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83화 (283/350)

283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빵실이가 당가에서 삼 년을 지내면 독과 암기를 날릴 수 있다는 말로, 먼저 온 삑삑이는 이 년 하고도 반년만 지내면 만천화우를 갈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 잠깐만. 위혼아, 내 방법이라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공식적 출정이 힘들다면, 비공식적 출정을 나가는 수밖에.”

X팔, 암만 그래도 일 년 만에 이건 너무하잖아.

어디서 많이 본 복면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는 녀석을 보자니, 새삼 이 녀석이 아직 스물도 되지 못한 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장 과정의 주변 환경이 인간의 자아 완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더니…….’

당사유 때야 녀석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뒤였기에 내 행동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하지만 위혼이는 내게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면을 꺼내 챙기더니 뒤로 걸어가 걸려 있던 장식용 예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지옥참마도(地獄斬馬刀). 뽑을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거늘.”

스릉―

말도 썰어버릴 참마도가 서늘한 예기를 뿜어냈다.

“…너, 그거 휘두를 줄은 아냐?”

“이런 날을 대비하여, 도법(刀法) 역시 절차탁마 수련해 왔습니다.”

날 선 예기 위로 푸른 도기(刀氣)가 생겨났다.

검수로서도 절정 이상의 경지에 달했다는 증거.

“가시죠, 형님. 이번엔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방법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으니까.”

* * *

“예? 저희보고 서안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됐다.”

당장에라도 서안까지 찾아가려는 당위혼을 진정시킨 뒤, 녀석의 앞으로 방계들을 전원 소집시켰다.

“갑자기 서안은 어쩐 일입니까?”

“얼마 전에 신문고가 울린 것을 다들 들었을 거다.”

“아, 그 북소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

녀석들에게도 농부 아저씨가 겪었던 일들을 얘기해 줬고, 한바탕 기가 막힌 사연을 청취한 방계들은 곧장 격분하며 들고 일어섰다.

“아니, 뭐 그런 개자식들이!!”

“이런 천하의 나쁜 놈들이 다 있다는 말입니까!”

못 먹고 못 배우고 자란 주제, 하필 싹튼 환경이 이놈의 호구 가문이라서 그럴까?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화내는 녀석들을 보자니 마음속이 텁텁해졌다.

“해서, 우리들은 공식적으로 도울 수 없는 입장이다. 정천맹이 의와 협으로써 정파의 새로운 기둥을 자처하는 이상.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다른 문파에 대한 간섭은 세간에 결코 이롭게 보일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정녕, 방법이 없는 겁니까?”

“없다. 공식적으로는.”

단호한 답에 녀석들은 크게 반발했다.

“뭐, 그런……!”

“그게 말이 되는 소리십니까!!”

“변했습니다!”

변하긴 뭘 변해?

“없다고. 공식적으로는.”

“…예?”

“비공식적으로는 있지.”

없으면 큰일 내니까.

우리 가주님이.

“당지명.”

“예, 형님.”

“네가 서안에 좀 다녀와야겠다.”

“……?!”

녀석의 눈이 개 풀을 처음 본 빵실이처럼 크게 뜨였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 단, 네 녀석들만 가야 한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긴.

“너희 잡룡단은 공식적으로는 정천맹 내부의 신분이 아닌 맹 외의 신분이다. 맹의 밖에서 맹의 청렴함을 감찰해야 하는 직위다. 그렇기에 맹 외로 돌아다녀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니까, 그 신분으로 서안에 가라. 단, 당가의 꼬리는 떼고.”

“…그 말은, 본가의 지원은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잘 아는구나. 네 녀석들이 무슨 멍청한 짓을 하다 잘못돼도, 본가에서는 그 연관성을 단호히 부인할 거다.”

만약 잡혔을 때, 당가에서 시켰냐고 물으면 우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거라는 소리다.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다.”

다른 때라면 왜 이렇게 묻는 게 많냐며 뒤통수를 갈겼겠지만,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잡룡단은 어찌 됐건 정천맹 소속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해도, 네 녀석들이 정천맹 맹 외 감찰단으로서 업무를 봤다고 하면 당가의 연관은 지울 수 있다. 일의 시초가 당가에서 정천맹으로 덤터기 씌워지는 거지.”

누군가 너희들이 왜 거기 있었냐고 소리쳐도, 네놈들이 거기서 수상한 짓거리를 한다는 증거가 있어서 왔다! 하고 당당히 맞받아칠 수 있다.

증거?

그딴 거야 만들면 되지.

“두 번째. 진짜 잘못됐을 때는, 그 신분이 너희들을 보호해 줄 거다.”

“예?”

“솔직히, 본가가 이제는 제법 명성 좀 떨치지만, 그 시작은 고작해야 일 년밖에 되지 않는다.”

정파라는 놈들이 근본 하나는 더럽게 따지거든.

“본가가 전성기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우리는 명성을 떨친 게 고작해 봐야 일 년밖에 되지 않은 가문. 사천이라면 몰라도 인근 성내에서는 잘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따지면 정천맹은 더 하지 않습니까?”

“걔들은 다르지. 우리 말고 다른 애들이 있잖아.”

“아…….”

정천맹 자체야 고작해야 반년도 안 된 응애라지만, 그 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집단은 근본력 넘치는 명문 대파들.

마교대란 이후, 구파일방의 그 영향력이 대폭 하락했음에도 상대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오대세가 중 둘이나 끼어 있음은 물론, 떡락했다 해도 그 이름값은 남아 있던 구파일방의 상당수가 끼어 있는 게 지금의 정천맹이다.

‘그쪽도 생긴 지 일 년밖에 안 된 응애라면, 눈치 볼 수밖에 없지.’

“참고로, 나는 못 가준다.”

“일이 있으십니까?”

“시선을 끌어줘야지.”

나중에라도 저 녀석들의 행보가 괜히 건수가 잡히면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깽판을 치며 잡룡단의 존재감을 확실히 남겨줘야 했다.

“잡룡단이 의도적으로 서안으로 간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저히 본연의 임무를 다 하기 위해 움직이다 서안까지 간 것으로.”

그 잡룡단을 이끄는 노사부가 정천맹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 다닐수록, 그 안정성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고.

즉,

“이번 임무는, 처음으로 너희들끼리 해내야 할 임무가 되겠지. 할 수 있겠느냐?”

“그건…….”

처음으로 주어지는 단독 임무.

항상 내가 가자는 대로 여기저기 이끌려왔던 방계들은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바라던 바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당지명은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맡겨 주신 임무. 반드시 완수해 오겠습니다.”

그렇게, 녀석들이 서안으로 떠나갔다.

* * *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뭐가?”

“처음으로 온전한 책임을 맡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방계 녀석들이 떠나가고, 덕분에 텅 비어버린 차양당 연무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위혼이 녀석이 다가와 곁에 섰다.

“뭘 그런 걸로.”

조금은 걱정기가 담긴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다. 녀석들을 평생 품에 안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크면 알아서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할 놈들이지. 지금이라면 오히려 괜찮을지도 몰라.”

이전처럼 직계의 수가 많고 방계의 수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일 때라면 모를까.

몰락했던 당가를 다시금 재건할 의무가 있는 녀석들은 좋든 싫든 크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걱정되는 놈들도 없지 않아 있지만, 결국 하나하나가 스스로 종사가 되어 당가의 속가문을 만들고 일으켜야 하는 게 녀석들의 책임이다. 당가의 방계로 들어왔으니,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

지금처럼 웃고 떠드는 것은 어린 날의 추억이면 족한 것. 언제가 되었든, 어미의 품을 떠나 둥지 밖으로 날아가야 하는 것이 녀석의 필연이기에 지금의 예행연습이면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청원. 그 양반의 심정이 이러하려나.’

이미 그 양반은 자신의 후계로 점찍은 진혁수를 사천 밖으로 돌리고 있다 들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녀석들과 부딪쳤을 때도 자신들이 속한 성을 벗어나 다른 권역에서 수행하는 작전 중이었으니, 어쩌면 방계 녀석들 역시 진작 단독 임무 수행의 경력을 쌓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별일 있겠느냐? 어디 구파일방 상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지역 문파 몇 놈들이 뭉친 곳에 찾아가는 건데.”

서안은 청해와 사천, 섬서 사이에 낀 곳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있는 곳도 아니고, 하다못해 사파의 구패인지 나발인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모르겠지만, 그 안에 이름 높은 무림 문파는 하나도 없었다.

‘있다고 해봐야 딱 하나 정도지만, 그놈들은 무림 문파라고 하기는 힘드니까.’

속세에서 벗어나 은둔 생활에 가깝게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 있기는 했다.

비록 사파는 아니지만, 그 음침함과 속을 알 수 없는 꿍꿍이만을 따지자면 사파보다도 더한 놈들.

그러나 그들은 마교의 대란 당시에도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만큼 속세와 담을 쌓은 놈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따로 경계할 곳은 없겠지.’

나름대로 이런저런 계산을 다 내리고 한 결정인 만큼 걱정할 일도 없다.

“그렇습니까? 그리 생각한다면 다행인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 가주님이야 말로 걱정 안 되시려나? 녀석들만 밖으로 보내는 것 말이야.”

“저는 그들을 믿습니다.”

“응?”

장난스럽게 묻자, 즉답이 돌아왔다.

“가주로서 제 역할은 가솔들을 믿어주는 것.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이 할 수 있으리라 믿고 밀어주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덤덤히 말하는 녀석의 눈빛은 무척이나 담담하고 또 단단했다.

단순히 그럴듯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의무가 그것이라 확신하는 듯한 말에는 이미 자신의 책임을 깨우친 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위혼아…….’

그 사실에 조금 놀랐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대견한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형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중원 전역이 좁다고 횡단하심을 그저 이 자리에서 응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긴…….”

녀석 입장에서 보자면 나나 다른 녀석들이나 전부 자신이 지키고 이끌어야 할 가솔이었다.

지금이야 당가가 크게 번성하고 인구도 많았지만, 초창기에는 나랑 방계들을 빼면 더 이상 남는 인원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나마 장인촌에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

무림 문파로서 최소한의 기틀을 유지하게 해주던 나와 차양당 전부가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데도, 매순간 매순간 지켜봐 주던 것은 대체 어느 정도의 정신적 강인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일까?

새삼스레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곁에 앉아 있던 위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옷을 털었다.

“가려고?”

“감정이 격화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아직 제게 할당된 업무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의 고집을 위하여 가솔들이 고생하는데, 가주된 이로써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걱정되었기 때문인지.

굳이 자신의 바쁜 일과 중에 와서도 내게 몇 마디 응원을 던져주고 사라지는 녀석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녀석들은 완연히 믿고 있을까?

그 사실을 인지하니 마음 한편이 괜히 불안해지며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에잉, 쯧.”

애써 혀를 차며 고개를 휘저어보지만, 쉽게 털어 내지지 않는 그런 마음.

결국,

“그래, 나도 가만히 있어서 뭐 하냐?’

녀석들이 활동하기 좋게 주변의 이목이나 끌고 다녀야지.

“알아서 잘하겠지.”

설마, 별일 있기야 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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