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80화 (280/350)

280화

사천.

정천맹이 설립된 이후 온 무림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 지역 내에는 최근 가파르게 그 유명세를 떨치는 집단이 하나 있었다.

잡룡단… 아니, 잡룡파.

정천맹 소속 맹외 감찰 집단인 잡룡단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협행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유협과 협객들의 모임이 잡룡단이니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로지 협과 의만을 숭상하며 모인 곳이 바로 잡룡파니까!

그러니까,

“아니, 왜 저를 불러서 잔소리하시냐구요.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소협. 부탁이니 사람 입으로 개소리를 해대는 재주는 작작 부려주게나.”

“와! 개소리! 그게 천하제일맹 정천맹의 주인되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신가?”

잡혀 왔다.

잡룡단이 창설 목적과 취지에 맞게 훌륭히 협행을 행하고 있자니 그 소문은 빠르게 사천 전역에 퍼져 갔고, 얼마 있지 않아 맹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처음에는 웬 개방 거지 놈들이 몰려와 동냥 바구니라도 내미는가 싶었지만,

“…후우, 소협. 이번엔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몰려온 인파의 선두에서 한숨 푹 내쉬는 자영을 보자니 음, 이건 좀 진심이구나, 싶어 얌전히 따라왔다.

그렇게,

“…자네, 나랑 일대일 비무 한번 해보지 않겠나?”

진심 어린 살의를 번뜩이는 정천맹주와 독대하게 되었다.

“비무라뇨. 일반 맹원한테 맹주가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도저히 자네를 베어버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네.”

저기요. 조금 전에 나와서는 안 될 진심이 나와버린 것 같은데…….

“후우, 괴물 같은 재능을 지녔으면 그만한 인성을 겸비해야 하건만, 어찌 괴물 같은 인성을 겸비하였는가.”

이젠 말을 가릴 생각도 없이 내뱉어대던 청원은 속이 타는 듯 스스로 찻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벌컥벌컥 목을 식힌 뒤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인데, 좀 얌전히 지낼 수는 없는가?”

“얌전히요?”

“무척이나 억울하단 표정이군.”

“와, 다른 분들이라면 몰라도, 맹주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방어입니다.”

“자기방어? 요즘은 내가 아는 자기방어의 뜻이 바뀌었나? 임협들을 부려 우르르 주루로 찾아가 술 취한 이의 머리통을 깨버리는 게 자기방어라 불리는 행위인가?”

“에이, 그게 아니죠.”

이 사람이 자꾸만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소극적으로 말하면 자기방어. 적극적으로 말하면 반격이죠. 우리가 한 달간 봉문했던 거 기억 안 나시나?”

“…설마, 그래서 이렇게 했다고?”

“허허, 했다니요. 저는 어디까지나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비록 이번에 녀석들이 새롭게 집단을 만든다 해서 통일된 무공도 직접 만들어주고, 남는 영초로 영약도 대량 생산 후 보급해 줬다지만 잡룡파의 일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스스로 한 협객행일 뿐.

나는 절대 모르는 일이다. 암, 그렇고말고.

“여튼, 이번 건은 눈 좀 감아주세요. 이건 어찌 보면 파벌 싸움. 내부적 정치적 분쟁이야 지금까지의 무림사에 존재했던 연맹이라면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잖아요.”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내정 담당 인원을 새로 뽑았거든요? 덕분에 일 처리가 좀 더 효율적이게 변했는데, 와중에 생긴 유통망 몇 개를 청성 쪽에 챙겨드릴게요.”

쪼잔하게 영약 몇 개 챙겨주고 생색내지 않는다. 통 크게 유통망 자체를 붙여줄 테니, 그로부터 꾸준히 지분도 챙겨 먹고 세력도 넓히면 청성 자체가 강화될 게 분명할 노릇.

‘물어라, 물어!’

청성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다른 사천삼주 둘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린 청원이라면 좋다고 내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계획!

하지만,

“…하아, 됐네.”

웬일로, 청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에이, 왜 빼고 그러세요. 진짜 탈 나지 않게 챙겨드린다니까?”

“정말로 되었네. 내 계획에 그건 독일세.”

고개를 젓는 청원의 어조에는 씁쓸한 맛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근래 들어 종종 떠오르는 생각일세. 나의 대에, 업보를 너무도 많이 쌓았구나… 하는 생각 말일세.”

“갑자기 업보라니…….”

이 양반이 귀의할 때가 되었나?

“과거, 청성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았다네. 비록, 검문으로서는 구파일방 중 말석에 불과했지만, 도문으로서는 민중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곳이었지.”

‘저 눈은…….’

정천맹의 맹주 청원.

그가 지금 보이는 눈빛의 정체는 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회한(悔恨)… 이구나.’

처음 만났을 때, 세속에 찌들어 있던 청원은 어느샌가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하지만 말일세. 어느새 청성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있더군. 그래, 전부 나 때문일세.”

자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타협의와 만가쟁패의 시대에 들어서며 청성의 살림은 좋지 않아졌지. 정파 자체의 위상이 떨어지며 그 피해는 구파일방의 말석인 우리에게도 무척이나 심대했다네. 기부금도 줄었고, 전란의 상처로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아졌네. 상승 무공을 익힌 고수의 숫자도 부족해졌고, 회복할 수단은 요원했지.”

삼십 년 전.

그 아득했던 고난의 시간.

“그걸 살린다는 명목으로 나는 무인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정치가가 되었다네. 그러나… 갖은 협잡질과 정치질로 이룩한 것은, 말석이나마 구파일방의 일익으로서 정파의 거두라 불리던 그 시절만 못하더군.”

금방이라도 아사할 것 같아 마셨던 물은 소금물이었다.

가증은 더욱 커져만 갔고, 괴로움은 더더욱 끔찍해졌다.

“기껏 이룩한 사천삼주라는 체계는 우릴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사천 성내에서 이권 다툼이나 일삼는 개와 늑대 같은 짐승으로 만들었네.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라 여겼지만, 실상은 투견장의 철망이더군.”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선택.

“협의(俠義). 가장 무가치하다 여겼던 그것이, 사실은 본문이 한낱 힘 좀 쓰는 무뢰배들의 집단으로 영락하지 않게 지켜주던,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내버린 것이, 사실은 그들을 인간으로서 살아남게 해주던 최후의 불씨임을 깨달은 그는 분명 몇 날 며칠을 후회했을 것이다.

“…거, 장문인으로서 깨달음이라도 얻은 모양입니다?”

“깨달음이라…….”

청원은 씁쓸히 웃었다.

“글쎄. 내 자네에게 충고 하나 하겠네. 무(武)의 경지가 그러하듯, 이 집단을 이끄는 자리에도 절대적인 답은 없다 여겨지네.”

“지도자로서의 정답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집단이란 끝없이 만변(萬變)하는 인간 군상이 모인 것. 그 구성원이 달라짐은 그 집단이 달라짐을 뜻하고, 그 집단이 달라짐은 집단이 속한 환경 자체가 달라짐을 뜻하네. 그러니 어찌 지도자로서 내릴 선택에 정해진 답이 있겠는가.”

덤덤하게 내뱉는 말들이 깊게 와닿았다.

그 이전, 연공실에서 홀로 고민하던 화두와 그가 내뱉는 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나 역시 조금 마음이 뒤숭숭해질 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내건 기치도 후대에는 변할 것이고, 또한 내가 저지른 실수도 후대가 똑같이 벌하겠지. 그런 것을 세대의 교체라 한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중용(中庸)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는 것뿐이라 생각하네.”

“헛참. 진짜 우리 맹주님 도인 다 되셨네.”

아주 도를 깨우쳐버리셨어?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백정의 업(業)에도 도(道)가 있듯, 결국 삼라만상에 도(道)가 있음이 아닐까 싶어.”

장난치듯 던진 말에도 청원은 알 수 없는 현기가 깃든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똑바로, 저 앞을 향해 일직선상을 걸어왔다 생각한 길이, 돌아보면 굽이진 산길이듯. 현재의 내가 내린 선택의 답을 아는 것은 미래의 나 자신뿐일세. 심지어 그 미래의 나조차 더 미래의 나 자신이 판별할지니, 집단의 수장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지금 현재 최선을 다할 뿐일세.”

“음…….”

어째서일까.

나를 만나 본심을 털어내는 청원의 저 모습에,

“형님. 저희는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부나마 사유 녀석이 겹쳐 보인 이유는.

“…….”

많은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자,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청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본의 아니게 말코도사 노릇을 해버렸군.”

허허허.

처음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그 역시 한때의 바람으로 터부하듯 흘려넘긴 그가 이어 말했다.

“이리 말한다고 한들, 사실은 이 늙은 도사 역시 욕망은 있음이고,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는 중이지.”

“…뭐야, 나 몰래 꿍쳐두는 딴 주머니라도 있었답니까?”

“아까 말했던 대로, 내 업보를 청산하고자 하는 일의 연장선상일세.”

업보 청산?

“알고 있나? 나는 지금 점진적으로 청성의 이권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네. 그리고 다행히도, 그대들이 사천을 발전시키고 경기를 회복시킨 덕에 기부금의 액수가 늘어 문파 운영에는 큰 무리가 없는 수준이지.”

“…그러고 보니.”

분명 어지간한 놈들은 내가 다 대가리를 깨버렸다 생각했는데, 자꾸만 신생 사업체가 들어오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그게 동맹의 대가로 남겨준 청성의 사업체였구나.’

“그렇게 다 퍼줘도 되는 거예요? 집단의 힘은 가진바 무력과 금력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대신하여 도문으로서 정신적 지주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민중들에게 정신적 안식처가 되고 싶네.”

“…아니, 진짜 뭐 잘못 드셨어요?”

갑자기 이렇게 변하니 내가 다 무섭잖아.

“무얼, 나는 충분히 이성적일세. 어차피 그대들이 있으니 무문으로서 청성이 최고가 되긴 글렀으니, 도문으로서 제일이 되려 하는 것이네.”

“…아.”

그 말을 듣자니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되겠어요?”

“후후, 물론 나의 대에는 불가능하겠지. 내가 쌓아 놓은 업보가 워낙 많으니, 민중들이 다시금 청성에 마음을 열고 어느 순간에도 변치 않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릴걸세. 하지만 뭐 어떠한가. 나의 사후에라도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이 양반… 어지간히 힘든 길을 가고 있구만.’

보상받지 못하는 길이고, 보답받지 못하는 길이다.

청원은 지금껏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혜택과 특혜를 내려놓고, 앞으로의 보상조차 거부하며 업무에 모든 걸 바칠 생각이었다.

그가 늙어 죽기 전까지 청성을 삼십 년 전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던 도문으로 되돌리기 위해 정천맹주로서 업을 다할 생각이었고, 그 과정에서 배신감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이 자신의 행동이 위선이라 손가락질해도 그저 감내할 생각이었다.

죽을 때까지 보답받지 못할 길을 걸어갈 노인의 모습이란 실로, 무채색의 그것과 같았다.

“…해서, 다음에 그 거룩한 뜻을 이어받을 후계는 정했답니까?”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진혁수?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요즘 통 보이지가 않던데…”

“밖으로 돌리고 있네. 주로, 사람을 해하는 산짐승을 퇴치하거나 아직도 패악질을 부리는 사파의 금수들을 토벌하는 일을 하고 있다네.”

“허참, 보통 자기 문파 후계는 챙길 거 챙겨주고 요직에 앉히지 않아요?”

“글쎄. 그 아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무엇이 좋을 게 있게나. 자네들 같은 괴물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기죽지만 않으면 다행인 일이지.”

괴물이라니, 거 말 심하게 하시네.

“그 아이는 수천 번의 다듬질로 연단되는 검일세. 지금은 자네들에 비해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언젠가 그 목전에 칼날을 들이밀 정도는 되겠지.”

한때 경쟁 관계라 여기던 청년을 향해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린 이는 무던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한때 함께 이권 다툼을 벌이다 깨져버린 경쟁 상대라 여겼던 이가 어느새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돌아와 버린 모습.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청성의 영화가 족히 백 년은 넘게 이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에,

“그것참… 무시무시하네요.”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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