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 * *
독천(毒天).
한때는 그렇게 불린 적도 있다.
독의 정점이며, 독의 하늘.
그리 불리었지만, 좀 더 실상을 따지자면 수세에 몰리던 정파에서 어떻게든 부여잡은 희망의 지푸라기라는 점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먼 옛날부터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며 두려움에서 벗어나고는 했다.
그것은 초월적인 우상을 만들고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였으니, 삼대천(三大天)이라는 이들이 만들어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쩔 수 없었잖아.’
천마(天魔)가 동진하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전부 짓밟아버리는 것도 무시무시한데, 그 밑에 칠최종(七罪宗)까지 난리를 피우니 정파 진영은 충격과 공포, 혼란뿐이었다.
그들로서도 믿고 의지할 이들이 필요했으니, 정파 진영은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삼대천이라 칭했다.
그만큼 한때의 나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만큼 유명인사였고,
“독천(毒天), 정말 너야?”
그때의 나를 아는 녀석이 아는 체해 왔다.
“그래, 오랜만이다. 정도령.”
정도령.
그 이름처럼, 아니, 그보다 더 어린 외형을 보유한 소동(小童)이 바로 이 녀석의 정체.
그리고,
“네 반응을 보니. 너의 그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예언서에는, 내 존재가 적혀 있지 않았나 보구나.”
홍길동과 함께, 동방 출신의 대예언자(大豫言者)이기도 했다.
“정말 독천이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너의 시운은 삼십 년 전에 분명 끊겼었는데…….”
내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정도령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난 녀석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구나. 그래, 이해한다. 나 역시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회포를 풀자고 하지는 않겠지?”
“아 참! 내 정신 좀 봐!”
그 뜻을 이해한 정도령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독천이 맞는 것 같으니까. 초대할게.”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며 두 팔을 번쩍 들며 말했다.
“어서 와. 모산파(茅山派)에.”
* * *
옛날, 아주 옛날.
천마가 구주팔황이 좁다고 중원 무림을 활개 치고, 그전까지 명문 정파랍시고 꺼들먹거리던 놈들이 천마 하나에 전부 대가리가 깨져 나가며 예절 주입이 완료됐던 시절이 있었다.
이전까지 날고 기며 되지도 않던 명성을 자랑하던 놈들은 천마의 손가락 하나도 어찌어찌하지 못해 전전긍긍했었고, 그 천마를 따르던 놈들은 연일 기세가 올라와 무림에 패악질을 부리던 때가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파천황적인지 감히 마교의 의사에 반발할 엄두를 내는 이가 없었으니,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을 차마 보지 못해 뜻있는 이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그렇다.
내 얘기다.
“어이, 환신. 정말 여기가 맞아?”
인정하기는 싫지만, 천마란 놈은 진짜 더럽게 강했다.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강했고, 그놈 혼자만 강했으면 모르겠는데 그놈을 따르는 광신도 놈들도 전부 강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녀석에게 깝치다가 골로 간 놈들이 태반이 넘었으니, 무림에 남은 전력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나는 놈들과 맞서 싸울 힘을 모아야만 했다.
쓸 만한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함께하길 요청했고, 그렇게 함께한 이들에게 또 소개받아 쓸 만한 이들을 물색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흐, 속고만 살았나?”
“다른 놈이면 몰라도 너 한정으로는 그렇지. 내가 너에게 당한 사기도박이 얼마인데.”
빌어먹을 환신 놈.
신의 경지에 달한 술법을 도박판에 써먹을지 누가 알았을까?
내가 아무리 독과 암기의 경지가 하늘에 닿았다지만, 마음먹고 술법을 부려대는 술사에게는 당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그 경지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닿았다는 환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허, 친우여. 그건 우리의 우애를 돈독히 하기 위한 자금으로 환원되었다네.”
“네놈 뱃속으로 들어간 술값을 말하는 거냐?”
“바로 그것이지. 먹는 것은 곧 남는 것이요, 베풂은 곧 미덕이라. 자네는 내 덕분에 두 가지 선업을 동시에 쌓을 수 있었음이니, 그것은 실로 보기 좋더라.”
“네 녀석은 언제나 개소리를 예술적으로 하는 재능이 있어.”
쯧―
사기꾼 약팔이랑 말을 섞어봐야 손해 보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다.
더 해봐야 입만 아플 테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내게 녀석은 낄낄거리며 말해 왔다.
“의심 많은 나의 친우여. 나에게 불신이 가득함은 이해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정 믿어봐도 좋다네. 이번에 만날 이는, 실로 특별한 이이니까.”
“그래야겠지. 아니면 내가 네 뱃속에 들어간 친구비를 전부 토해 내게 만들 테니까.”
“하하, 농담도…….”
“농담 같냐?”
“…큼큼, 어쨌든, 계속 말하겠네.”
요즘 들어 자꾸만 헛걸음하며 예민해진 나를 더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아는지 녀석은 헛기침하며 설명해 왔다.
“이번에 만날 상대는 나와 같은 동방 출신이라네.”
“동방 출신? 술사냐?”
“술사는 맞다네. 다만, 나와 같은 계열은 아니지.”
“너와 같지 않다니?”
“후후, 무엇을 숨기겠나. 그는 무려 예언자라네. 그것도, 대예언자(大豫言者)의 경지에 달한 인물이지.”
뭐지?
자신감 있게 말하는 홍길동이었지만, 그걸 듣는 기분은 영 이상했다.
“뭔가 그 표정은?”
“무슨 표정이긴 무슨 표정이겠냐? 어디서 또 약팔이를 하냐는 표정이지.”
“…그 친구 참, 못돼먹은 생각이나 하고 있군.”
억울한 표정을 짓는 녀석이지만, 글쎄.
워낙 네놈에게 당한 게 많아야지.
“쩝, 자네가 믿든 말든 내 말은 사실이라네. 그의 이름은 정도령.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이 가리키는 구원자이자 예언의 주인이며, 지금은 중원 방술의 총본산인 모산파에서 수련을 삼고 있는 도령일세.”
“잠깐만, 도령이라고? 그럼 어리다는 뜻 아니냐?”
“외견은 그렇겠지.”
홍길동은 내 말에 긍정하면서도 부정했다.
“정도령은 보이는 외견이 전부가 아닐세. 그리고 살아온 시간도 우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지. 그는 예정된 구원자이자 예언의 주인. 정도령이라는 이름도 실상 계승되는 호칭일 수도 있고, 혹은 이어져 오는 정신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쉽게 속단할 수 없다네.”
또, 또 약팔이 하는 말투 나온다.
두 손 활짝 벌려 소리치는 홍길동의 언변은 혹세무민한 이들이 들었다가는 홀라당 넘어가기 딱 좋은 이의 그것이었다.
과연 나라를 훔친 도둑놈다운 언변이었지만, 나는 영 심드렁했다.
“네 녀석의 말을 들어봐서는 놈이 예언 능력을 지닌 술법사라는 것 같은데, 그래 봐야 아이라는 것 아닌가? 딱히 전투 능력도 없어 보이고 말이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확실히 신기하지만, 그것도 마교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온갖 해괴한 마공과 마도를 부리는 마교도 놈들 중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놈들도 없지 않아 존재했다.
‘당장, 이 녀석도 별을 보고 시운을 읽니 뭐니 하며 앞날을 점치고 말이야.’
환신이라 불리는 홍길동 덕분에, 이제 와서 예지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예지란 참으로 복잡하고도 오묘한 것이며, 불확실하며 불안정한 것이었다.
당장 별점을 통해 앞날을 보는 홍길동도 그렇고, 마교도에 존재하는 복수의 예언자들도 미래를 보기 때문에 그들의 의지 속에 충돌하는 예지는 한 번 보았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이룩하는 일이 아주 적었다.
‘기껏해야 열 번 찍어서 한두 번 맞추는 게 고작이지.’
내가 본 예언자라는 이들의 수만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거대 세력이라 칭할 만한 이들은 비슷한 능력자들이 꼭 한둘씩은 있으니 대예언자라는 이도 그렇게 썩 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홍길동은 단호했다.
“벗이여. 자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정말 정도령은 격이 다르다네. 비록, 지금은 시운이 맞지 않아 대부분의 힘을 봉인하고 있으나… 그는 일국의 운명을 타고난 자라네.”
“좋아. 자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 하나도 못 알아먹겠으니 그만 말해도 된다네.”
아무튼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 아니야?
제발 이 걸음이 헛된 것이 아니길 바라며 모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더럽게 우거진 산천초목을.
“사람의 흔적이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겠는데?”
“거참, 그럼 산해경(山海經)에 속한 곳인데, 속세에 찌들었을 것 같나?”
툴툴대는 내게 핀잔을 주며 홍길동은 우거진 수림 앞에 섰다.
“기다려보시게, 미리 온다는 연통을 넣었으니 우리를 박하게 대하지는 않을 걸세.”
“글쎄…….”
확실히, 마교 놈들이 온갖 지랄을 떨어댄 덕분에 황폐화된 세상 속에서 이런 수림이 유지된다는 것이 놀랍기는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뿐.
그 이상의 기대는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우웅―
갑작스레 허공 한편이 소용돌이치며, 무언가를 뚝 떨어트렸다.
“읏차.”
떨어진 것은 청년도 되지 못한 소동(小童).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소동은 생긴 것과 어울리는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해 왔다.
“안녕? 네가 홍길동이구나!”
‘뭔…….’
소동은 열댓 살 먹은 아이들이 대화하듯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그에, 홍길동 역시 씨익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래, 네가 정도령이구나.”
“맞아. 내가 정도령이야. 너희들을 기다렸단다.”
“우리들을 기다렸다고?”
“우앗!”
불쑥 튀어나온 내 모습에 소동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랐잖아!”
“어? 미, 미안하다.”
그렇게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 같지도 않은데, 가슴을 쥐고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자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건지.’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마교도 놈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다 와서 그런지 이 분위기가 영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길동은 그렇지 않은지 정도령과 눈높이를 마주하며 물었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건, 정감록의 예언서에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는 뜻이니?”
즉, 예언이냐고.
능숙하게 질의를 이끌어 내는 홍길동이었지만,
“아니, 그건 아냐. 정감록에는 그런 게 적혀 있지 않아.”
정도령은 모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정감록은 그렇게 속 편한 예언서가 아니야.”
“그럼 우리를 어떻게 기다렸다는 거야?”
“홍길동 네가 연통을 넣어 줬으니까! 임금의 곳간을 털어 가난한 양민들에게 나누어준 의적 홍길동!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어!”
아…….
‘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이 우릴 기다린 건 예언 따위가 아니라… 그냥 저 도둑놈의 범국가적 도둑질에 선망이 생겼다는 거지?’
김이 새는 수준이 아니라 대체 여길 왜 왔나 싶은 기분이었다.
진지하게 저 사기꾼 약장수 놈에게 어찌하면 물리적인 친구비 환불을 받아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들 때, 정도령이 첨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기대하고 왔을 너희들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일을 내가 해줄 수는 없을 거야.”
“…뭐?”
“음, 직설적으로 말해야 하나? 그러면 더 미안해서 싫지만…….”
정도령은 헤헤, 하고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