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삼대천(三大天).
마교에 일곱 주교들이 있다면, 정파에는 세 명의 하늘이 있다.
첫 번째는 당연 독천(毒天)이라 불린 나였다.
‘언제부터였더라.’
한때는 독귀(毒鬼)였던가, 독악(毒惡)이었던가로 불렸던 것 같은데 마교도 놈들 일천 정도를 홀로 몰살시킨 뒤에는 그렇게 불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나와 같은 급으로 불린 녀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검천(劍天)… 당대 천하제일검이었다.
“…검천이라.”
그 이름의 무게는 내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녀석에게 붙었던 수많은 이명.
검천(劍天)이라든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든가, 만검지련자(萬劍之戀者) 등을 제외하고도, 녀석은 내게도 꽤 특별한 인연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힘들겠어?”
“괜찮아, 이 녀석아.”
불안한 듯 나를 올려다보는 정도령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겠냐. 너도 사정이 있었겠고, 그 녀석도…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
그럴 거다.
사정이 있었을 거다.
녀석의 실종도, 그 이후의 일들도, 심지어,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지.”
그런 모든 일이 있은 뒤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건…….”
“살아 있는 것 맞지? 네가 찾아가라는 것.”
정도령의 말이 한낱 유골 따위나 찾아가서 남아 있는 기연을 회수하라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놀랍지만, 그 녀석이 아직 살아 있고 그런 녀석에게 직접 찾아가 그간 있었던 일들과 그 이후에 대한 대담을 나누란 것이겠지.
녀석의 입장에서야 내가 몰랐던 것을 알려준 것이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준 것일 테니 괜히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냐, 독천.”
씁쓸히 웃으며 너의 뜻을 알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정도령은 고개를 저었다.
“널 위한 조언도 맞고, 검천이 살아 있는 것도 맞아. 하지만 순서가 잘못됐어.”
응?
“애초부터 검천이 한 말이야. 너에게 찾아오라고 한 것은.”
“…뭐?”
내가 지금 뭔가를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하는 내게 정도령은 다시 한번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몰랐어. 네가 돌아올 것이란 걸. 솔직히, 그때의 검천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 그때의 검천은 그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한 호흡.
쉬어 가는 정도령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무엇을 부정하는지도 모르는 주제 막연히 부정만 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거대한 진실이 태동하려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주먹을 꽉 쥐며 호흡을 정돈하려 했다. 그러나 정도령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검천은 말했어. 네가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그때 그 말을 믿지 못했어. 그저 검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검천의 눈빛은 한낱 망상이나 광신 따위가 아니었어.”
그건 뭐랄까.
“좀 더 확실한 믿음. 독천, 너라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 믿음이었어.”
“…하.”
어이가 없다.
믿음이라고?
내가 돌아올 것을 믿었다고?
“무슨…….”
대체,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꾹꾹 눌러놨던 오만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뒤섞이는 기분이었고, 그런 감정의 급류 속에선 인정조차 하기 싫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두 손을 들어 눈자위를 꾹꾹 눌렀고, 두서없이 흘러나오려는 말들을 가다듬어 겨우겨우 문장으로 엮었다.
“…정도령.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말들이 믿기지 않아.”
“응, 알아.”
“네 말도 믿기지 않고, 그 녀석이 했다는 말도 믿기지 않아. 이제 와서… 왜 하필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무엇보다, 알잖아? 그 녀석은… 결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녀석이라는 걸.”
검천(劍天).
검의 하늘이라 불렸던 녀석은 그 별명만큼이나 고고하고 자존심 드높았던 녀석이다.
암만 어려운 일이라도 결국 스스로 해내고 마는 녀석이며, 자신의 일이라면 곧 죽어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는 녀석이고, 그렇기에 진정 검의 극의에 달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던 녀석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대체 왜 그때는…….’
순간 울컥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녀석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비례하는 배신감.
이제 와서 숨기는 게 같잖을 정도의 저열함 감정들을 씹어 삼키며 내뱉었다.
“그런 녀석이, 왜 네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거냐? 녀석이… 정말 녀석이 살아 있다면…….”
“분명 직접 만나러 왔겠지. 그리고, 독천은 검천을 만나지 않았을 테고.”
“……!”
더 없이 처연한 어조로 정도령은 말했다.
“독천. 네가 검천을 알듯, 검천 역시 너를 잘 알아. 지금 검천에게 너를 만나러 가기 힘든 이유 역시 분명 있겠지만, 검천이 직접 독천을 찾지 않은 걸 좀 더 근본적인 이유야.”
“용서…라도 구하겠다는 거냐?”
“아마도.”
“하…….”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멋대로 떠나갔던 주제,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겠다고?
‘내가 용서하고 찾아가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만날 자격이 없다는 거냐? 그런 주제 삼십 년간 줄곧 나를 기다렸고?’
웃기지도 않은 말이지만, 그 말을 한 것이 검천이라면 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검천이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독천, 내키지 않는다면 만나러 가지 않아도 돼.”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정도령은 조심스레 그리 말했다.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녀석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듯했다.
“흥, 그러려면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냐.”
“미, 미안…….”
“됐어. 솔직히, 아직은 결정 못 내리겠으니까.”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삼십 년이 흘렀다지만, 내게는 고작 일 년에 불과한 시간일 뿐이다.
그마저도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녀석과의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으니, 검천과의 일은 아직 이렇다 저렇다 결론 내기에는 이르다.
‘이게 설령 한낱 어리광에 가까운 행동일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 * *
의협맹으로 돌아왔다.
정도령과 할 말이 더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추가된 정보량이 너무 많아 지금 이야기를 끝내기도 어려웠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병목 현상이 일어나버렸다고나 할까?
결국 터벅터벅 돌아온 의협맹에서, 나 없는 동안 전직 의협맹 문도들을 족치고 있는 방계 놈들을 집합시켰다.
“속은 다 풀었냐?”
“헤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협맹인가 뭔가 하는 놈들 족친 거. 사적 감정 하나 없다 자부할 수 있냐고.”
“하하, 그야 물론…….”
“물론?”
“…자부 못 하죠.”
그럴 줄 알았다.
가뜩이나 그놈들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던 방계 놈들은 내게 당한 것까지 전부 그들에게 전가했다.
‘그게 무림인이지.’
우리가 어디 법도와 규칙을 잘 지키는 놈들이던가.
협의라는 형체도 없고 규격도 없는 것들을 지키는 놈들에게 감정 없이 칼같이 법의 심판을 따르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해서, 나온 건?”
“뭐… 별거 없습니다.”
당지명은 머릴 벅벅 긁으며 마당 중앙에 쌓인 장부들을 가리켰다.
“어지간히 받아 처먹고, 어지간히 해 먹었더랍니다.”
이런 놈들이 하는 행동이란 결국 다 거기서 거기.
얼마나 일관적인 놈들인지, 반전도 감동도 없다.
“해서, 빼앗긴 것들은 양민에게 나눠주려 합니다.”
“나눠주면, 양민들이 안 뺏길 거라는 보장은 있냐?”
“사흘만 주십시오. 서안에 있는 모든 흑사파들을 갈아버리겠습니다.”
“전부?”
“관리할 놈들 하나 정도는 빼놔야죠.”
힘없는 양민들에게 재물을 나눠준다면, 그것은 재물이 아닌 재앙을 나눠준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는 쌀 한 줌을 훔치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것이 난세인 만큼, 평생 사람 등쳐먹고 살아온 흑사파 놈들이라면 우리가 나눠준 재물을 탐하려 양민들에게 해코지할 가능성이 높다.
“흑사파 놈들을 부려서 양민들을 지켜보겠다?”
“죽기 싫으면 지키지 않을까요?”
“허허.”
독단 몇 개를 슬그머니 꺼내 드는 모습을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다.
‘아주 훌륭하게 자랐구만.’
넘쳐 오르는 뿌듯함을 애써 내리누르며 두 번째 질문.
“그럼, 관은 어떻게 할 거냐? 우리 입장에서야 저들이 양민들에게 빼앗긴 걸 다시 그들에게 돌려줬을 뿐이지만, 관아의 입장에서는 불법 소득일 뿐일 텐데?”
어려울 때 양민을 지키라고 있는 것이 법과 관아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오히려 그런 양민을 수탈하는 게 관이다.
탐관오리라고 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관인이 그러했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천성주는 정말 손에 꼽을 목민관이다.
“힘으로 양민들을 억압하는 이들을 말씀하시는군요.”
당지명 역시 그들의 존재를 잘 알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하겠습니까. 힘으로 사람을 억압하려는 이들에게는 더욱 큰 힘을 부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본가에서 사천성과 어느 정도 연이 있으니, 그들로부터 압박을 넣어 서안의 관리들이 양민의 재산을 탐하지 않게 하려 합니다.”
“사천성주를 움직이겠다? 그래, 사천성주 정도면 손에 꼽힐 목민관이기는 하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호인이기는 해도 호구는 아니야. 굳이 남의 관할 성내까지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이 되는 것. 중앙 황실에서 그가 어떤 사상과 의도를 가졌는지 의심할 수도 있으니 사천성주라고 쉽게 그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을 텐데?”
“그럼 쉽게 안 하면 됩니다.”
쌓여 있는 장부들.
개중 하나를 들어 보인 당지명이 내용을 펼쳐 보였다.
“보통 뒤가 더러운 놈들일수록 빠져나가려 개수작을 벌이는 법. 뒤져보니, 서안의 관리들에게 뒷돈을 먹인 정황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이것들을 사천성주에게 보낼 생각이고, 의협맹의 창고에 쌓여 있던 것 중 일부 재산을 동봉할 생각입니다.”
“정치적 공격 수단과 의뢰비를 동시에 제공하겠다? 그리고, 그 의뢰비는 여기 있는 것들로 퉁치고?”
“저희라고 협객이니 호인이니 주장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호구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격.”
“예?”
“합격, 합격이다.”
와, 이게 궁상맞던 당지명이 맞냐?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맨날 어디 모자라서 처맞고 다니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당주랍시고 꺼드럭거리다가 꼭 어디 하나씩 빠져서 곤경에 처한다.
계획이라고 짠 것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보면 볼수록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놈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정도면 진짜 봐줄 만한데?’
어느새 성장한 건지.
뒤처리까지 그럴 듯하게 해내는 모습에 눈물이 떨리고 손발이 날 지경이다.
“저, 형님?”
“네 맘대로 해라.”
이 정도면 진짜 휘적휘적 떠나가도 될 것 같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좀 전까지 술술 계획을 읊어대던 녀석이 안절부절 좌불안석 표정으로 발걸음을 잡았다.
“왜?”
“그… 여기 일은 상관없는데, 진짜 괜찮겠습니까?”
“뭐가?”
“총관님… 말입니다…….”
“아하.”
난 또 뭐라고.
확실히 이렇게 일을 키워 놨으면 당가의 행보가 정천맹 내부에서 결코 곱게 비추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 총관인 당궁상이라면 발작을 하겠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래도 협의를 위한 행동이었는데.
* * *
“야, 이 개자식아!! 그냥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