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예? 사업체들을 맡으라구요?”
“그래, 좋지 않냐?”
방계들을 불러 모으고 사업 설명회를 열었다.
사천에서 당가의 입지를 다짐과 동시에 기어오르는 굴러들어온 짱돌들을 쳐내는 원대한 계획.
그건 바로, 남아도는 방계들과 잡룡단원들을 외부로 보내 기루나 주루 등등 사업체들을 하나씩 맡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순전히 이 녀석들에게 맡겼다가는 다 말아먹을 테니, 운영에 관해서는 율도촌의 내정 인재들이 힘을 써줘야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속가 문파의 열화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녀석들이 아직 문파 하나를 만드는 것은 이르니까.’
속가 문파를 하나 만들려면 필요한 것이 참 많다.
기본적인 체계부터 머릿수, 역할 배분이 가능할 구성원, 부지, 돈을 벌 만한 사업체 등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문파를 대표할 무공이었다.
‘무공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몇몇 놈들이 보이지만, 아직은 이르지.’
방계들을 키워낼 때, 나는 의도적으로 녀석들이 쌓아 올린 것들을 무너트리고 처음부터 싹 다 키워냈다.
부족함이 없을 대기만성형의 꽉 찬 육각형을 지향하는 육성 형태는, 원래 그 시간과 자본이 많이 걸리지만 독초들을 꾸역꾸역 먹이고 개량한 심법으로 그것을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완성시켰다.
덕분에 어지간한 난전에도 각자 일 인분을 하게 됐지만, 그 반동으로 개개인이 가져야 할 개성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희석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차이점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무공이란 원래 무도(武道)에서 나오는 부산물과 같은 것.
잘못된 무공을 만들지라도, 일단 한번 경험해 봐야 실패에서 경험을 쌓고 더 나은 무공을 만들며 나아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차양십이수를 통해 완전무결(完全無缺)이란 속성을 맛보아버린 방계들이다.
어설픈 무공이라도 한번 만들고 시도해 봐야 하는데, 자꾸만 익숙해져버린 완전무결함에 대한 각인된 습성이 그것을 저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속가 문파를 만들어도 그걸 상징할 특색있는 무공 하나를 제시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속가 문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그 열화판인 사업체 등을 운영하며 당가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야지.
“내가 협치(協治)니 뭐니 고상한 것은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좀 안다. 머리 쓸 사람들도 적당히 붙여주고 너희들이 재량껏 관리하게 해주마. 즉, 일만 잘하면 적당히 해먹는 건 눈감아주겠다는 소리다.”
어때, 좋지?
“음…….”
“저…….”
“그게…….”
“뭐야, 니들 표정이 왜 그래?”
다들 어째 복잡해 보이는 표정들이다. 나는 완전 좋은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이놈들은 어째 반응이 좋지 않아 물으니, 지명이 녀석이 대표로 나와 의견을 제시했다.
“아니, 저기… 형님, 그거 너무 흑사파 같지 않습니까?”
“……?!”
그, 그런가?
‘생각해 보니…….’
기루나 주루, 돈 좀 벌어오는 사업체에 머리 쓸 만한 놈 하나와 주먹 쓸 만한 놈들 여럿을 보내 관리하게 만든다.
‘그거 완전 흑사파잖아?’
새삼 내가 뭘 만들려 했는지와, 어째서 유민들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근데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흑사파 같으면 뭐 어때? 차라리 잘 됐다. 니들이 사업체에서 상주하면서, 깝죽거리는 놈들 있으면 적당히 만져줘라. 안 그래도, 그런 놈들이 앞으로 많이 나올 예정이거든.”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줬긴 하구나.”
나는 녀석들에게 어째서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다른 대문파에서 본가를 견제한단 말씀입니까?”
“그렇지.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기색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곧 여러 곳에서 당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체에 각종 시비를 걸어댈 거다.”
그건 아마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테고, 그때마다 사람을 보내서야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리 상주시켜 두겠다는 거다. 특히, 저기 잡룡단 녀석들은 완전히 본가에 속한 녀석들도 아닌데 굳이 공짜 밥 먹이며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잖아.”
“…그게 솔직한 이유셨군요.”
한숨을 푹 내쉰 당지명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형님. 그 이유로 저희가 상주해 있다가 분란을 만들면, 그건 오히려 저들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오, 어째서?”
“그야… 형님 말씀대로라면 지금 사천은 본가가 다시금 완전히 실권을 잡아 새로운 이들이 뿌리를 내리기 힘드니, 어떻게든 충돌을 만들어 균열을 일으키려는 게 저들의 속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희가 미리 상주하여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물리친다 한들, 저들의 본래 목표와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일 테니까요.”
역시.
그래도 애들을 이끌어야 하는 당주 입장이라 이제는 슬슬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이 당가의 이름을 달고 싸울 때의 경우지.”
“…예?”
당가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게 문제라면, 당가의 이름을 걸지 않고 싸우면 그만이다.
즉,
“가명(假名)을 쓴다.”
“가, 가명이요?”
“그래.”
하오문에 복검이 있고, 흑점에는 혈전이 있듯 예로부터 큰 집단에는 자신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무력 단체가 꼭 하나씩은 있었다.
다만 집단의 의사 표현을 공식적으로 집행하는지, 혹은 비공식적으로 집행하는지의 차이가 존재했는데, 설령 눈 가리고 아웅 식에 가까운 일일지라도 표면적인 자신들의 평판 관리를 위해 그것들을 꼭 있어 왔다.
‘그리고, 우리도 그걸 하나 정도 만들 때가 됐지.’
언제까지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고 다닐 수는 없다.
높은 곳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뻔히 저놈이 한 것 다 알지만서도 또 은근슬쩍 모른 체 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는 수단 하나둘 정도는 필요로 할 수밖에.
“자,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대형.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말했잖냐. 깝죽거리는 놈들 적당히 밟아주고, 나대는 놈들 적당히 만져준다고.”
“아니, 그거 완전…….”
“이름은… 그래, 잡룡파(雜龍派)가 좋겠구만.”
“…흑사파이지 않습니까.”
반쯤 넋이 나간 듯 흐느껴오는 당지명이지만,
아, 내가 하겠다는데 뭐 어쩌라고.
꼬우면 네가 대형하든지.
어쨌거나, 그렇게 잡룡파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 * *
콰아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거한이 뒤로 나가떨어졌고, 그 여파에 휩쓸려 탁자와 의자가 나자빠졌다.
“끄으으… 이, 이 자식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누구기는 누구야, 피땀 흘려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소상공인의 영업장에서 행패 부리다가 처맞고 수리비 변상해 주실 깡패놈이지.”
“뭐, 뭐라고?! 감히 이 몸 섬서대웅에게 망발을 지껄이다니!!”
거한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술렁거렸다.
“허억, 섬서대웅이라면……!”
“대웅파의 행동 대장으로 유명한 남자일세!”
“대웅파라면… 섬서에서 어지간한 대문파도 알아준다는 성세를 자랑하는 곳이 아닌가!”
별호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격에 빠지는 관중들.
주변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섬서대웅이라 소개한 거한은 조금 전 처맞아서 쭈그러들었던 자신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 이거지!’
내가 누구인가.
최근, 섬서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웅파의 행동 대장 섬서대웅이었다.
‘내 명성이 드디어 사천까지 퍼졌군! 역시, 정천맹에 입맹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어!’
정천맹이 광동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문이 돌며, 그전까지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문파들이 잇달아 입맹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중 대웅파는 가장 선두에 있었다. 그들의 상징인 곰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상당히 영악한 동물임을 증명하듯 입맹과 동시에 곧장 튼튼한 줄을 골라잡았다.
‘우리와 같은 중소 문파들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현무단에 줄을 대고 가지고 온 재물을 쏟아부었다.’
자고로 줄타기는 일찍 할수록 좋은 것이니, 현무단주라는 이는 쉽게 만나기 힘들었지만 그쪽 계열에 속한 여러 문파의 장로와 중진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그렇게, 각 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중소 문파들과 연합체를 구성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문파가 뿌리를 내린 섬서에서도 대웅파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 곰 같은 놈들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침범을 해!”
“허허, 곰 같은 놈? 저 친구 입이 꽤 험하군.”
“그러게 말이야, 우리 친구에게 저렇게 망발을 늘어놓다니.”
“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그 비결은 상부상조.
원래라면 섬서 내에서 비슷한 몸집을 가지고 경쟁하던 상대 문파와 일부러 시빗거리를 만들고,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현무단 계열의 문파들과 연합해 분쟁을 벌이는 것이다.
대웅파 하나만으로도 박빙이던 구도가 비슷한 체급을 가진 문파들이 여럿 달려들자 대치 구도는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했다.
그렇게 한번 대치 구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대웅파는 이때다 하고 독주를 시작했다.
물론, 그 대가로 그들 역시 다른 지역으로 넘나다니며 손잡은 이들을 지원해 줘야 했지만, 그 정도는 추후 얻게 된 명예와 승리의 보상으로 훨씬 남는 장사였기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기에, 최근 섬서대웅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내가 섬서대웅인데! 대웅파의 행동 대장인데, 누가 감히 나를 막을 것이냐!”
아직 청룡단이나 주작단 등에 비빌 수야 없겠지만, 고작해야 주루에서 술을 마시다 안줏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생겨난 불편함을 참지 않고 표출하는 것쯤이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래, 분명 그래야 했는데―
“대웅? 겨우 그 정도로?”
어째,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뭔 별호를 붙여도… 진짜 곰 같은 분은 따로 있는데, 고작 네놈 따위가…….”
“뭐, 뭐라고?! 감히 내 앞에서 별호에 웅(熊) 자를 논하느냐!!”
“…왜 그런 걸로 화내는지 모르겠구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상대가 이내 두 주먹을 들었다.
“네가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모르겠지만, 거 남의 사업장 와서 깽판 놓으면 많이 섭섭하거든.”
“그 무슨… 이 주루가 너희 사업장이란 뜻이냐?”
“응, 몰랐어?”
그 말에 섬서대웅은 정말로 처음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니 그냥 평범한 취객이 난동을 부리는데, 하필 그 취객이 힘깨나 쓰는 놈이라 자신의 눈에 띄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청년은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좀 억울하겠는데.’
원래 자신들에게 주어진 밀명은 최근 주가를 올리는 문파의 무인들을 대놓고 깨부수는 일.
하나하나 밟아주다 보면 기가 죽어서 덜 나대게 될 거라는 교관님들의 지시에 따라 이런 짓을 벌이게 됐지만, 하필 자신의 담당이 어쩌다 운 없이 걸린 사람이란 걸 알게 되니 괜스레 미안해진 것이다.
하지만 어쩔까.
‘술 처먹고 난동부리면 처맞아야지.’
툭툭―
가볍게 두 주먹을 부딪친 청년, 구중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다 네가 잡룡파(雜龍派)의 영역에서 난동을 부린 대가니까. 뭐, 그래도 좀 미안하니 빨리 끝내줄게.”
“이놈이?!”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섬서대웅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꾸에에엑!!”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날아왔다.
“헉! 섬서대웅이 한 방에?!”
“대체 저 청년이 누구기에……!”
사신단주를 뽑는 비무대회 이후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않았던 구중보였기에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웅성웅성거렸다.
그런 대중들을 돌아보며 구중보는 멋쩍게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다들 들으시오! 이곳은 우리 잡룡파가 수호하는 곳이니, 앞으로 그 어떤 무뢰배도 감히 설치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야말로, 훌륭한 선전포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