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시간을 조금 돌리자.
방계들이 지하 감옥에서 탈출해 따사로운 햇빛을 받는 그때, 지상을 향해 발을 디디던 당율기가 물었다.
“좀 전에 그거, 어떻게 한 거냐?”
독에 한해서는 자신이 방계 중 제일이라 자부하던 당율기였다. 그런데, 자기도 못 한 산공독의 해독을 당불퇴가 해내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에, 아직 파리한 안색의 당불퇴가 끄으응 신음을 내며 답했다.
“별거 없어. 산공독이든 내공이든 어차피 내 몸 안에 있는 것이잖아? 그렇다면, 그걸 정밀하게 제어하는 건 어렵더라도 한 방향으로 내뿜는 건 할 만하다 생각했지.”
“…뭐?”
말은 쉽게 들렸다.
하지만, 당율기는 그게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소우주라 불린다. 그만큼이나 내부는 복잡한 기혈로 얽혀 있기 때문. 단순히 한 방향으로 내뿜는다고 해도, 그 안에서 복잡한 혈도를 전부 지나쳐야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산공독에 중독된 상태라면 아주 조금의 내공을 다루는 것도 힘들 텐데? 어설프게 밀어붙였다간 분명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아, 거참. 그럼 입으면 되지.”
믿기지 않아 소리치는 당율기의 말에 당불퇴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상을 입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 그래도 방향만 정해서 대충 감으로 이렇게 저렇게 밀어붙이면 어쨌든 되긴 된다고?”
그 결과가 이것이고.
“이 미친놈…….”
세맥에 부상을 입든 기혈이 꼬이든 방향성만 대충 정하고 밀어붙인다. 그 자리에서 짜잘한 것들은 그냥 버틴다.
말은 쉽지만, 그것을 달리 말한다면 세간은 이리 부른다.
‘주화입마(走火入魔)… 이놈은 진짜 겁이 없나?’
“생각보다 할 만해, 흐흐흐…….”
파리한 안색으로 낄낄 웃는 당불퇴는 지금도 입 밖으로 왈칵왈칵 죽은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해내는 것에 질릴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당율기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율기야, 일단 나가자꾸나. 지금 중요한 건…….”
“아닙니다, 당주 형님. 저놈의 미친 짓 덕분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선택지라니?”
“저놈은 혼자 모든 부담을 떠안았지만, 그걸 서른세 명이 동시에 나누면 부담을 최소로 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일단 탈출에 집중하자고 하려던 당지명에게 당율기는 만약을 대비한 계획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걸 지금 쓰게 되는구나.’
사방에 운무가 짙다.
삼재진을 통해 발동시키는 운무진과 비슷해 보이지만, 지금은 그 안에 하나의 요소가 추가되어 있다.
그건 바로 산공독, 무인의 독이라는 그것이 운무진을 통해 짙게 퍼져 나온 것이다.
‘귀원일기공은 운용하는 건 쉽지 않지만 가능은 하다. 그걸 권기나 권강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뿐. 그렇다면, 동시에 우리들 서른셋이 귀원일기공을 운용해 삼재진을 펼친다면?’
혼자는 힘들지만 여럿이 함께한다면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법.
당율기가 중앙에서 조율하여 방계 서른셋이 동시에 펼치는 삼재진은 그들 내부에 있는 내공을 주변 영역에 퍼트려서 마치 산공향의 범위 내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었다.
“내, 내공이…….”
“움직이지 않아!!”
무척이나 당황한 그들을 향해 당지명은 씨익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자, 공평하게 붙어 봅시다.”
“큭……!”
침음을 흘리는 진태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뭘 어떻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공을 못 쓰는 것은 네놈들도 마찬가지일 터! 다들 겁먹지 마라, 수적 우위는 우리에게 있다!!”
“그건 맞는 말이지. 그러니, 우두머리부터 치는 수밖에!”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소리치는 진태를 향해 당지명이 달려들었다.
의협맹의 무인들은 다들 당황했지만, 그래도 일단 자신들의 맹주를 지키기 위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제 주인은 지킨다는 건가?’
썩어도 준치, 한 무리의 맹주라는 걸 증명하는 모습이지만.
‘당신에게 부하들이 있다면, 나한테는 짐승 같은 놈이 있다고!’
“으하하하, 개싸움이냐? 좋지, 다 덤벼!”
달려드는 일단의 무리를 향해, 뒤편에 있던 당불퇴가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광소와 함께 몰아친 당불퇴가 홀로 대 여섯 권사가 달려드는 한복판에 뚝 하고 떨어지니, 달려오던 이들은 그 수적 열세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정신 나간 모습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에, 당불퇴는 씨익 웃으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먼저 간다!”
“이런 미친……!”
“죽여!!”
퍼퍼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의협맹의 권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고, 가뜩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던 당불퇴는 그걸 다 피할 수 없어 몇몇은 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그러나,
“간지럽다, 이 자식들아!!”
얼굴이 좌우로 몇 번이나 돌아가고, 옆구리에 발길질이 꽂혀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당불퇴는 더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꺼억……!”
“컥……!”
당불퇴의 싸움은 화려하지 않았다.
내공을 상실했기에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공포를 심어 주기 충분했다.
“으으…….”
“저, 저게 무슨…….”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에 공포를 느낀다.
내공이 있다면, 상대의 경지가 아득하게 높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공도 없는 놈이…….”
“대체 어떻게 된 몸뚱어리냐?!”
아득바득.
그 모든 타격을 몸으로 견뎌 가며, 광기 어린 전진을 이어 가는 당불퇴의 모습은 모두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고, 수적 열세에도 사기의 반전을 가져왔다.
‘부탁하마.’
그렇게 당불퇴가 모두의 시선을 끄는 사이, 당지명은 재빨리 진태와의 거리를 좁혔다.
“맹주!”
“큭……?!”
내공을 잃었다 해도 그간 당유혼의 밑에서 구르고 구른 시간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극한의 상황이란 오히려 익숙한 것!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뛰고, 그 상태에서 암벽을 등반하고, 그러고 나서도 쏟아지는 암기를 피해 온갖 수련을 행해야 하는 것쯤!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차양십이수(遮陽十二手),
뇌명타(雷鳴打).
섬전과 같이 뻗어진 손이 진태의 시야를 가렸다.
“헙……!”
당황한 그가 재빨리 두 팔을 겹쳐 막아 내자 당지명은 주먹 쥔 손을 펴고 갈고리처럼 쥐더니 그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곧장 당겨 몸의 균형을 무너트리고는 덕분에 열린 명치를 향해 주먹을 연달아 꽂아 넣었다.
차양십이수(遮陽十二手),
삼절격(三絶擊).
퍼퍼퍽!
“꺼억……!”
하나하나가 예리하게 꽂히는 정타.
진태의 눈이 터질 듯 크게 뜨였고,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함께 분노가 차올랐다.
“으으… 이놈이 감히……!!”
거열권(巨烈拳),
맹호연환격(猛虎連環激).
분노로 고통마저 잊은 그가 맹렬히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권격이 무지막지하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역시.’
그 모습에 당지명은 자신의 예상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그 주먹세례 속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그와 함께 벌린 두 팔은 원(圓)을 그렸고, 퍼부어지는 주먹세례를 전부 쳐 내거나 흘리며 나아갔다.
그렇게 드러난 곳을 향해 두 주먹을 맞대어 내뻗으니.
콰아앙!!
“크하아악……!!”
폭음에 가까운 타격음과 함께 진태의 몸이 뒤로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끄으으으…….”
“한심하군.”
고통에 신음하는 그의 모습에 당지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맹주. 어째서 똑같이 내공이 금제 되고도 이런 차이를 보이는지 아십니까?”
“으으으…….”
“그것은, 당신의 무(武)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내 무(武)가… 가짜라고?”
“그렇습니다.”
합장하듯 두 손을 모은 당지명이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내공을 잃어 오로지 초식일 뿐임에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그 빈틈을 찾을 수 없어 견고한 태세.
“무(武)는 말 그대로 스스로 익혀 단련하고, 자신을 굳세게 만드는 것. 처음에야 당신도 한 명의 무인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집단의 힘에 의지했을 것입니다.”
이 의협맹이 증거였다.
“정면 돌파보다는 지름길을, 고되고 괴로운 정공법보다는 쉽고 간단한 편법을! 약한 이들의 것을 갈취하고 그로부터 불린 삿된 재산을 자신들의 힘이라 여겼으니,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꺼지고 나서 남은 것은 지금의 초라한 모습일 뿐입니다.”
통렬한 지적이었다.
“이이… 이익……!!”
진태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졌다.
그것이 분노에 의함인지 창피에 의함인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진태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끝까지 홀로 올곧은 척하는구나! 좋다. 지켜봐 주마. 네가 어디까지 정의로운 척 가식을 떨 수 있을지!”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으니,
“이런!”
그것은 한 장의 부적.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보아라!”
부적을 손에 든 진태가 버럭 소리치니, 부적으로부터 운무가 뻗어 나와 주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또 같은 수법이구나!’
지난번에도 이러했다.
‘이곳에도 될 줄은 몰랐는데…….’
조금 방심했던 이유는 지난번 전장이 실내였고, 이번은 실외였기 때문.
그때 진태가 부적을 꺼내 들었을 때 보인 효과는 실내 한정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임을 증명하듯 주변 공간이 변화했다.
그렇게 일어난 현상은,
“이번에는 봐주지 않는다!!”
멀리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외침이 들려온다.
그도 그럴 것이,
‘또, 아득하게도 멀어졌군.’
자신과 상대방의 사이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눈앞에 있다 싶었던 상대가 저 앞에 있으니, 도저히 내공 없는 보법으로는 쫓아가기도 힘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놈!”
퍼억!!
“큭……!”
그가 달려드는 순간은, 어느새 공간을 접기라도 한 듯 바로 앞에서 나타나 주먹을 휘둘러 왔다.
옆구리에 꽂히는 뜨끈한 감각에 재빨리 반격을 날려 보지만,
“어이쿠! 안 되지!”
어느새 다시 멀찍이 떨어져서 안전한 공간에 있는 진태는 비죽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어떠냐, 나의 이 힘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진태는 또다시 움직였다.
퍼퍼퍽!!
“큭……!”
“으하하, 조금 전처럼 입을 열어 봐라! 또 한껏 정의로운 척 해 보란 말이다!”
그야말로 괴력난신.
분명 내공을 잃었음에도 그의 주먹은 천하장사의 그것과 같이 강맹하고, 그의 신형은 귀신놀음처럼 저만치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차양당 방계들이 온전한 상태로 진태와 의협맹의 무인들에게 제압당했던 이유!
“끄으으…….”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당지명이었고, 가뜩이나 산공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삼재진을 운용하느라 생긴 내상이 더더욱 심해져 검게 죽은 피를 토해 냈다.
“퉤… 독과 암기를 다루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진짜 더럽게도 비겁한 힘이군요.”
“그리고, 네놈들이 가지지 못한 힘이지!”
음험하게 웃는 모습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내가 가지지 못한 힘이지.’
그건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줘 패서 때려눕힌 뒤 조롱과 약자멸시를 퍼붓는 누군가의 얼굴.
- 꼽냐? 꼬와? 그럼 어서 강해지던가!
낄낄낄 웃는 얼굴이 떠올라 짜증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꼭, 못돼 먹은 놈들이 별 괴력을 다 가져서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그 사실에 당지명은 참고 참던 것들이 폭발해 소리쳤다.
“에라이 당유혼 나쁜 놈아! 니똥 굵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무언가 당지명의 눈앞으로 뚝 하고 떨어졌으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그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든다.
“어… 어… 어……?”
그 정체는,
“나 불렀냐?”
너무나도 익숙한, 악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