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옛말에 마을 논밭을 어지럽히는 멧돼지를 잡으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아 고기 한 점씩 나누는 좋은 풍습이 있다고 하더라.
의협맹이 딱 그 꼴이 되었다.
‘자자, 모두 모여서 한 주박씩 받아 가십쇼!’
배부른 돼지의 배를 가르듯, 의협맹 곳간의 열어젖힌 뒤 그곳에 축적된 재산을 그들에게 수탈당한 양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들이 감히 처분하기 힘든 영약과 재산은 사천당가의 품속으로 쏙쏙 들어왔고, 그와 동일한 가치를 재어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에서 매입되는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공식적으로 영약 보검들이 그에 합당한 가치가 매겨져 있다 해도, 매년 재배할 수 있는 작물과 몇십 년에 걸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초들의 희귀도는 다른 법.
광형상단의 실무자들은 희희낙락하며 좋아했고, 장강수로상단의 육언도 마침 필요한 것들이 많았는데 잘 됐다고 좋아라 했다.
그야말로 모두가 좋은 결과.
경사났네! 경사났어!
대부분이 그렇게 손발을 짝짜꿍하며 좋아라 하며 웃었지만, 꼭 이럴 때도 초치는 양반들은 한둘씩 있었다.
“야, 이 개자식아!! 그냥 죽어라!!”
한 손에 죽간을 들고 달려와 내 멱살을 쥐고 흔드는 총관 놈이 그랬다.
“허허, 선업을 쌓고 온 몸에게 죽어라니.”
“선업? 이 개자식이 선업이라고?! 이딴 게 선업이냐!!”
당궁상은 한 손에 쥔 죽간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게 대체 뭐냐!! 당장 해명해라!”
“엥? 그거 소식지잖어.”
지금은 정천맹의 정보 부서인 조서당으로 화한 하오문 사천지부의 주력 상품이다.
“흐흐, 전 무림의 주요 쟁점을 간략하게 적어 판매하는 것입니다요. 한 지역에만 통용되는 정보는 수요가 한정되어 있겠지만, 전 지역에 통용될 정보는 곧 돈이 됩니다요! 장강수로상단이란 막대한 유통 경로까지 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남는 장사!!”
금욕에 눈이 멀어버린 하윤호가 한때 소리치며 말했고, 그 광기 어린 외침을 보자니 못할 것은 또 없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주 단위로 발간되는 소식지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당연히 알지. 기밀은 아니더라도 세력을 일군 이들이라면 꼭 알아야 할 전 무림의 쟁점들을 단돈 금화 한 냥만 내면 주 단위로 받아볼 수 있다고? 이야, 이거 완전…….”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다물어라.”
웁웁.
진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호신용 비도를 내 입 안으로 집어넣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얌전히 두 손을 들며 백기 투항을 표시하자 당궁상은 한참이나 씩씩거리다가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게 대체 무엇이냐. 사천당가, 거짓으로 얼룩진 의협맹 징치? 퍽이나 좋은 글귀군.”
“덕분에 명성은 대거 획득했잖아?”
“그런 단면적인 부분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알죠.
모를 리가 있나.
“일각에선 거대 집단의 횡포에 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일각은 무슨, 다 알겠지만 다른 거대 문파들이 슬슬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흐, 하여튼 기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노리는 놈들이라니까.”
당가가 확장되며, 당가 내부에 여러 가지 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개중 당궁상 녀석에게도 정보를 구할 줄 몇 개를 붙여주었고, 그로부터 보고된 내용을 확인한 것인지 인상을 팍팍 찡그렸다.
“지금까지 네가 잡룡파라는 웃기지도 않은 집단을 통해 움직인 것은 사실 너무나 작고 소소한 것들이었지. 그들이 집어삼킨 것은 사신단을 이루는 나머지 거대 세력이 보기에 손발은커녕 손톱 발톱만도 못한 것들. 본가에 유효한 타격을 주기는 힘들다 판단해 이렇다 할 반격도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
지금껏 잡룡파가 온갖 난리를 피울 때도 가만히 있던 거대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건 그 자체로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상당히 좋은 타점이라는 방증이다.
“창천회라고 알고 있나?”
“딱 봐도 남궁세가 떨거지들 같은데?”
“정확하다. 남궁세가를 추종하는 여러 문파의 연합으로, 그 회주는 남궁세가의 속가문인 창천검문의 장로. 그가 아미파와 점창의 인사들과 회동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미 다 망한 놈들이랑?”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 않더냐. 다 망했다 해도 아미와 점창이 사천 밑바닥에 남아 있는 연줄이 아주 말소되지는 않았으니, 명확하고 정확하지 않은… 그러나 그 덕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음모론을 뿌리기에는 가장 적합한 동맹 대상이다.”
세상에나.
똥과 똥이 만나 거대한 똥 덩어리가 된 걸 목격한 심정이다.
‘걔네들은 할 게 없어 그딴 놈들이랑 붙어먹나?’
톡톡 손가락을 두드리며 내가 들은 그 끔찍한 현실에 관한 실현 가능성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건 뭐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니, 오히려 안 하는 게 이상한 일이지.’
지금 당가는 정천맹 입장에서는 누구나 입에 군침을 물고 달려들 잔칫상과 다름없다. 사천 전역에 해 먹지 않은 사업체가 없고, 정천맹 요소요소에 알 박기 해놓은 부동산도 차고 넘친다.
그중 일부만 이번 건으로 양보받아도 누구나 흡족히 배를 불릴 수 있는 만찬이 되겠지.
지금 여기서 따지자면,
“뭉친 놈들이 걔네 둘 뿐이야?”
어째 달려들어야 할 놈들이 적은 수준이다.
“둘 뿐이겠나? 가장 큰 놈들이 그들이란 것이지, 과거 구파일방이라 불리던 이들도, 현재 각 지역에서 힘 좀 쓴다는 놈들이면 전부 조금씩 사람을 보내고 있다.”
“우리 하나 잡겠다고?”
“우리 하나 잡겠다고.”
“쩝… 거, 섭섭하네.”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사천의 귀염둥이 당가에게 이 무슨 모진 핍박의 연속인지.
“섭섭함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지. 네 녀석, 여기까지 생각하고 벌인 일이겠지?”
“에이, 그건 당연히 아니지.”
“뭐라고? 진짜 미친 거냐!!”
“아니… 암만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다 어떻게 준비하겠냐고. 나도 이번 일은 자의로 벌인 게 아니라니까?”
방계 놈들이 제멋대로 사고 쳐버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도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처음에 방계 놈들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사고를 쳐버린 거고.’
방계 놈들이 하필 당가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분노 조절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싶다.
“아무튼 난 몰라.”
“모르면 일이 해결되더냐!!! 대책을 가져와라! 대책을!!”
“아니 뭐, 나라고 그렇게 재촉한다 해서 딱히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
“야, 이 자식아! 그럼 어쩌란 말이냐!!”
“몰라.”
“으아아아아!!”
오늘 진짜 너 죽고 나 죽자며 생사결을 결하려는 당지명을 진정시키길 한창.
결국 밖에서 대기하다 오늘 사람 하나 잡겠구나, 싶었던 방계들이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렇게, 고혈압의 위협에 시달리는 당궁상이 뒷목 잡고 돌아가고, 나 역시도 마냥 웃고만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일단 상황 해결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해서, 저보고 해결안을 가져오라는 말씀이십니까요?”
“뭐야, 설마 내가 올 거라고 예상 못했어?”
뭘 또 새삼스럽게.
일 터지면 당연 찾아올 일 순위 대상께서 모르쇠를 하려는 모습에 허허롭게 웃어주자 하윤호 역시 많은 걸 해탈한 모습으로 허허 웃었다.
“소식지 팔아먹을 때는 좋았잖아. 이제 돈값을 해야지.”
“끄으응…….”
애써 현실을 부정하던 하윤호지만, 이제 올 게 왔다는 걸 인지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것이라 예상은 했습니다요.”
“오호, 그럼 대비책도 준비해 놨겠지?”
“사실, 그 부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요.”
“으이? 예상했다며?”
“예상한 것과 대비책을 준비해 놓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요?”
“허허, 어디서 개수작부리며 빠져나가려는 냄새가 나는데?”
하윤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쭈? 이러다 한 대 치겠다?
“…후우, 완벽한 해결책은 없습니다요. 그래도, 해볼 만큼은 해보는 게 좋겠습죠.”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뜨거움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인지, 하윤호는 주화입마 속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 해탈한 고승마냥 반장을 취했다.
“우선, 첫 번째는 저희에게 쏠리는 관심 자체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입니다요.”
“쏟아지는 관심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으니, 그것을 분산시킨다? 방법은?”
“별것 있겠습니까요. 그간 모아둔 각 거대 문파의 중진들, 그들이 벌인 비리 사실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유포하는 것입지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두 번째는?”
“아직 일각에서 우려를 표한다… 수준일 때 미리 당가의 인식을 좋게 만들어두는 것입니다요. 기부를 한다거나, 산적을 토벌한다거나, 양민들을 도우러 인력을 차출한다거나 등등. 그런 활동들을 홍보해서 미리 좋은 인식을 깔아두면 추후의 상황에 대처하기 좋을 것입니다요.”
“훌륭하네.”
그야말로 논란이 터졌을 때 대처하는 왕도와 같은 방법.
항상 정치 무인 놈들이 할 것 없으면 자선 단체들을 만들어 양민들을 돕게 하고, 자신들을 맨 마지막에 얼굴 한번 슥― 비추고 난 뒤 그것들을 널리널리 홍보해 선한 인식을 덧씌우는 게 딱 그 짝이다.
‘어디 논란 터지면 꼭 전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논란이 터져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도 똑같고 말이야.’
남들이 써먹을 땐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싶지만 내가 써먹자니 이보다 훌륭한 방법도 몇 없다 싶다.
“좋긴 한데, 잘못되면 알지?”
“전적으로 하오문에서 벌인 일입지요.”
훌륭하다.
자고로 아랫놈이 벌인 일은 윗분이 모르도록 해야지.
실로 흡족한 일 처리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안심이 되는 것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서 끝이 아닌 것은 잘 알겠지?”
“그야 물론입니다요.”
이것들은 당가에 가해지는 압력을 흐트러트릴 회피 수단을 될지언정, 그 압력 자체를 없애는 본질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시간 벌이가 끝이고, 시간을 버는 동안 논란과 관심이 사그라들어 부담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궁여지책에 불과할 뿐.
“어디 뭐 화끈한 거 없나? 우리에게 향할 정치적 공격을 흐트러트리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떠넘겨버릴 큰 것 말이야.”
“끙… 그런 건 없습니다요. 대개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런 내부의 문제는 외부의 문제에 의해 덮일 뿐이었습니다요. 그건 달리 말하자면, 외부에서 그에 준하는 문제가 일어나야만 완전히 덮인다는 뜻입지요.”
그러니까, 당가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자면 외부에 전쟁이라도 터져야 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암만 우리가 가해지는 압력을 해소하고 싶다 쳐도 진짜 전쟁까지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뭐 별수 있나. 다른 일이 터지길 바라야지.”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남은 것은 기도드리는 것뿐.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진짜 다른 무슨 일이 터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미 머리 아프게 하는 일들은 질릴 정도로 많이도 일어난 뒤였으니, 이번 일도 적당히 대리인 내세워서 다른 거대 세력의 정치적 공격에 어느 정도 처맞아 줄 생각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이만큼이나 우리가 무럭무럭 자라났으니, 그에 따른 여러 정치적 견제구들이 들어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 테니.
그렇지만,
“큰일 났습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기막힌 반전의 연속.
“전쟁, 전쟁입니다!!”
급보(急報)라는 파발을 매단 이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상황은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니―
“사패천!! 그들이 모용세가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운이 무림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