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서안, 의협맹.
예전에는 그곳을 구성하던 이들을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보았지만, 이젠 단 하나로 정리되었다.
거열방.
구파일방 오대세가 하나 없는 서안 땅의 패권을 움켜쥔 패주요, 두 주먹 하나로 서안 땅을 평정했다는 권사, 거열권(巨烈拳) 진태가 설립한 문파였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그리고 지금, 그 서안의 주인의 표정은 실로 참혹했으니,
“그, 그것이…….”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군. 이건 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어.”
온갖 복잡한 표정을 짓다 한숨으로 내쉰 그는 결국 씹어뱉듯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첫 번째는 그놈들이 어지간히 우리를 무시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놈들이 상상 이상의 미친놈들이란 거겠지.”
진태의 말에 그의 앞에 고개 조아린 거열방의 총관, 이대유는 얌전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젠장, 왜 그런 미친놈들이 하필 이곳에 쳐들어와서…….’
시작은 얼마 전 서안 땅으로 찾아온 사천의 외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 * *
며칠 전.
“뭐? 사천당가의 사람들이 왔다고?”
“정확히는, 잡룡단이라고 불리는 이들 같습니다.”
“잡룡단이라고?!”
잡룡단.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 악명은 이미 전 무림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잡룡단이라면, 현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주군. 그들은 이전까지 사천에 군림하던 세 마리의 호랑이, 사천삼주를 완전히 와해시키며 등장한 사천당가의 무력대이며, 정천맹을 이루는 데 주축을 이루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이라… 소문은 쉬이 믿을 게 못되지.”
이 무림에서 소문이란 때로는 축소되고, 때로는 부풀려지며, 또 어떨 때는 와전되기도 한다.
소문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고, 때문에 거열방이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서 가장 경시했던 것이기도 했다.
“필요한 것은 소문이 아닌 정보. 총관, 내게 보고를 올릴 정도면 그들에 대한 정보까지 수집해 놓았겠지?”
“물론입니다.”
거열방이 어찌 서안에 홀로 우뚝 선 패주가 되었겠는가.
우선 거열권 진태의 무력이 크게 작용했지만, 총관 이대유의 행정 역시 크게 한몫 차지했었다.
‘나는 방주님을 서안의 제일로 만들기 위해 그림자를 자처해 왔다. 그리고 그림자 역할에 충실했지.’
남들은 알지 못하는 이대유의 노력은 실로 눈물이 다 나는 것이었다.
서안의 흑사파들을 짓밟음과 동시에, 우두머리 잃고 분해된 그들을 흡수하여 새롭게 재조립하고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다. 비공식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들, 거열방의 잡티가 생겨서는 안 될 일들, 그런 것들을 대신할 은밀한 검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뿐만인가?
‘정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안의 하오문과도 손을 잡았지.’
서안에 속한 문파들이 으레 그러하듯, 서안에 있는 하오문 역시 다른 지방에 있는 하오문 지부들에 비하면 정보력이 떨어지고 세력이 열세라는 게 아쉬웠지만, 그만큼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걸 채워주며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냈다.
그 결과, 거열방이 의협맹의 이름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서안 내에서는 누구보다 두터운 정보망을 설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번에도 잡룡단이라 불리는 외지인들이 서안 땅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들을 포착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즉시 이대유는 잡룡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잡룡단. 그들은 구성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대주로 불리는 당지명은 현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검룡도호의 검룡과 박빙을 이루어냈으며, 그의 동생 중 하나인 당불퇴는 마찬가지로 검룡도호의 도호와 용호상박을 펼쳤다고 합니다.”
“검룡도호… 그 위명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후기지수가 아닌가?”
후기지수는 일반적인 무인보다 더 큰 기대와 명성을 얻는다.
왜?
그건, 그들에게 더한 미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후기지수란 지금도 뛰어나지만 후대에 더 뛰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받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며 원 실력보다 더한 명성을 얻게 되지. 그 말은 반대로, 지금은 감히 용이니 호랑이며 불릴 정도는 아니지 않겠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인 후기지수들이 아닙니다. 하오문의 정보에 따르면 이미 그들은 개개인이 녹림칠십이채와 지금은 비록 와해되었다 해도 한때 구천에 소속되었던 장강수로채와 맞상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허… 구천의 세력을?!”
말도 안 되는 배포와 무력이었다.
그들은 일신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구 사파의 지배자, 구패의 일익들이었으니, 거열권 진태는 그들이 걸어온 행적에 입술을 곱씹으며 흉흉한 안광을 빛냈다.
“그런데… 그런 이들 둘을 상대할 만한 이들이 고작 하나의 무력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건, 그들 잡룡단은 서로를 호형호제하고 지내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단주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는 것입니다.”
“……!!”
무림에서 연배와 서열은 절대적인 것.
그것은 단순히 정파에 내려오는 딱딱한 예절과 풍습 때문만은 아니니, 그들 사이에 극명한 무공 경지의 고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말은 이리 해석될 수도 있다.
“설마… 잡룡단이라 불리는 이들 개개인간에는 큰 무공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감히 추측하기 불가해한 일이지만… 제가 조사한 정보대로라면 그렇습니다.”
이대유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굳었다.
“당장 당불퇴라는 자의 직급은 마땅히 부단주나 부대주라는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단주라는 직책만 있고, 나머지는 서열상 동급. 당시 후기지수를 위한 비무 대회가 한 문파에서 둘만 참여하는 것이 규정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잡룡단 서른셋이 전원 참석했다면 그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 정보를 다루는 이들 사이에선 통설이라 합니다.”
“허어…….”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물론 이것은 대부분 오해요, 정보 공작의 결과였다.
사천당가가 막 부활을 꿈꾸고 있을 당시부터, 하윤호가 자신들의 투자처가 쉽게 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구마구 악명을 부풀리고 다녔으니, 지금은 그 눈덩이가 데굴데굴 굴러가다 못해 거대한 설산을 이룬 수준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둘은 그 정보에 대한 의심보다는 추가로 들어온 정황에 따라 자체적인 눈덩이 굴리기를 시행할 뿐이었으니,
“그 증거로 그들은 정천맹 내부에 속한 다른 문파들에게 사정없이 시비를 걸고 다닌다고 합니다. 마치, 일부러 그들과의 분쟁을 요구하듯 말입니다.”
“무슨… 그건 너무 정신 나간 짓거리가 아닌가?”
연맹이 이루어지면, 그 연맹 내에서 서열 정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무척이나 은밀하고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니, 직접 자신들과 동급의 세 문파를 합쳐 의협맹을 이루어내고 그 안에서 정쟁을 거쳐 이 자리를 쟁취해 낸 진태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장 나만 해도 지금 고개 숙인 다른 두 문파의 장문인들보다 무공으로서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총관의 조언에 따라 조심스레 합병 과정을 진행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암만 사천이 그들 당가의 영역이라 해도 그곳에 들어찬 문파는 하나하나가 당가의 밑이 아닐 텐데 어찌 그런 일이 쉬이 일어나겠나?”
진태의 지적은 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주장이었다.
하나,
“그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총관은 자신의 의견을 부정했다.
“사천당가가 이전에 다 몰락했던 그 가문이 아닙니다. 세간의 사람들은 삼십 년 전 마교의 공세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요즘 들어 정보를 다루는 이들은 또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합니다.”
“또 다른 주장?”
“사실 당가는 삼십 년 전에 피해를 입긴 했어도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까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고.”
“복수의 칼이라니…….”
대체 누구한테?
“마교라면 이미 멸망한 곳이 아닌가?”
“마교가 아닙니다.”
“그럼?”
“정파입니다.”
“……!!”
총관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비록 삼십 년 전 그 참혹했던 전란의 기억은 생존자가 많지 않아 대부분 말소되었지만, 이후 각 문파들의 행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가 남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에 따르면, 그때 함께 했던 정파의 대부분이 사천당가가 겪은 난(難)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군, 어느 정도 그려지는군.”
그 말을 듣자 진태의 머릿속에서도 한 폭의 그림이 그려졌다.
“사천당가는 마교의 겁난에 가장 선두에서 맞서 싸웠던 이들. 그런데 자신들이 온갖 상처를 입으며 지켜주었던 이들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았으니 그 진노가 극에 달하였겠지.”
해서,
“그들이 삼십 년의 대계를 그렸다는 건가?”
“…짐작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이대유는 품에서 거대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어느 순간 갑자기 존재감을 발한 그들은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이라는 이름의 두 상단을 내세워 무림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권을 이리 표시하자면―”
주욱― 죽.
검은 먹선 두 개가 지도 위에 그려졌다.
그 모습은 마치,
“이럴 수가!! 이미 전 무림의 서편과 남방은 그들의 세력권이란 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장강은 상대적으로 중원 무림의 남쪽에 있으며, 그 아래 강남은 이렇다 할 지도자가 없는 무법 지대였다.
그 말은 즉, 그들을 통치하는 이들은 장강에서 물류를 장악한 이들이니, 그게 바로 장강수로상단이었다.
“감숙으로부터 이어지는 사천, 운남을 잇는 광형상단. 사천으로부터 시작해 동편을 가르는 장강수로상단. 이미 그들은 삼십 년 전 사천에서만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두둥―
거열권 진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듯 흔들렸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그는 못내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은 지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대체, 그런 당가에서 어찌 이 작은 서안 땅을 향해 야욕을 부린다는 말인가! 우리는 삼십 년 전에 있지도 않았는데!!”
만가쟁패의 시대에 거열권 진태의 두 주먹만으로 일어난 곳이 거열방이다.
당장 이름부터 자신의 별호에서 따 짓지 않았는가?
“주군! 혹시 모를 일이기는 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감숙 지부라 할 수 있는 광형상단을 가기 위해 들른 길일 수도…….”
“당치도 않을 소리!!”
콰앙―
탁자에 세찬 주먹질이 가해졌다.
“한둘도 아니고 당가 최악 최흉의 무력단이라 불리는 잡룡단 전체가 움직였네! 이건 그야말로 거대 집단의 패권주의적 행보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주군의 주장에 이대유는 입술만 움찔거릴 뿐 차마 무어라 하지 못했다.
상황이 워낙 심각해 보고를 올리지 못한 내용이지만, 현 사천에는 잡룡단을 흠모하는 잡룡파라는 무리가 다른 세력들에 가열차게 분쟁을 만들어대고 있다고 들었다.
암만 봐도 그들 잡룡파라는 이들의 행보가 총관 그 자신이 부리는 흑사파와 같았으니, 정천맹에 속한 거대 문파가 그들의 행보를 알아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게 자신과 같이 사천당가의 저력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연 그 모든 것은 오해였지만, 오해란 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가만 놔두면 더더욱 엉키고 복잡해지기 마련.
결국 무언가를 결심한 듯 거열권 진태는 굳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안 되겠군. 법사를 부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