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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278화 (278/350)

278화

율도촌.

과거에는 율도국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다 망해서 그 난민들만이 우리 집 뒷마당에서 살아가고 있다.

뒷마당에서 기생하기라고나 할까?

그리고,

‘잊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한때 국가를 경영하던 대신들이었지.’

율도국이 멸망하던 날, 정당한 후계자인 홍수월과 함께 탈출한 이들이었다. 당연 한때는 고관대작이라 불리던 이들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이들 특징이 내정에 있어서 최고 적임자라는 뜻이 된다.

게다가,

‘율도국은 이름 그대로 섬나라. 국가에서 마땅한 생산품이 나지 않아 무역으로 먹고살던 이들이었지.’

원래 뭐든 간에 중간 유통 과정이 제일 많이 남겨 먹는다. 그 말인즉, 국가 간 중계 무역쯤 되면 그 수입이 어마어마할뿐더러, 그를 위한 능력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우리한테 가장 필요한 인재들이니…….’

왜 지금까지 그들을 잊고 있었을까.

나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하며, 위혼이와 곧장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정. 저희가 자신 있는 분야로군요.”

홍수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왔다.

“오히려, 저희 같은 유민 출신들을 믿고 그런 중임을 맡겨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 그쪽은 환신(幻神)의 후계니까.”

환신 홍길동.

마교와의 전쟁이 심화되며 쌓은 혁혁한 공로와 업적, 그 무시무시한 신위 등으로 환신이라 추대된 홍길동이지만, 그전까지 그를 칭하던 별호는 바로 동방제일협이었다.

“억울한 이들의 대변자이며 탐관오리의 저승사자, 동방제일협이라 불린 그의 후손이라면, 그야말로 황금 보증 수표잖아?”

“…저희 선조님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순간 홍수월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망국의 유민이자, 그 근본이 되는 국가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의 후손인 그는 자신들의 선조가 기록 말살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고 겪었다.

‘원래 홍길동이 의적 출신이라고 했지?’

저 동방의 조선국에서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있는 자들의 곳간을 훔쳐 부를 재분배하던 의적.

끝끝내 폭정을 일삼던 왕실의 국고까지 털어버린 덕에 조선국은 율도국을 멸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걸 막아선 게 홍길동 단신의 무력이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신선의 경지에 달한 환술과 그가 직접 율도국 주변에 친 진법을 뚫지 못해 조선국은 율도국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마교와의 전쟁으로 홍길동이 전사하자마자 옳다구나 싶어 율도국을 급습하고, 홍길동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지.’

홍길동은 얼자 출신이었다. 서자도 되지 못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는 그런 비천한 태생.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지.’

단순 술법뿐 아니라, 시와 서예에도 능했을뿐더러, 매사에 유쾌하며 긍정적이라 함께 있는 이에게 묘한 힘을 주는 이였다.

‘생각해 보니, 무술도 또 뛰어났던가?’

무술, 학문, 점술, 용병술, 그리고 술법까지.

두루두루 뛰어났기에 국가까지 건설할 수 있었던 위인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었기에, 역사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가는 친구를 잊지 않으니까.”

조금 진심을 담아 말하자 홍수월은 깊이 탄복한 듯 포권을 취하며 말해 왔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 율도국은 선조님이 가지신 일신의 무력에 기대어 국가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후손인 저는 감히 그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술사로서의 경지를 지녔을 뿐이며, 다른 이들은 그마저 없는 상태. 당가에 의탁하신 다른 분들처럼 이렇다 할 무재도, 술법도, 장인도 없는데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적성을 찾아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본가의 내정을 맡아주신다는 건가?”

“예, 물론입니다.”

좋아.

훌륭한 고급 인력을 얻어버렸다.

* * *

율도촌의 인력들을 내정 인사로 받아들인 뒤로, 당가의 행정 체계는 본격적인 개편을 맞이했다.

무려 국가의 내정 및 행정을 담당하던 그들은 단순 고급 인력이 아니라, 고오오오오급 인력임을 과시라도 하듯 아예 체계부터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탄성―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무슨 집단의 행정 체계가 이렇게 근본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극찬, 또 극찬.

우선, 조심스레 업무 인수인계부터 받아가던 그들은 당가가 돌아가는 방식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기 계획서는커녕, 월별 계획서도 없다고?”

“잠깐, 여기 장부가 누락되어 있는데?”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업무 인수인계를 구전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그야말로 문화 충격.

당궁상 하나를 상대로 수십 명씩 모여있던 그들은 정녕 자신이 환술에 걸린 건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어… 그, 뭐가 문제인 거요?”

그르치, 그르치.

저게 옳게 된 당궁상이지.

“아, 아닙니다, 총관님……. 그, 문제랄 것은 없는데…….”

율도촌 사람들은 차마 느그 돌아가는 꼬라지가 개판이라 도저히 일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라고는 할 수 없어 아무 문제가 없다 열심히 고개를 저어댔지만,

‘네가 사람 새끼면 저게 딱 봐도 문제투성이란 걸 알겠지.’

당궁상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돼도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율도촌 유민들에게 말했다.

“필요한 자료는 전부 내어줄 수 있소. 나름대로 지금껏 해온 일 처리 방식대로 한 것인데, 누락된 부분이 있다면 내 채워보리다.”

하지만,

“그… 아닙니다. 혹시 저희에게 하루만의 말미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눈치 챙기라고.

“음… 알겠소…….”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한 율도촌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당궁상을 뒤로 하고 총관실의 책자들을 챙겨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렇게, 하루가 흐른 뒤―

“어이, 김 씨 힘 좀 내봐!”

“여기 쌓아두면 되나?”

“어허! 가지런히 정리해 놔야지!”

벌써 머리에 흰색이 가득한 노인부터, 목장에서 잘 굴러다니게 생긴 중년 아재까지.

외양만 보면 평범하게 유민촌의 구성원으로서 천태만상인 이들은 각기 품에 한가득 서책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엇이오?”

“장부를 새로 만들어왔습니다.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새로운 장부라니…….”

처음엔 이게 무슨 짓들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하던 당궁상이었지만, 곧 서책들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건 대체…….”

“당가의 양식은 익숙지 않기에 율도국의 양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원하시는 양식이 있어 알려주신다면 그에 맞춰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아, 아니… 괜찮소이다. 하시던 대로 해주시오.”

정밀하다.

세세하다.

지금껏 자신이 해오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체계적인 일 처리.

‘벽’을 느껴버린 당궁상은 좌절했고, 영혼이 갈려 나가버린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거수기가 되었다.

“총관님, 이 일 처리는 혹시…….”

“…편한 대로 하시오.”

“총관님, 이 부분의 문서는 중복되는 것 같은데…….”

“…편한 대로 하시오.”

“총관님…….”

“…편한 대로 하시오.”

크으.

의견을 내는 즉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의해 주는 상관이라니.

이것이 진정 천상의 직장이 아닐까?

“어떠냐, 위혼아.”

“이건… 확실히 대단하군요.”

지금껏 당가의 내정을 담당하던 것은 가주인 당위혼과 총관인 당궁상.

어찌 보면 대대적인 인수인계라 할 수 있는 작업에 둘이 함께 참여했고, 그들이 근 일 년 동안 작성해 온 문서들이 고작 하룻밤 만에 훨씬 체계적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물론, 그 작업에 참가한 이가 열 배는 많다는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과 기존 작업을 정리하여 이리 혁신에 가깝게 개편시키는 것은 난이도 자체가 다르지.’

내정 업무를 하는 이들에게 있어 율도촌민들의 일 처리 능력은 가히 눈부신 수준이었으니―

“…내정에 경지가 있다면, 저들이야말로 초절정의 경지에 달한 이들일 겁니다.”

실제로 무인이기도 한 위혼이는 감탄하다 못해 찬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저희가 행했던 업무들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인 줄 알겠군요.”

일간 계획, 주간 계획, 월간 계획으로 일을 나누고, 그걸 또다시 단기, 중기, 장기, 분기 등으로 나눈다.

그렇게 세분화된 업무에 필요한 예산을 각기 분류하고, 수입과 지출을 또 모아둔 서책들이 한가득이니―

“저, 총관님?”

“…왜 그러십니까?”

“잠시 이쪽으로…….”

그동안 숨풍숨풍 구멍 뚫렸던 장부에 대한 보고가 속속들이 올라오며, 평생 자린고비의 삶을 살아온 당궁사의 안색은 시시각각 변모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훌륭하군.”

궁상이 주제에, 멋있는 척하더니 아주 훌륭한 결말이다.

“하하…….”

그 모습에 보다 못한 위혼이도 헛웃음을 흘렸고, 나는 반대로 만족스레 웃으며 물었다.

“어때, 저들에게 내정을 맡기는 건?”

“진작 맡기지 않은 것이 후회될 지경입니다. 저 정도면, 남는 인원들을 추려 형님께서 말씀하신 내정 인사 인재를 교육할 담당으로 배정시켜도 좋을 듯하군요.”

“아, 물론 그것도 겸해야겠지.”

말해 무엇할까.

유민들은 온갖 모진 일들을 겪어오고, 국가 대신으로 활동하며 여러 상황에 대한 경험도 가득했다.

내가 따로 불러내서 슬쩍 언질을 주니 다들 좋다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여 왔다.

“저희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다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르치그르치.

이제 진짜 됐다.

집안이 안정화됐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사랑과 진실, 극독을 뿌리며 온 중원을 누비는 것뿐.

훨씬 발이 풀렸음을 실감하며 나 역시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맞잡아주었다.

“헤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죠.”

칭찬이란 무한정 생산되는 무한 자원이니, 그들을 믿고 있느니 어떤 일이든 지원하겠느니 하는 독려를 마구마구 남발했다.

왜 그러냐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킬 일이 있거든.

“아, 그리고. 혹시 인력에 여유가 있다면 몇 가지 일을 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 힘드시다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물론, 힘들어도 거부하면 안 된답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하자, 지성이면 감천인지 그들은 황공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를 구해 주시고, 이런 높은 자리에 믿음과 함께 맡겨 주신 은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겠습니까. 버선발로 달려가서라도 두 손 보태겠습니다.”

“아이고, 뭘 또 그렇게까지나.”

역시, 대신 출신이라 말이 잘 통하는구만.

“다름 아니라, 제가 요즘 계획하는 사업이 있거든요? 내정이라면 또 내정인데, 이게 참 저희 가문에 아직 무식한 녀석들밖에 없어서…….”

차근차근 그들에게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자, 하나하나 듣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역시, 좀 파격적이긴 한가?’

저마다 눈짓을 하며 숙덕숙덕거리던 그들은, 이내 대표격 하나가 나오며 조심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저… 은인. 말씀하신 부분은 하자면 못할 것도 없긴 합니다.”

“가능하죠? 그쵸?”

“다만… 인력이 조금 필요할 듯합니다.”

“인력이요?”

“예, 그렇습니다. 우선 저희의 안전을 위한 인력과… 그, 아무래도 하시려는 일에는 어느 정도 무력이 소요될 듯한데…….”

아하, 난 또 뭐라고.

“그거야 이미 다 준비되어 있죠.”

인력이면 남아도는 게 인력이고, 애초부터 그놈들을 써먹으려고 생각해 둔 계획이다.

“그럼 가능하단 이야기시죠?”

“그야 뭐…….”

가능은 할 듯합니다.

“그렇죠?”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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