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99화 (299/350)

299화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파는 잡서에도 시작이 있고 승을 지나 전을 거쳐 결과를 맺는 법이다.

그러지 아니하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에 결맞이 맺히면 어떨까?

결결결결 따위의 소설?

절대 안 팔리지.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러네.’

미안! 못 도와줄 것 같아, 헤헤.

쑥스러운 듯, 부끄러운 듯, 그리고 진짜로 미안한 듯 말해 오는 정도령이란 소동의 말에 나는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 말문이 턱턱 막혀 왔다.

‘뭐지? 그럼 난 여기 왜 온 거지?’

홍길동 이 새끼에 대한 원한이 자동으로 솟구쳤다.

‘내가 이 사기꾼 약쟁이 놈을 믿고 따라온 게 잘못이지.’

이놈의 언변이 보통 기가 막힌 게 아니다. 그가 벌인 전설적인 업적은 하나하나 늘어놓으면 어디 길거리 소설로나 취급될 만한 것들이 많은데, 개중 하나는 전설상의 바람 술법, 풍둔(風遁) 아가리술로 수천 명을 꼬아내 일국을 이루어냈다는 업적이다.

‘내가 속았다! 또 속았다! 하다못해 술법을 펼친 것도 아니고, 아가리술만으로 사람 수천을 꼬아낸 놈을 믿고 따라오다니!!’

제 발로 인신매매의 현장에 걸어나가 내 오장육부를 다 들어다 바친 꼴이 되었음에 통탄의 눈물을 머금었다.

그때, 내 타오르다 못해 당장 네놈의 아가리술을 선보이지 않으면 찢어발겨 버리겠다는 시선을 인지했음인지 홍길동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신기하군, 정도령.”

“뭐가 신기하다는 거야?”

“자네는 우리가 올 것은 예지의 힘으로 알아낸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미리부터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거절하니, 그 차이에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네.”

“아아. 그 부분이 궁금하구나.”

정도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별이야. 그것도, 거대한 운명을 타고난 별이지. 그런 별들일수록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는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릴 수 있어 예지 역시 함부로 닿지 못해. 그렇지만 그런 별들을 역으로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자신들의 빛을 지상에 드리우는 법이지.”

“굳이 우리에 대해 알지 않으려 해도 알게 되었다는 건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또 미안하지.”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한 정도령에게서는 거짓의 기색을 느끼기 어려웠다.

정말로 미안해하는 녀석을 보며 뭐라 말해야 할까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녀석은 먼저 손뼉을 치며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물결치더니 천지 사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

환술인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는 풍경.

그것은 저 하늘 대신 수면이 있어, 지상과 똑같은 풍경이 역으로 뒤집힌 채 자리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여긴… 만화경인가?”

당황해하는 나와 달리 홍길동 녀석은 그 정체를 눈치채고는 정도령에게 물었고, 정도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현실을 비추어 만들어지는 가상의 이계. 만화경이야.”

그리고는 곧장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독천(毒天)이지?”

“…너도 그 이름을 아냐?”

“곧잘 들려오니까. 너는 비록 산해경에 속한 이가 아니지만, 산해경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도 무시무시한 소문을 가진 존재야. 마(魔)에서 태어난 무시무시한 상위 존재들이 평범한 인간에게 토벌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는 나도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 하지만… 이렇게 보니 알겠어. 너는 정말 무시무시한 업을 쌓은 존재구나.”

흘깃 훑어오는 시선이 단순히 내 외견을 바라보는 게 아닌 그보다 더 너머의,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저런 시선을 던졌다면 소름이 오솔오솔 돋아 그 눈 치우라고 손가락으로 뾱뾱 찔렀겠지만, 이 녀석에게는 묘하게도 아무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지.”

“응, 그래 보여. 그래도 이곳은 처음이지?”

“아무래도, 그렇지?”

태어나서 이런 기괴한 곳에 올 일이 있긴 할까 싶다.

“이곳은 조금 전 홍길동에게 말했던 가상의 이계야. 현실을 비추어 만들어진 곳이기에, 이곳에 있으면 현실의 다양한 곳을 볼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원한다면 이곳에 앉아 만 리 밖도 볼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정도령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세상의 모습이 돌연 일변했다.

후웅―

“…헉?”

어느새 우리는 거대한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 되었다.

뭉게구름 위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이었고, 그 아래에는 너른 지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지상은, 온통 붉게 칠해져 있었고.

“…참, 끔찍하네.”

정도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돌연 나와 홍길동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냐면,

“고생했어. 얼마 전, 너희가 전투를 치른 장소지?”

“…그래, 그랬지.”

불과 사흘 전.

쏟아지는 마교도와 마수들에 대항해 전투를 치렀던 장소가 바로 저곳이니까.

“흘러내리는 피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천을 이루고 있다고 들었어. 산천초목이 모두 무서워 눈을 감았고, 새들은 이곳 방향으로 날갯짓도 못 하고 있어.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비명을 지르고 있고, 땅 위에 남은 넋이 구주팔황을 배회하겠지. 그만큼 강한 업이 서린 땅이지만… 지금 천하에 이런 곳은 수없이 많다고 들었어.”

그렇다.

저런 광경은 이제 와서 인세에 그리 드문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마교도 놈들은 쏟아지듯 무림으로 밀려와 중원 곳곳에 자신의 요새를 건축했고, 자신들의 본산인 십만대산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긴긴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드러내고 있는 곳이라면 찾아가 토벌이라도 할 만하지, 숨은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흉수를 뻗어와 민간인을 약탈하는 날에는 다음 날 어느 마을이 몰살을 당했다는 끔찍한 소식들이 귓가를 찔러오곤 했다.

“너희들의 업이 참 크고 무겁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 하루하루가 버거운 날이고, 지쳐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 그저 앞으로만 향하는 날들이겠지. 그래서, 나 역시 돕고 싶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정도령이 다시금 손짓하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그것은 지금껏 펼쳐졌던 시산혈해가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

보이는 건물 양식조차 중원의 것과는 달라서, 흙과 지푸라기 그리고 나무 등으로 된 집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성벽마냥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었다.

중간중간에 뾰족한 첨탑으로 된 건축물들도 몇몇 섞여 있는 것이, 저 서방에서 넘어왔다는 비단 상인들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는 풍경이었고 그걸 보여주는 모습에 의아해할 때 장면은 또다시 일변하여 거대한 전장을 비추었다.

- ……!!

- ……!!

들려오는 것은 알 수 없는 언어들.

그러나 그것이 적의와 살의, 맹렬한 투쟁의 함성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각기 중원의 것과는 철제 갑옷을 입은 이들이 말을 탄 채 두껍고 길쭉한 창을 들고 서로 부딪치는 혈전을 선보였다.

말을 탄 채 내찌르는 거대한 창은 그 모습이 말뚝과 같아서, 거기 꿰인 이들은 원래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해 육편으로 터져 나갔다.

그런 전투가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었고, 썩 보기 좋지 않은 광경을 연출하던 풍경은 돌고 돌아 그것이 거짓이었던 듯 원래의 한적한 산길이 되었다.

“세상은 넓어. 누구보다 힘든 전투를 이어 가는 너희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그런 전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음, 세상의 전장은 많고, 그 전장에는 각기 어울리는 전사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네 전장은 여기가 아니라는 거냐?”

“…그런 말이네.”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내 목소리에 미안하다 말하는 정도령의 말이 무겁게 들려왔다.

어쩔 수 없다 말하는 것이 충분히 진심인 것도 알았고, 녀석에게도 업이 있어 함께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괜스레 날카롭게 말한 내 물음이 한낱 화풀이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조금 전 보았던 유쾌하지 못한 풍경 때문인지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럽네. 원하는 전장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니. 그것이 대예언자의 권능인가?”

“이보게, 친구.”

홍길동이 당황해하며 내 어깨를 잡았지만, 나는 그것을 쳐내며 말했다.

“싸울 장소를 골라서 싸울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싸우기 싫어도, 억지로 싸움에 끌려 나오는 이들이 왕왕 있지. 그리고… 적어도 그 전쟁에서 타의보다 자의를 더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더 말을 이어 가려던 나는 토해지려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결국, 여기서 더 말해 봐야 내가 하려는 것은 내가 강제로 싸우고 있으니 너도 와서 싸우라는, 그런 강제를 떠넘겨버리는 무책임하고 무도한 화풀이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과민 반응해서.”

“응, 아니야. 이해해.”

내 사과에 정도령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노는 합당한 거야. 너 역시 싸우고 싶어 싸우는 게 아닌 이상, 네 말처럼 싸울 전장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내가… 그에 그럴듯한 논리를 덧붙이고 있으면 화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걸 아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내 선택을 바뀔 수 없어.”

그것이 옳고 절대적인 명제라는 듯 정도령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예정된 예언의 존재이자, 구원의 증명. 그리고 잘못된 시공에 내던져진 등장인물이지.”

다만, 그 말이 좀전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잘못된 시공?”

홍길동이 그 말에 의아해하며 반응하자 정도령은 그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역시 마찬가지지. 그거 알아, 홍길동? 너와 나는 원래 지금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인물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저, 그렇게 알게 된 것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환신이라 불리는 홍길동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으니, 나 같이 무예밖에 모르는 무지렁이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지 정도령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정해져 있어. 홍길동 네가 이 머나먼 이억만 리 타국에서 스스로 혈업을 쌓길 선택한 듯, 나 역시 내가 업보를 쌓기 위해 준비하는 때가 있어. 그것은, 저 불길한 삼정(三情)의 별이 가장 큰 기운을 북돋을 때야.”

정도령의 눈이 저 하늘을 향했다.

내가 볼 때는 그저 마른하늘일 뿐이지만, 정도령은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최대한 힘을 아껴 놔야 해. 모산 역시 그걸 알기에 나를 거둬들인 것이지.”

짝―

거기까지 말한 정도령은 다시 한번 환기하듯 손뼉을 부딪쳤다.

“말이 길어졌어. 너희에게 미안해서 최대한 자세히 말하려 했지만 지금 보니 괜한 혼란만 부추긴 것 같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를 하려고 해.”

“그게 무엇인가?”

“여기서 좀 쉬고 가.”

장소는 또다시 일변했고, 푹신한 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비추어진 공간. 그 말은 시공 역시 바깥과는 다르다는 뜻이야. 너희가 큰 업을 쌓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휴식을 취하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열두 시진이 바깥에서는 고작 일 각에 준하는 시간으로 흐르게 될 거야.”

그러니까 좀 쉬고 가라고.

사흘 전까지 두 명이서 수천을 상대하고 왔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제안을 해오는 정도령이었고, 우리는 그에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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