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어어… 어……?”
당지명의 목이 고장 난 맷돌마냥 삐걱거렸다.
“혀, 형님?”
“그래, 나다. 엄청 반갑지?”
아주 반가워 미칠 거다.
“그… 그, 어, 언제… 오, 오셨는지…….”
“네 녀석이 내 소화 활동을 걱정해 줄 때부터.”
“으아아… 끄, 끄… 꼬르륵…….”
“어? 어? 야 인마, 정신 차려!”
녀석은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심상 세계로 도망친 것이다.
“쯧쯧, 그런다고 안 처맞을 것 같냐?”
어차피 돌아오면 뒤지는 건 똑같은데,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지 그걸 굳이 미루려고 하네.
“네, 네 녀석은 누구냐!”
혀를 차고 있으려니, 뒤편에서 잔뜩 쫄은 외침이 들려온다.
‘아, 그래. 우선 청산해야 할 게 남아 있지.’
암만 기강 잡기가 중요해도, 빚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법.
“네가, 우리 애들 팬 놈이냐?”
내가 우리 애들 패는 건 돼도, 다른 놈이 우리 애들 패는 건 안 되거든.
“이익… 내가 먼저 물었다! 정체를 밝혀라!!”
“정체? 와, 이 상황 보고 아직도 답이 안 나와?”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창 싸우던 중인 듯했으나,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등장이 워낙 좌중의 시선을 강탈했는지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군데군데 보이는 방계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상황은 실로 처참하기 짝이 없는 것.
주먹으로 싸운다는 놈이 무슨 가시 박힌 장갑들을 휘둘러 댔는지, 녀석들의 몸에 남은 찢긴 상처의 개수가 두 손으로 셀 수 있는 놈들이 없다.
그런 녀석들을 가리키며 답했다.
“깽값 받으러 온 사람.”
그것도, 아주 거하게.
“깨… 깽값?”
상대의 눈이 뒤집혔다.
조금 더 놔두면 입에서 거품이라도 물 기세였다.
“네, 네놈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이 난장판을 벌여놓고… 깽값이라고?!”
“이야, 되게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다.”
세상 모든 억까를 다 당한 듯한 표정을 해주니 천상천하 둘 없을 협객의 풍모를 지닌 이 당유혼의 마음이 다 아팠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지금까지 네가 금품이요, 곡식이요, 토지며 다 뺏어 왔던 힘없는 양민들을 떠올려 봐.”
“무슨 헛소리를… 설마, 그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이러는 거냐?”
“아니, 아니. 그냥 이제부터 안 좋아질 건데, 그나마 네가 좋았던 시절 떠올리면서 처맞으라고.”
콰앙!
애초부터 이런 단역 같은 놈과 오래 대담을 나눌 생각은 없다.
기습적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발차기를 갈겼다.
하지만,
쩌엉―!
“수호부(守護符)? 그것까지 가지고 있어?”
녀석에게 닿기 직전, 허공에 생겨난 반투명한 보호막이 내 공격을 차단했다. 보호막 위로는 열여덟 자의 글자가 떠올라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허, 허억… 어, 언제……!”
그리고 목숨은 건졌지만 눈으로도 쫓지 못할 속도에 겁먹은 단역 같은 놈의 눈은 폭풍 앞에 촛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넌 진짜 나랑 얘기 좀 해야겠다.”
“으, 으아아아……!!”
그래도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단역 같은 놈은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녀석은 자신의 품에 메여진 목걸이를 움켜쥐고 어느 벽에 뛰어들었는데, 놀랍게도 그 벽은 수면이라도 된 듯 일렁이며 녀석의 신형을 감추었다.
“저게 출입증이구나.”
만화경의 입구로 자유자재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
잘 다룰 수만 있다면 현실에서는 바로 코앞인 듯한 거리도 아득히 멀게 할 수 있고, 현실에서는 제법 되는 거리도 팔 뻗으면 닿게 할 수 있다.
‘귀찮게 하네.’
만화경의 통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셋.
정식 출입구를 사용하거나, 정식 출입증을 사용하거나, 비추어지는 곳을 이용하거나.
첫 번째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두 번째는 저놈이 가지고 있고, 세 번째는 면경이나 수면을 찾아봐야 하지만―
‘셋 다 없군.’
널따란 장원 안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에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응? 야, 그거 줘봐라.”
“헉!! 대, 대형!!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절대 도망치려는 게……!!”
졸도한 척했다가 은근슬쩍 기어 도망치려는 당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갖고 와, 인마.”
“으아아아!! 대, 대형!! 칼은 왜!!”
녀석의 되지도 않는 독검술용 철검이 필요했다.
“어휴, 겁은 많아서. 너 썰어버리는 데 쓸 거 아니니까 쫄지 마, 인마.”
그러다 키 안 커.
스릉―
검집에서 뽑아든 철검은 녀석의 성격을 잘 드러내듯 반듯하게 닦여 있었다. 항상 장비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주제 하나하나 병적으로 관리하는데, 덕분에 녀석의 검면 역시 면경마냥 내 얼굴을 비추어 내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쫓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만화경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누구 하나 잡아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으니―
스르르…….
한쪽 손을 검푸르게 물들인 채, 그대로 검면 위를 내리쳤다.
* * *
“헉… 허억… 헉……!!”
거열권 진태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이 공간은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고, 그 출입증은 오로지 자신만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폐가 터질 때까지 달렸다.
‘무슨… 그런 괴물이……!’
지금은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정치 무인이 되어버린 자신이지만, 한때는 무의 끝을 보고자 단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상대는 규격 외의 괴물임을.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지란 말인가.’
마지막 순간 진태는 보았다.
대충 묶어 올린 흑발과 그 아래로 보이는 무심한 녹안(綠眼)을.
그것은 타고난 포식자의 눈이었으며, 진심으로 타인을 자신의 발아래로 둘 수 있는 정복자의 그것이었다.
자신처럼 어설프게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타고난 패자의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패배를 직감한 진태는 곧장 도망쳤다.
전열을 수습해 반격하는 것 따위는 꿈에도 꿀 수 없었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 만화경 속의 거리가 현실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알면서도, 머리에 각인된 공포가 그를 달리게 한 것이다.
그렇게, 정말 폐가 터질 때까지 달려서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커헉… 허억… 헉……!!”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추하게 앞으로 나뒹굴었다.
“그으으… 으으으…….”
더 이상은 못 뛴다.
삐걱거리는 온 관절이 비명을 토하고, 닳아 오른 폐에서는 쌔액― 쌔액― 하는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직감했다.
‘그어… 으… 그, 그래도…….’
살았다.
이렇게나 도망쳤다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겠지.
‘살았다… 나는 살았…….’
그래야만 했는데.
“…아?”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추어지는 기이한 풍경.
“뭐, 뭐야, 저게…….”
그건 바로,
쩌어어어엉―!!
“세상이… 무너져……?”
거대한 울림과 함께, 만화경을 구축하는 배경이 저 멀리서부터 일제히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으, 으아아아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인지하는 순간 지평선 끝에서 일어났던 붕괴는 눈앞까지 닿고 있었고, 그 흐름에 휩쓸린 진태는 거칠게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졌다.
쿠당탕!
“끄으으으…….”
온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불가항력의 재앙.
그 끝에서, 그가 본 것은―
“어, 왔어?”
처억, 하고 들이밀어진 누군가의 발끝이었다.
* * *
짧았던 소요가 끝났다.
만화경의 약점은 말 그대로 불안정한 세계의 특징이라 강대한 ‘진동’에 약했다.
일반적인 공간의 개념을 들이밀면 안 되는 세계는 만약 출입구가 이어져 있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충격에도 큰 영향을 받고, 그게 강하면 강할수록 내부에 있는 이들은 온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게 만화경의 존재들이 외부에서 온 이들을 싫어하는 이유지만.’
그 세계의 권위자인 ‘녀석’의 말로 만화경과 현실 세계는 위층, 아래층 간의 관계와 같기에 위층의 작은 떨림이 아래층에는 끔찍한 소음을 선사한다고 한다.
덕분에 원주민들은 항상 화나 있으니, 이게 바로 층간 소음의 무시무시함이 아닐까?
“여하튼.”
의협맹 곳곳에 설치된 진법의 축을 부수는 것으로 무한미로진은 해체되었다.
이계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진법 자체가 극도의 정교함을 요구하다 보니 내구도 면에서는 그리 강하다 볼 수 없었고, 말뚝 몇 개 뽑아내는 것으로 손쉽게 해체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의협맹의 문도들은 얌전히 제압되었다.
자기네 주인이 복날 개 맞듯 두들겨 맞고 쓰러졌으니 전의는 바닥으로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얌전해진 놈들은 중위 간부급부터 싹 다 의협맹 내의 옥에 처넣었으니, 의협맹(이었던 것)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진짜, 쥐 죽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 빼고.
“끄으으으… 으으…….”
“으어어어…….”
“허허, 어디서 쥐가 죽어가나?”
비슷하긴 할 것이다.
대가리를 땅으로 처박은 채 바닥을 기고 있는 놈들이 눈앞에 쪼르르 도열해 있으니까.
다만, 그 풍경이 자꾸만 흔들려 보이고 있으니―
“어라? 이상하다. 왜 자꾸만 세상이 흔들릴까?”
“끄, 끄어어어……!!”
“이야, 이상하다. 요새는 바닥이 비명을 지르네?”
“……!!”
그제야 조용해진 당지명이라는 이름의 바닥이 푸들푸들 떨린다.
이게 옳게 된 바닥이지.
그리고,
너희는 그르게 된 놈들이고.”
푸푸푹!
“끄아아악!!”
“으아악!!”
“어쭈, 피해?”
저 앞에 대가리 박고 있는 놈들에게 천골저를 무더기로 던지니, 놈들은 용케도 회피 기동을 시작했다.
머리와 두 발만을 이용한 기민한 이동!
두 팔을 내리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천골저가 아닌 내가 직접 날아간다는 것을 잘 아는 놈들답게 온 힘을 다해 뽈뽈거리며 천골저 세례를 피해 냈다.
“아주 느려 터졌구만? 그러니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니지!”
저놈들이 내가 아닌 다른 놈들에게 얻어터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놈들은 쥐어팬 놈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또 그놈들에게 맞고 다니는 저 녀석들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런 나쁜 방계 놈들은 착한 천골저가 용서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어어…….”
“그으으…….”
그렇게 나쁜 방계 녀석들은 착한 방계 녀석들로 인간 개조시키길 몇 시진.
중천에 걸렸던 해가 저 산능선에 걸릴 때가 돼서야, 몸의 중량을 몇 배로 무겁게 만드는 천근추를 발휘하던 몸을 일으켰다.
“집합.”
파파팟!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땅바닥을 기던 놈들이 삼열 종대로 도열했다.
물론, 그중 가장 빠른 놈은 땅바닥 역할을 하던 당지명이었다.
“하아… 얘들아.”
“옙! 대형!”
“내가 참 부끄럽다. 응? 아주 부끄러워.”
“…….”
죄 많은 인생.
웬 거지새끼들 단체로 모아서 사람 새끼로 탈바꿈시켜 놨거늘, 아직도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니는 건지.
“내가 요즘 너희 수련을 게을리했다고 이런 거니?”
다시 직접 단련시켜 줄까?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기합이 바짝 든 모습.
“에잉, 쯧.”
여기가 사천이라면 내일 동이 트도록 굴릴 텐데, 하필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게 문제다.
‘그것도 그냥 보통 남의 집이 아니지.’
좋든 싫든 의협맹이라는 곳은 서안이라는 한 지역의 초거대 유지 노릇을 하던 곳이다.
그런 곳이 하루라도 마비되는 순간 지역 상권은 꼬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피해 전가는 하층민들에게 이루어진다.
“뒷정리 알아서 해라. 기껏 양민들을 돕기 위해 왔는데, 우리 때문에 양민들이 고통받아서야 본말전도 아니겠느냐.”
“걱정 마십시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잡음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웬 조직폭력배 암살 두령이 된 기분이다.
뭔가 영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 돌아왔을 때 양민들의 환경이 엉망이면 너희도 엉망진창이 되는 거다?”
“…예? 그, 어디 가시는 겁니까?”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한 번 발견한 이상 영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라서 말이다.
“어디 좀 다녀오마.”
마실 나가듯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