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81화 (281/350)

281화

할 일을 다 했다.

음, 이렇게 말하면 내가 부활한 천마 목까지 따버리고 모든 일을 끝맺은 것 같으니 표현이 요상하구만.

다시 말해 보자.

“할 일이 없구만.”

그래, 이게 제일 정확한 표현이다.

“내정은 성공적으로 개편됐고, 갑자기 도를 깨달아버린 영감님한테 가서 마음껏 활개 쳐도 된다고 비공식적인 협조까지 받아냈으니…….”

지금도 한창 사천 시내는 떠들썩하다.

잡룡파라는 뒷배를 매단 녀석들이 주루나 기루같이 주로 돈 되는 사업장에서 마음껏 힘을 쓰고 있고, 덕분에 어설프게 끼어들려던 이들은 사지 한쪽이 예쁘게 분질러진 뒤 쫓겨나고 있다.

그들의 활동 범위가 당가의 영역권과 겹친다는 사실은 어지간히 뇌 기능이 부족하지 않은 이상 공공연한 사실.

진짜 덩치가 큰 세력은 자신들의 체면 때문에라도 이런 걸로 충돌하길 우려하고 있고, 덩치가 작은 놈들은 우리와 부딪히길 꺼리기에 다시 얌전해졌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얌전해 졌을 뿐, 툭 하면 이권을 노리는 집단답게 심심치 않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고 있으나…….

‘그 정도는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지.’

하필 녀석들이 음모를 꾸미는 곳이 사천이라는 게 그들에게 불운한 점.

하오문 사천지부가 진작에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린 텃밭이 이곳이다.

용독문이 날아가고 사천삼주가 와해되는 동안 그 빈자리 곳곳에 추가 확장까지 완료해 낸 지금은 사실상 열 명 이상 모여 무언가 집단행동을 꿈꾸고 있다면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는 상태.

‘문제가 생기면 하가 놈이 어련히 말해 주겠지.”

이젠 운명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관계가 됐으니, 내가 알아야 될 일이 있다면 어련히 말해 주지 않겠냐고.

“에잉, 쯧. 이것도 일 중독이야, 일 중독.”

할 게 있으면 할 게 있는 대로 짜증이 나고, 할 게 없으면 할 게 없는 대로 뭔가 허전하니, 마음이가 여간 밍숭맹숭한 게 아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작해야 뒷방 노인네마냥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며, 그 위로 지나가는 새를 태운 강아지 한 마리를 관찰하는 것밖에 없지.

“헥헥.”

“삑삑!”

세상에나.

진짜잖아.

개가 새를 태우고 지나가다니, 저거야말로 개새…….

대애애앵……!

“응?”

내가 생각해도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을 때,

대애애앵… 대애애앵……!!

우렁찬 종소리가 당가 전체에 퍼져 나갔다.

“저건…….”

실로 오랜만에 듣는 종소리.

그것은―

“…일이 생겼네.”

그리 길지 않던 무료를 깨는 신호탄이었다.

* * *

율도촌의 난민들이 내정 인사로 대거 채용된 후, 그들은 그간 실직자 시절의 한을 풀듯 각종 안건들을 제시했다.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계속해서 소처럼 일하다가도 실직자 신세가 되니까 뭔가 마음이 허하다. 그런데… 무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대소 신료들이 실직자 신세가 돼서 남의 가문 뒷마당에 얹혀살아 갔다면 어떤 기분이겠냐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가 이제야 뭔가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된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날뛰며 당가에 보탬이 될 만한 이런저런 제도를 시행했으니―

개중 하나가 바로 신문고(申聞鼓)였다.

“과거 어느 대국에 존재했던 상소, 고발 제도의 보완책입니다. 거대한 북을 설치해서 누구나 이걸 두드리면 임금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즉, 당가 앞에 설치하면 당가의 가주에게 직접 원통함을 알리는 장치라는 뜻.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질적으로 별 효용이 없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걸 두드리면 다른 이도 아닌 당가의 가주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데, 만약 실없는 일이라거나 별 볼 일 없는 일이라면 오히려 곤장을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걸 설치함으로써 우리들은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평판과 명성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실질적으로 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바로 그것입니다!”

일 안 하고 명성은 챙겨 먹기.

그거 완전 내 취향이잖아?

“후후, 설마, 어떤 이가 당가의 가주를 함부로 불러내겠습니까!”

‘맞는 말이지.’

그래, 어떤 양반이 감히 당가의 가주 보고 직접 오라고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가주님!! 제발, 제발 저희 마을을 구해 주십시오!!”

땅바닥에 엎드린 중년인이 대성통곡하고 있다.

무려 당가의 가주전 앞마당에서 통곡하고 있는 이는 남루하기 짝이 없는 행색을 하고 있는 중년인.

딱 보기에도 농업 종사자로 보이는 남자가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어댔다.

“…….”

아니, 아저씨야. 이거 두드리는 사람 없다며?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입 꾹 다물고 눈빛만으로 대답하는 난민 아저씨였고, 그 옆에서 홍수월은 허허로운 웃음으로 그저 먼 하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여,

“무슨 일이십니까.”

각설하고, 우리의 대협 기질이 풍부한 위혼이는 주변인들이 불편한 시선을 교환하든 말든 홀로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농부 아저씨에게 집중했다.

“크흑! 저는 서안에서 온 구산모라고 하는 놈입니다. 평생 밭을 일구며 살아왔고, 작은 마을이지만 정말 좋은 이들과 함께 살았기에 넉넉함은 몰라도 부족함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저희 마을의 그런 작은 평화가 송두리째 날아가게 될 일이 생겨 버렸습니다.”

농부 아저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도저히 참지 못할 원한의 대상을 떠올리듯 주먹을 꽉 쥐며, 씹어뱉듯 그 이름을 뚝뚝 뱉었다.

“의협맹(義俠盟). 그들이 저희 마을의 평화를 박살 낸 주범입니다!!”

“…의협맹?”

“아시는 곳입니까?”

“아니…….”

그게 어디 붙어 있는 지잡 조직이냐고.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위혼이 녀석도 나를 돌아보며 슬쩍 눈짓으로 물어오지만,

‘나도 몰라, 인마.’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기억해야겠니?

“흐음.”

의도를 이해한 위혼이는 다시금 농부 아저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조직 이름이군요. 다만 맹이 붙은 것을 보면 연맹인 듯한데… 어찌 된 일입니까?”

“아… 아마 모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협맹은 신설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곳으로, 서안의 크고 작은 문파들이 연합한 연맹입니다.”

“사파 계열입니까?”

“그, 그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정파의 중소 문파들이 모인 연맹입니다.”

“정파가 모인 집단이란 말입니까?”

“그렇… 습니다…….”

“허.”

위혼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파도 아니고 정파가 작은 마을의 평화를 부서트렸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위혼이의 표정을 보자 농부 아저씨는 다급히 소리쳤다.

“저,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진실입니다!! 그들은 악랄한 고리대금으로 저희 마을을 유린하고 또 파괴했습니다!!”

“고리대금이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농부 아저씨의 설명은 이러했다.

“처음 그들의 방문은 호의로 가득했었습니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이른 시간부터 일어난 이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돕다가 저들끼리 보며 비석차기를 하며 놀던 어느 날.

아낙네들이 밥을 짓기 시작하는 노을이 찾아오던 그때, 그들도 함께 찾아왔다.

“예? 곡식들을 이리도 저렴하게 빌려주신단 말입니까?”

“후후, 그리 저렴한 것도 아닙니다. 전부 투자의 일환이니까요.”

“투자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선,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의협맹 군사부에 소속된 선무열이라는 사람입니다.”

“의협맹…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서안의 안전을 위하여 크고 작은 중소 문파들이 함께 뭉친 곳입니다. 백의방, 거열방, 삼도문 등의 이름은 들어보셨겠지요?”

“헉! 서안을 주름잡으시는 대방파들이 아닙니까!”

그가 읊은 이름들은 서안에 살고 있다면 설령 무지렁이 산골 촌민이라도 한 번씩은 들어본 거대 방파들의 이름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는 서안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뭉쳤고, 서안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함께 투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주변 마을들에 곡식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합당한 삯과 이자를 받으려 합니다.”

선무열이라는 이는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다행히 농부 아저씨는 외부인이 왔을 때 대표로 나설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이율이 고작 일 할이라니!”

곡식이 귀한 시대다.

일 할이면 솔직히 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크게 많은 수준도 아니었다.

“이게 정말입니까?”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지요. 다만, 그 밑의 조항을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약속된 기일까지 제출하지 못한다면 이율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연체된다?

그럼 당연히 갚아야 될 돈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조항이 없다면 너무 퍼 준다 싶어 의심했을 노릇.

“필요한 만큼 빌려 가시고, 그에 합당한 만큼 갚으시면 됩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만큼 보증거리는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 마을은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보증으로 내세울 것들 역시 마을의 공동 자산이 되었다.

마을 전체가 함께 빌린만큼 그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갚으면 되는 거잖아?”

기일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율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니니까.

그들은 그렇게 곡식을 빌렸고 농사를 재개했다.

어차피 그해 빌린 곡식을 그해 수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심은 곡식들은 다음 해에나 수확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한에 갚아야 할 대금은 원래 창고에 쌓여 있던 것들에 한하겠지만, 그걸 감안해서 빌렸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늘어난 논마지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고, 덕분에 노동 효율도 부쩍 늘어났다.

영차영차 일하기만 하면 내년에 풍작이 확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어깨에 힘이 안 들어갈까!

그렇게 그해 가을 최고의 풍작을 거둬낸 마을 사람들은 기쁘게 대금을 준비했다.

수레 가득 대금으로 갚을 곡식을 준비하고, 마을에서 힘 센 장정들을 뽑아 수레를 지키게 만들었다.

그들 모두를 잘 먹인 뒤 수레를 출발시켰고, 그걸 진두지휘하던 농부 아저씨는 어렵지 않게 선무열이 알려준 반환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저기구나!”

반환소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그곳을 향해 수레를 끌고 가는 농부 아저씨의 입가에는 미소가 차올랐단다.

“좋은 곳이구나.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어.”

난세.

이 혼란한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만한 이들을 만났으니, 이 어찌 좋지 않으리.

어서 빨리 빌린 곡식을 갚고, 또 곡식을 빌려 밭 마지기를 늘리면 마을의 경제 사정도 쭉쭉 나아지리라.

“그럼 그 돈으로 소도 사고 말도 사자.”

농사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축도 키우며 새끼를 치면 마을의 크기도 점점 더 커져 나갈 것이다.

평생 마을에서 살아온 농부 아저씨는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며 꿈을 키워 나갔다.

대금을 반납하는 곳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게… 뭐지……?”

임시휴업(臨時休業).

대문짝만하게 적힌 글귀가 그들을 반겨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