아무도 믿지 못했다고?’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머리를 후려친 듯한 기분.
그 속에서 당궁상은 말을 이어 갔다.
“간혹 생각했다. 녀석을 따르던 이들이 조금만 더 유능했다면 어땠을까?”
그 목소리에는 자조가 어려 있었고,
“나를 비롯해서, 우리들이 조금만 더 유능했다면… 제 잘난 줄만 알아서, 다른 녀석들이 그걸 다 하지 못할까 걱정해서.”
그 목소리에는 후회가 가득했었고,
“그 누구에게도 짐을 나누지 못해, 앞만 보고 살아가던 그 녀석에게―”
그 목소리에는 미련이 절어 있었으니.
“그 뒤통수를 후려갈겨 줄 수 있었다면, 그 짐을 억지로라도 뺏어와 함께 들어주었다면…….”
응어리진 감정으로 뱉어내는 그 한탄에―
“그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는…….’
무거웠다.
녀석이 뱉어 낸 그 감정은 자조와 후회, 미련으로 얽혀 긴 시간 속에 퇴적되어 온 것이었다.
그 무게는 천근의 돌덩어리와 만근의 쇳덩어리보다 무거웠으니, 온몸에 무쇠로 된 사슬을 두르고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빠져나갈 곳 없는 나의 원죄가 마침내 내 숨통을 조여와, 금방이라도 폐부를 터트릴 것만 같을 때―
따악!
“끄악?!”
내 머리통이 먼저 터져 나갈 것 같은 충격이 작렬했다.
“아니, 이 개자식이, 잠영무흔까지 써서 때려?!”
암만 죄책감에 빠져 있다고 해도 저놈이 이 거리까지 다가오는 동안 몰랐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궁상은 그래도 목숨줄이나 연명해 잃지 말라며 가르쳐준 잠영무흔까지 써서 내게 다가와 뒤통수를 갈긴 것이다.
“끌끌끌, 그놈 참. 예전부터 한번 꼭 갈겨보고 싶었다.”
이 새끼가?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내게 녀석은 씨익 웃으며 말해 왔다.
“꼴 같지도 않은 궁상 떨지 마라.”
“뭐……?”
“사람은 언제나 실수하고, 또 실패도 한다. 그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겠지.”
모든 이가 성공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어느 날 성공을 하면, 또 어느 날은 실패를 한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
“다만, 어른이란 그 당연한 진리를 알고 있더라도, 다음 이들에게 믿고 맡겨 놓을 수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게다.”
“…믿음이라고?”
“그래, 믿음이다.”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되어버린 당궁상은, 그동안 쌓인 고집스러움만큼이나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나 실수하겠지. 또 누구나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나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안다면, 역시나 그로부터 배워 결국 해낼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언젠가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믿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지.”
믿는다.
누구나 쉽게 뱉는 말이지만,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이제는 늙어버린 몸뚱이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회한이 느껴지던 목소리는, 어느새 그것을 이겨 내버린 시간의 승자가 내는 단단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어린 저 녀석들에게 당가의 혼(魂)이 끊기지 않게… 넘겨주는 것이겠지.”
당궁상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돌담 너머였다.
숨어, 숨어― 하면서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은근슬쩍 지켜보던 방계 놈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조금 전까지 고성방가가 녀석들을 끌어모은 듯했다.
흘긋 그쪽을 돌아보고 있을 때, 녀석은 여상한 어조로 말해 왔다.
“그러니까 이제 가라. 네놈이나 이 늙어버린 놈이나, 할 게 많은 몸들 아니겠느냐.”
“너…….”
“일없다.”
명백한 축객령.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걸어가는 당궁상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휙―
나 역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다.
* * *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더럽게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분명 어설프다.’
어째서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꽤 간단했다.
‘삼십 년 전. 나는 마음껏 전 무림을 싸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것은 다른 녀석들 덕분이고.’
마음껏 일을 벌여 놔도 수습해 주는 녀석들이 있었다.
끝도 없이 키워 놔도, 알아서 잘 유지해 주는 녀석들이 있었다.
‘나는, 분명 억지를 부려 협상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집단을 이끌어 나갈 이로서 협치를 하기는 어렵지.’
새삼 이 시대에 돌아왔을 때, 위혼이 녀석과 당궁상 그놈이 나를 얼마나 믿어 주었는지 느껴졌다.
‘지금껏 내실을 다지겠다고 결정한 적은 있지만, 그 역시 방계 놈들 무공이나 몇 번 봐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무림에 속한 가문과 문파가 첫째도 무공이요, 둘째도 무공이라 말하며 그 무력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쓴다지만,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코 무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왕왕 있다.
‘그리고… 집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지.’
녀석의 말마따나, 한계 있는 빌려서 쓸 인재가 아니라 직접 돈을 들여 키워낸 인재가 필요했다.
단기간으로 끝날 계획이 아닌,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어 뿌리 깊은 나무가 되게 하여 파헤쳐진 당가의 토양을 비옥케 할 새로운 종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고아원을 만들자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곧장 위혼이 녀석을 찾아가 말했다.
“그래.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너무 내정에 무관심했던 것 같다. 그러니, 너랑 총관 놈을 도와서 일을 봐줄 이들을 키우자.”
“해서… 부모를 잃은 이들을 본가에 받아들여 인재로 키우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제일 안전하지 않겠냐?”
머리가 굵고 난 다음부터 인간은 다 자기 이득만 챙기려 하기 마련이다.
그게 딱히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원래 자기 주머니 챙기는 게 본능에 새겨진 당연함이니까. 하지만, 그점은 오히려 역이용해 소속감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다.
‘처음부터가 안 되더라도, 아주 어릴적부터 당가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자란 녀석들은, 당가에 대한 깊은 유대와 소속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 그럼, 녀석들이 챙기려는 주머니 자체가 당가의 주머니가 되는 것이고.’
가문이 번성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충성도 높은 인재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선 가능한 이른 나이에서부터 그런 인재들을 키우는 게 최선이다.
“나랑 방계 녀석들이 그 증거다. 비록 혈연으로 묶일 수는 없지만, 진짜 한 가족이 되기만 한다면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어떠냐?”
사실 말하고 보니 좀 막막한 소리기는 했다.
미래의 업무를 편하게 해주겠다고 당장 현재의 일거리를 늘리는 셈이니까. 게다가, 가주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가솔을 늘리자고 말하는 것이니 녀석 입장에서 불쾌감을 느낀다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쁘지 않군요.”
우리의 고금제이가주 당위혼은, 그런 자잘한 것 따위는 연연치 않는 대협이란 말씀.
“마침, 슬슬 저와 총관만으로는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그래?”
아침부터 일어나 약초를 캐고,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 무공을 익히면서도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녀석이 대놓고 버거움을 느낀다고 말하다니…….
어쩌면, 진작 한계에 부닥치고 있던 게 아닐까?
“그, 그럼 이 일은 내가 진행할까? 괜히 바쁜데…….”
“아닙니다. 어찌 됐건 가족이 될 이들을 받아들이는데, 가주된 이가 직접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런가?”
위혼이는 내가 물어 놓고도 놀랄 정도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왔다.
“사실 그 부분은 그렇지 않아도 제가 줄곧 신경 써왔던 것입니다. 과거 당가는 명실상부 사천의 기둥으로서 힘든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협과 의를 기치로 삼음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의 대에 이르러 그러지 못했으니, 선조들께 몹시 죄송스럽게 여기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아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지 않을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죄인인지라 눈치만 보고 있자니 녀석은 활짝 웃어왔다.
“나타협의와 만가쟁패의 시대. 힘 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혼란스러운 시국이었을 테지만, 힘없는 양민에게는 진정 지옥과 다름없었을 시기일 것입니다. 그동안 과부와 고아의 발생률이 유례없이 높았다고 하니, 저희가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오히려 그렇게 내밀고도 다 잡아주지 못할 정도라는 게 현실일 거다.
“저 역시 마냥 꿈만 같은 소리나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아직 사천의 볕이 들지 않는 곳에 손을 내밀고자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둘 해나가다 보면, 다른 곳에서도 저희가 행한 바와 같이 힘없는 이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경우가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당가의 문제도 해결하고, 협의도 실천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라는 말에 대독협(大毒俠)의 후손께서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 듯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야,
‘스스로 업무량을 늘리다니, 이건 대체 무슨 괴물 같은……!’
같은 느낌인지라, 두려워서 오들오들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리고… 안 그래도 형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기도 했습니다.”
“나한테?”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형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을까 싶은 내용입니다.”
“내가 잘 아는 내용?”
“한 차례 말씀드렸듯, 먼곳 보다는 가까운 곳부터 챙기며 기틀을 짜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줄곧 형님께 여쭙고 싶었던 대규모 인재들의 채용건이 있었습니다.”
어느새 인재 육성 계획을 대규모 빈민 구제 계획으로 뒤바꿔 버린 녀석이 물어왔다.
“율도국의 유민들, 그러니까 율도촌의 유민들. 그들을 믿을 만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