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생각해 보면, 참 많이도 도움받았지.’
자신은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하기에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한 정도령이었지만, 녀석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마교와의 전쟁이 심화될수록, 한시라도 시간을 아껴서 움직여야 하는 이들이 빈번해졌다.
그럴 때마다 정도령이 제공해 주는 휴식은 정신에 쌓인 피로를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제법 친해졌고.’
아이처럼 순수한 정도령은 피와 살의에 젖은 일상을 보내던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었고, 끝끝내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을지언즉 꽤 괜찮은 인연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돌고 돌아 지금.
“여기도 참, 오랜만이네.”
한때는 종종 왔던 모산파의 본산에 들어서니, 여러 가지 감상이 물씬물씬 피어올랐다.
“그러게 말이야. 그때는 너도 홍길동도 참 많이 왔었는데.”
“그랬지.”
망연히 모산파의 정경을 바라봤다.
산해경에 속한 곳인 만큼, 일반적인 산속에서는 보기 힘든 기이 영초들이 많이 자라 있었고, 그게 또 사람에게 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감상에 젖어 가만히 있자니, 문득 정도령이 말해 왔다.
“그… 미안해.”
“응? 갑자기?”
“도와주지 못한 거.”
“마교와의 대전 말하는 거냐? 그거야 너에게 충분히 주의를 들어서…….”
“아니, 그거 말고.”
괜찮다고 손을 저었지만, 녀석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 말이야.”
“…아아, 난 또 뭐라고.”
정도령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억지로 모르는 척 넘기려던 것일 수 있다.
녀석이 말하는 건 다름 아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내가 죽고 난 이후, 몰려오는 마교들의 공습에서 당가를 돕지 못했던 것.
“괜찮아. 어쩔 수 없던 거잖아.”
다시 한번 아니라고 말해 보지만,
“…정말로?”
녀석은, 이 아이처럼 순수한 녀석은, 떼 묻지 않은 그 순수함으로 거짓 장막을 훤히 꿰뚫어보며 물어왔다.
‘정도령.’
슬며시 눈을 마주치니, 떨리는 동공이 보였다.
그 안에 깃든 것은 죄책감, 미안함, 그리고.
‘두려움.’
나에 대한 미안함이, 그리고 내가 녀석에게 느낄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두려움이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이유가 있었겠지.”
괜찮을 수가 있을까.
“독천…….”
안타깝게 내뱉는 한때의 우정어린 호칭이 더욱 맘을 아프게 짓눌러 왔다.
‘속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믿음이라고 표현한다면 우습겠지만, 나에게도 한때 마음을 주었던 녀석들이 있다.
언제 어쩌다 그리 친해졌는지 나 역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믿었던 녀석들이 있다.
이런 표현은 조금 오글거리지만, 녀석들이라면 세상을 적으로 마주한 데도 등을 맞길 만한 그런 관계를 이루기도 했다.
‘그랬기에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을 믿기 힘들었지.’
지금에 와서도 애써 돌아보지 않는 곳들이 몇몇 있는 것은 그런 이유.
삼십 년 전 인연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다 그러한 이유의 결과일 뿐이었다.
‘어찌 됐건 당가는 망해 버렸고, 그때 혈족이란 놈들은 실컷 고통받다 죽었다. 다른 녀석들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 간에, 본가가 힘들 때 손을 내뻗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모른 척하기로 했다.
다 이유가 있었겠지, 다 사연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모른 척하려 했다.
그렇지만,
“됐다. 다 지나간 일이다. 말해 무엇하냐.”
애써 먹먹해 오는 목에 힘을 주어 말을 내뱉어 봐도, 이미 한 번 무거워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그보다. 대체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칙칙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화제 전환이나 했으면 싶다.
“으응? 무엇을 하냐니?”
“이거, 네가 만든 거 아냐?”
품에서 꺼낸 것은 이젠 다 타버린 종이 쪼가리.
한때는 수호부라 불리던 물건이지만, 이제는 그 성능을 다해 다 탄 재에 불과할 뿐인 물건이다.
그러나 정도령쯤 되는 술사라면 충분히 그 정체를 알 만했다.
“아앗! 그건!”
“네가 만든 거 맞지?”
“그, 그게…….”
모로 돌린 시선.
어색하게 맞닿는 검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모든 게 긍정임을 뜻하는 행동거지에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모산파 전역에 설치된 진법은 아직도 그 힘을 잃지 않았더군. 그럼 도둑맞을 일은 절대 없을 테고. 그런 놈들 따위가 무력으로 너를 겁박할 수 있을 리도 없을 텐데… 너 설마, 이걸 직접 준 거냐?”
“…아냐.”
“응? 뭐라고?”
초인의 경지에 도달한 신체 능력으로도 잘 안 들리는 목소리.
귀를 기울이며 되묻자,
“…준 것은 아냐. 도, 돈 받고 판 거야…….”
“…돈 받고 팔았다고? 아니, 왜?”
대체 왜?
이건 진짜 헥헥이가 공중 부양하는 소린데?
“그… 요, 요즘… 모산파의 가계가… 부쩍 안 좋아졌거든…….”
“…어?”
“그러니까…….”
세상에나.
이어지는 정도령의 말은 처참했다.
“…돈이 없어서, 의협맹에다 술법을 내다 팔았다고?”
“수, 술법을 내다 팔았다니! 나, 나는 그저… 자기 몸을 지키는 정도만 알려준 것뿐이야!!”
지도 부끄러운 걸 아는지 빼액 소리치는 정도령이지만,
‘이놈아, 너는 팔 곳이 없어서 그딴 곳에다 팔고 있냐…….’
글쎄.
듣는 입장에서는 편두통이 지끈지끈 몰려오는 소리였다.
‘더 웃긴 건, 사연이 제법 그럴듯하다는 점인가…….’
산해경이니, 중원 방술의 총본산이니 하는 모산파지만, 결국 얘네들도 먹고살아야 하는 집단인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예전에는 있는 집에서 종종 모산파로 찾아와 재물을 바치고 하니 어느 정도 유지가 됐지만, 마교대전의 영향과 그 이후 이어지는 나타협의, 만가쟁패의 시대적 사연이 모산파를 향한 기부액을 뚝 떨어지게 만들었다.
‘인간이 힘들면 신적 존재를 찾게 된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너무너무 힘들어지면 신을 찾을 여유조차 없어지니까.’
참배 오는 향객도 줄고, 재물을 바칠 이도 없어지니 자연스레 모산파는 가난해져 갔다.
애초에, 모산파가 숨만 쉬고 절제를 미덕으로 아는 이들이라면 돈이 없어도 궁할 일은 없지만, 정도령은 미래에 다가올 대전(大戰)을 대비할 책임이 없기에 꾸준히 재물을 필요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는 건가.’
정도령도 나름 선을 지키려 했다고 한다.
아무에게나 술법을 팔았다가는 악용될 가능성도 있고, 저주술 등을 팔았다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행한 것이 목숨을 구해 줄 수호부를 판매한다든가, 외부의 침입에서 집단을 지켜줄 무한미로진을 설치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름 가려서 뽑았다는 게,
‘이름은 그럴듯한 의협맹이었지.’
일 년 전 정도령이 속세에 내려왔을 때는 의협맹의 평판이 꽤 좋았더란다.
그게 전부 의협맹에서 벌인 수작에 불과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마다 의협맹이라는 집단에 대한 호평이 가득했으니 정도령은 그런가 보다 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예전처럼 참배를 오는 향객이 많아 그들이 의협맹에게 당한 악행을 고하기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또 하필 만가쟁패 이후 향객의 방문이 전멸하다시피 하는 수준이라 알 기회도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적합하게 떨어지니 정도령은 아무 생각 없이 의협맹에 가서 술법을 팔았고, 그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진태란 놈은 ‘이건 물건이다!!’하며 감언이설로 정도령을 대하고 극진한 예와 값비싼 재물을 바쳐 호감작을 해서 무한미로진까지 설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에라이!”
“악! 왜 때려!”
“때릴 만해서 때린다!”
문득 홍길동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술법사라는 이들은 사실 다 학식 높은 바보들이라네. 세계의 진리와 같이 오묘하고 복잡한 것에는 누구보다 깊게 다가가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꼴은 모르니까.”
속세에서 떨어진 이들일수록 쉽게 범하는 과오.
그걸 깨달았을 땐 대부분 늦은 후라 말하는 녀석이었고, 임금의 곳간마저 털었던 그에게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지는 내가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연히 떠오르는 어떤 놈의 서글픈 표정은 뒤로하고, 혀를 차며 눈앞의 소동을 바라봤다.
“해서, 다 우연이었다는 거지?”
“…독천 말처럼 나쁜 놈들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러셨겠지.”
의협맹이 또 대단히 나쁜 놈들이어서, 그 악행과 업보가 천문에 비추어질 정도까지라면 정도령도 알았겠지만, 또 그만큼은 아닌 잡배와 같은 것들이라 벌어진 사달.
이제 보니 신경 쓸 가치란 한 터럭조차 없는 일에 결국 ‘에휴’ 하는 한숨과 함께 털어 넘겼다.
그리고, 그런 내게 정도령이 물어왔다.
“그런데 독천.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말해라.”
“그…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분명, 독천의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었어. 그래서… 나는 독천이 이제 정말 없어진 줄 알았어.”
“어떻게라…….”
그건 내가 참 묻고 싶은 건데 말이다.
눈 뜨고 일어났더니 삼십 년이 지났다는 말을 어찌 설명해야 될지 고민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정도령이라면 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말했고,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 왔는지도 얘기했다.
그러자,
“…눈을 떠보니, 삼십 년 뒤인 지금이었다고?”
정도령은, 답지 않게 딱딱히 굳은 얼굴로 되물어왔다.
“뭐, 그렇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도 녀석은 당장 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펼쳐 손가락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것이 어떤 복잡한 계산을 하는 듯했다.
“정도령?”
기다리다 못해 결국 다시 녀석을 부르자,
“…독천.”
녀석 역시 나를 마주하며 진중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까지 한 말들, 전부 다 진실이야?”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지. 내가 마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고.”
정도령은 그래도 한때 함께했던 녀석이었기에, 혼원신공을 만들고 마교도 놈들을 박살 내며 마수라 불리는 놈들까지 집어삼킨 걸 다 얘기했다.
애초에 녀석 앞에서 내가 마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 부분을 숨기는 것도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아니, 독천이 마기를 다루는 건 중요치 않아. 독천이라면 설령 마기라도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다만, 내가 진짜냐고 묻는 건 정말 일 년 전에 부활했냐는 이야기야.”
“그야 뭐… 그렇지? 깨어난 이후 정확히 날짜를 헤아린 건 아니지만 대충 그 정도야. 왜 그래?”
“후우…….”
내 물음에 녀석은 당장 답하기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표정을 더욱 딱딱히 굳히며 말했다.
“독천. 내가 모산파의 가계가 어려워졌다고 말했지?”
“그랬지.”
“그건 말한 대로 참배객이 줄어들고, 기부금이 줄어들었기 때문도 맞아. 하지만 더 중요한 이후는 일 년 전쯤, 천문을 읽으며 삼정의 기운이 더 없이 강하게 발함을 관측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난 하늘의 조화가 내게 내정된 천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려주었어.”
“…뭐?”
그 말에 나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발호에도 가만히 있었던 녀석이, 일 년 전에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그때부터였어. 나 역시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만 했었고, 그전까지 지식으로만 축적하던 것들을 실제로 구현해 내야 했어. 다가올 겁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쌓아 올리기 위해선 정말 많은 재물이 동반되야 했으니까.”
그게 하필이면, 나의 부활과 동일한 때에 이루어졌고.
정도령은 굳은 안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입술은 몇 번이나 오물거리길 반복했는데, 그건 마치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정도령은 결국 결심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독천.”
“…말해.”
“검천(劍天)을 찾아가.”
내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