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89화 (289/350)

289화

질러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뒤가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더더욱 속은 후련했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 결과, 진태의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잘 들으셨습니다. 아, 지금 표정은 아주 보기 좋군요.”

“뭐?”

“잠시. 제가 질문에 답해 드렸으니, 저도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런 진태의 일갈을 태연히 무시하며 당지명은 물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왜 하나 같이 그러십니까? 어차피 뻔히 잘못한 거 아는데, 왜 눈 가리고 아웅하냐는 말입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이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제게 형님이 한 분 있어 그런 짓을 참 잘하시는데, 그분께 물었다간 처맞을 거 같아서 못 물어보던 참이었는데 잘됐군요. 대체, 왜 당신 같은 무림인들은 그러는 겁니까?”

그게 참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들도 소싯적에는 공명심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 않았습니까? 의와 협. 그런 것들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한때는 두 주먹 하나만 믿고 살아가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이들도 하나 같이 나이만 들면 그렇게 변하는 겁니까?”

“이익… 애송이 놈이 감히! 오냐오냐 대접해 주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애송이? 그럼 대체 어른이란 무엇입니까. 주먹을 내밀어야 할 때 내밀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옳고 그름을 설파하는 게 어른입니까?”

그게 참 궁금했다.

“우리가 문방사우 곁에 두고 먹물 향을 품은 선비도 아니고, 국가에서 허락하지도 않은 병장기를 멋대로 쥐고 불법의 영역을 멋대로 걷는 주제에, 왜 황궁에서 글 꽤나 배운 고관대작마냥 궤변이나 늘어놓는 겁니까?”

무(武)를 쌓아 공(功)이 되고,

무(武)를 닦아 도(道)가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지명에게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가난하디가난한 시절을 보낸 그에게 무공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수탈하는 수단에 불과했고, 힘없는 자는 힘을 가지기 위해 어떻게든 붙잡는 신분 상승의 수단에 불과했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은 수단에 불과한 것.

그런데 그것을 어느 정도 쌓으니, 이제 와서 수단이 아니라 다른 훌륭한 무언가라 말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남의 것을 빼앗는 모습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죄책감과 마주하기 싫었습니까? 자신의 행동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면 좀 달라진답니까?”

“도저히 무슨 궤변을 늘여놓는지 모르겠군. 애송아, 네가 지금 선을 넘은 것은 알고 있느냐?”

“선이요? 그딴 건 한참 전에 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일찍 넘었어야 했지요.”

증거를 찾고 증인을 구하고 합당한 절차를 밟는다?

‘웃기지도 않는군.’

언제 당가에 그딴 게 있었다고.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 당신들에게 피해 입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고… 아니, 그만 말합시다. 솔직히 당신과 이렇게 말 섞는 게 역겹습니다.”

“증거도 없이 이 몸과 의협맹을 핍박하겠다는 것이냐?”

당지명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상대의 말마따나 물증도 없고 증인도 없이 심증만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만약 이 모든 게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분명 이 사람은 무척이나 억울하겠지.

그래, 그건 알겠는데.

“싯팔. 여기까지 왔으면 좀 까놓고 말합시다. 아직도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것도 좀 정도껏 해야지.

와장창!

잔칫상이 나뒹굴고, 비싼 산해진미들이 사방에 엎질러졌다.

“어이쿠, 잔치가 엎어졌네. 그런데 내가 했다는 증거 있답니까?”

“뭐, 뭐라고?”

“증거라는 게 뭡니까? 힘 있는 사람이 내는 목소리면 그게 다 증거 아닙니까? 그럼, 여기서 내가 안 했다고 하면 이것도 증거 불충분이겠네요?”

“갈수록 궤변을 늘어놓는군!”

“예, 안 그래도 더 이상 말하려니 저도 입 아파서 그만하려 했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하자.

내가 대형도 아니고, 무슨 궤변과 개똥철학을 읊고 있을까.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갑시다. 맹주.”

“하… 어딜 가자는 거냐?”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정천맹이지.”

“싫다면?”

“좋죠.”

“…뭐?”

“좀 싫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 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당지명은 오연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도 실력 행사 좀 들어가고 싶으니까.”

우당탕!

여기저기서 밥상 엎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자 보자 하니 오만한 게 끝이 없군!”

“우리 의협맹이 호구로 보이더냐!”

“애송이 놈이 어설픈 명성 좀 얻었다고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연회상에 자리하고 있던 의협맹의 간부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개중 성격 급한 이들은 살기를 줄기줄기 뽑아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그들에게 당지명은 여상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좀 무시하면 안 됩니까?”

“뭐, 뭐?”

대놓고 돌아오는 발언에 당황하는 그들.

그들에게 당지명은 말하려 했다.

‘당신들도 양민들은 무시하는데, 저는 좀 당신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까?’라고.

하지만 그 순간 먼저 터져 나오는 외침이 있었으니,

“그래, 우리 대형 말이 맞지.”

어느샌가 뛰쳐나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인형이 하나.

언제 어디서나 방계들의 맨 선두에 서며, 언제 어디서나 결코 먼저 물러서지 않는 이의 등이 시야를 가득 메웠으니,

“다 X밥같은데.”

씨익―

‘그래, 어째 잘 참는다고 했다.’

피식.

그 익숙한 모습에 당지명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놈은 또 뭐냐!”

“어딜 감히!”

“뭐야, 나를 몰라?”

빗발치는 비난을 대신 받으며 자리한 이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으니,

“당가의 푸른 야수. 당불퇴 님 등장이시다.”

선홍빛 미소와 함께 등장한 당불퇴의 등 뒤로 검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무, 무슨 기세가…….”

“저 나이대에 저 정도의 내공을 가질 수 있다고?”

어차피 싸울 거, 마음껏 가진바 내공을 풀어헤친 당불퇴의 기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동안 먹어온 온갖 독초들이 그 약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장내를 가득 채우며 위압감을 선사했고, 무림에 잔뼈가 굵은 이들은 그 기세를 느끼며 침음성을 삼켰다.

‘역시, 당가가 멸망한 척했던 것은 전 무림을 속인 기만이었구나…….’

소름이 일었다.

지금껏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흑막 집단도 아니고,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던 이들이 전 무림을 속였다니.

‘그렇다면 역시… 저들이 주장하는 우리의 약탈 행위도 전부 정보를 수집하고 왔을 터.’

여기서 얌전히 잡혀가 준다면 기껏 공들여 세운 의협맹은 백사장의 모래성마냥 와르르 와해될 터,

‘절대, 절대 잡혀가 줄 수는 없다!’

결연한 다짐을 맺은 진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들어라! 사천에서 온 외지인들이 서안의 평화와 협의를 수호하는 의협맹을 핍박하고 있다! 이는 곧 강호의 도리에 위배되는 것이며, 우리가 지켜온 평화를 근간까지 흔드는 행위와 같은 것! 설령 우리의 세력이 저들의 세력에 비할 바가 못된다 할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마라!”

그야말로 피맺힌 외침을.

“일어나라 의협맹의 동지들이여. 협의를 향한 일편(一片)의 단심(丹心)에 옥과 같이 부서지자!”

옥쇄(玉碎) 명령.

즉, 싸우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새끼, 입 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네.”

듣고 있던 당불퇴도 감탈할 만한 웅변.

“오오오오오!!”

“의협맹을 위하여!!”

“일편단심 의협지심!”

같은 편인 의협맹의 무인들에게는 치사량 초과의 아편이나 다름없었다.

“옥쇄하라!!”

“저놈을 해치워라!!”

용기백배한 의협맹의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연회상이라 병장기를 착용한 이들은 없지만, 의협맹의 수괴를 자처하는 거열방이 원래 권사들의 문도인 만큼 그들의 맨주먹만으로도 충분한 흉기였다.

하지만,

“그래?”

사천당가.

독과 암기의 명가인 그곳이요 그 방계들 역시 주무기 역시 용독술과 암기술이지만 딱 하나, 권각술을 주류로 사용하는 이가 있었으니,

“옥쇄는 모르겠고. 박살 나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당불퇴는 야수처럼 뛰어들어 달려드는 일단의 무리 사이로 몸을 던졌다.

퍼엉!

동시에, 무언가가 터지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연막?!”

십수 명의 권사가 얽혀드는 중심부로 연막이 피어올랐으니, 당불퇴는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자, 간다!”

콰앙!

어느새 거리를 좁힌 당불퇴의 옆차기가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던 이의 복부에 때려 박혔다.

자신의 앞에 있던 이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자, 뒤따르던 이는 순간 멈칫했고 그런 상대에게 바짝 붙은 당불퇴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퍼퍼퍽!

첫 번째로 방어 자세를 취하던 상대의 두 팔을 내리고, 두 번째로 팔꿈치를 휘둘러 턱을 후려치고, 세 번째 일격에 상대를 허물어트렸다.

그야말로 깔끔한 연타!

뒤따르던 이들이 그 갑작스러운 난전에 당황해할 때, 당불퇴는 어렵지 않게 적들을 찾아가 주먹을 내찔렀다.

“크악!”

일권이 정확히 이마를 맞춰 뇌를 뒤흔들어 혼절시키고, 그 뒤에서 달려드는 이의 주먹질을 쳐내며 복부를 후려갈긴다.

“이놈!! 어디서 난장을 부리느냐!!”

그즈음엔 정신 차린 나머지 후속 병력이 뒤따라와 주먹을 갈기니 두 팔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음에도 그 물리력에 따라 당불퇴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

“크하! 제법인데?!”

잇몸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당불퇴는 주눅 들기는커녕 나뒹군 자세에서 두 손으로 바닥을 힘껏 밀며 벌떡 일어섰다.

“건방 떨지 마라!”

“으랴아아아압!!”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권사가 달려들었고, 양쪽에서 동시에 주먹을 뻗어왔다.

“읏차!”

그 순간 제자리에서 재도약한 당불퇴가 두 다리를 번쩍 벌리니, 그들은 주먹을 채 뻗기도 전에 가슴팍에 한 발씩 발차기가 꽂혀 허물어졌다.

“휴우.”

삽시간에 절반이 쓸려나가고, 의기충천해 달려들던 간부진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때마침 창밖으로 연기가 걷히며 드러난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

죽은 이는 없었지만, 전부 입과 코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신음하는 모습은 고작해야 입안에 머금은 피를 퉤― 하고 뱉어내고는 씨익 웃는 당불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언제까지 잔챙이만 보낼 거야?”

그런 그들을 가로질러 진태를 바라본 당불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까딱, 까딱.

직접 들어오라는 강력한 도발.

그에 진태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하, 그래. 인정하마.”

그도 잠시, 잔뜩 열이 나 온몸으로 증기를 뿜어내면서도 진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림이 보통 불공평한 세상이더냐. 네놈 같이 괴이한 재능을 타고나 나같이 노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이들을 짓밟는 이들이 온 천지에 가득하지.”

“뭐, 뭐?”

어째 많은 게 억울해지는 말에 당불퇴는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괴이한 재능? 이게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러나 당불퇴가 먼저 빼액 소리치기 전에 상대가 먼저 담담히 선언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있나. 그런 세상이면, 그런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 말과 함께 진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하고도 괴이한 빛을 발했으니,

“보아라. 이것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이다.”

그 순간, 당불퇴의 시계가 허물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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