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 *
전쟁이다.
전쟁이 터졌다.
정천맹 내부 중진들이 전부 소집돼 대회의실에 모여들었으니, 모여든 이들은 딱딱히 안색을 굳힌 채 서로를 바라봤다.
‘이야, 안색들이 아주 예술이구만?’
당연한 말이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당가에서도 위혼이를 포함해 내부 인사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는 정천맹 내부 중진들의 표정은 아주 일품.
조금만 더 하면, 진짜 조금만 더 하면 우리들을 보내버릴 수 있겠다 여겼을 텐데, 하필이면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모두 말짱 도루묵이 돼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정치적 공격을 일삼을 순 없겠지.”
전쟁이란 결코 예사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내부에서 뭐라도 얻어먹고자 어설프게 당가를 공격하려 한다?
‘그랬다간 역풍 맞아 가버리는 거지.’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신명 나게 당가에 관한 우려 섞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던 창천검문의 문도들이 싹 사라진 게 그 증거.
그들은 건수가 생겼을 땐 누구보다 빠르게 나타나더니, 전쟁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원래 이런 쪽 전문으로 하던 놈들인가?’
이런 음해 공작에도 무인들처럼 급수가 있다면 그놈들 역시 경지에 이른 놈들이 분명했다.
나는 안 맞지만 너는 맞기만 하는 일방적인 공작 행위.
어설프게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정치 공작을 이어 나가는 놈들에 대해 하윤호가 재빨리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보고한 것을 생각해 보면, 남궁세가가 괜히 남궁세가가 아니기는 했다.
‘뭐, 그건 그거고.’
음지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야 음지에 있는 것들이 알아서 잘해줄 거다. 그러라고 투자한 하오문이고, 그것에 전문가인 하오문이니까.
그보다 문제는,
“다들 모이셨구려.”
가장 마지막, 모든 이들이 등장한 뒤, 오로지 맹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청원이 자리에 앉으며 곧장 화두를 꺼냈다.
“여기 모인 분들이라면 이미 현 사항에 대해 알고들 계실 테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사패천, 그들이 모용세가에 전쟁을 일으켰소.”
“허어…….”
“이런…….”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다들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맹주인 청원의 입에서 그 안건이 공론화되니 무게감이 다른 것이다.
“자, 이제 이 사태에 관해 여러분과 의견을 나누고자 하오.”
의제는 던져졌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맹수들.
그 사이로 던져진 고깃덩이 하나에, 수많은 시선이 재빨리 오갔다.
‘일단은, 사린다는 거냐?’
침묵이 흘렀다.
사실상 현 무림을 양분하고 있다는 사패천과의 사안.
정천맹과 사패천이 둘 다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단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두 세력 간의 분쟁이란 현시점 가장 뜯어먹을 게 많은 요소였다.
‘그래서 더욱 쉽게는 못 움직이지.’
누구나 군침을 살피는 고깃덩이라고?
함부로 먼저 나서서 이빨을 박아 댔다가는 자신의 목덜미에 이빨이 박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 먼저 나설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려도 여유로이 고깃덩이를 탐할 수 있을 덩치가 되는 놈뿐.’
그 후보는 몇 되지 않았고, 그 몇 되지 않는 이들 중 하나가 손을 들며 나섰다.
“맹주. 의견을 나눈다는 게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소만.”
그의 이름은 팽선문.
팽가의 장로로서 정천맹의 중진 회의에 참석한 인물로, 그 개인의 역량이든 소속된 집단의 역량이든 충분히 다른 집단의 견제를 뿌리치고 제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이였다.
“가만 놔두었다가는 무림에 분란만을 일으킬 이들이 난리를 치고 있소. 당연히 참전해야 될 일이지.”
그것이야말로 틀림없는 정의라 확신하는 팽성문의 말에 그를 지지하는 주작단 계열의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오.”
“옳소. 그들이 설치게 둘 수는 없지 않겠소?”
순식간에 참전하자는 의견이 주류로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여기 있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주류 의견으로 두기에 가능한 일.
그러나, 마냥 그렇게 한길로만 가기에는 세부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갈리는 게 있었다.
“참전이라, 나쁘지 않지. 다만, 우리의 입장은 분명히 해야 되지 않겠소?”
팽선문과는 반대 파벌에 있는 이가 목소리를 냈다.
외견으로 보기에 그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나, 풍기는 분위기는 정반대의 모습.
먼저 의견을 낸 팽성문이 세월에도 불구하고 괄괄한 기질을 드러낸 이라면, 그다음으로 의견을 드러낸 이는 세월 속에서도 녹슬지 않은 한 자루 예리한 명검과 같은 기색을 보이는 이었다.
“호오, 창천검문에서는 의견이 다르신가 보오?”
그의 정체는 바로 당가에 가장 먼저 수작질을 부렸던 창천검문의 장로, 한태상이었다.
팽선문이 한번 무슨 개소리를 읊는지 들어나 보자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한태상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놀렸다.
“크게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있겠소? 다만, 그 세부 내용에 대해 다뤄보자는 뜻이지.”
“세부 내용이라면?”
“사패천은 분명한 우리의 적이요. 그리고 그의 상대인 모용세가 역시 구패라 불리는 우리의 적이지. 아니, 한때는 정파였으나 이젠 그 의기를 배신하고 떠난 배신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
모용세가.
모용씨로 이루어진 혈족인 그들은 중원 북동쪽 요령의 패자로, 지금은 이미 반파된 구패의 일익으로 불리지만 한때는 오대세가의 일익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정파의 대들보였던 이들이 사파의 대들보가 된 상황.
‘솔직히, 나도 삼십 년 만에 부활하고 그게 제일 충격이었다.’
원래 모용세가가 좀 특이한 놈들이긴 했다.
출신이 중원인이라기 보다는 이민족 출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세상 각지의 무공을 수집해서 온갖 무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더 유명했다.
거기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무공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방술까지 섭렵했으니, 그 음침하고 음험한 성격 외에도 풍기는 기색들이 대개 정상은 아닌 놈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또 뒤통수쳤다고 하기에는 애매한가?’
그나마 정마대전 당시에는 죽기 싫었으니 함께 힘을 모았지만, 그것이 지나가고 오로지 집단의 생존과 개인의 강함만이 우위가 되는 세상이 찾아오자 곧장 옷을 바꿔 입고 사파로 전향했다는 이야기.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충격적이기는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에 팽선문 역시 표정을 굳혔다.
“한 장로의 말씀은 마치, 그들을 우선적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듯싶소만…….”
“둘 다 토벌해야 할 대상이오. 다만, 그 순서를 따지자면 모용세가가 먼저가 아닐까 싶소.”
“허…….”
그러니까, 모용세가도 죽일 놈이니까 이 틈에 모용세가부터 쓱싹 해버리자고?
‘진짜 X새끼네.’
나름 노강호랍시고 무림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정파 위선자 놈들은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는 발상을 보여준다.
“어차피, 지금 모양새로 보아 모용세가와 사패천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소. 우리가 그중 하나를 친다 해서 서로가 서로를 도울 모양새는 아닌 듯하단 말이오.”
“…그런데 왜 하필 모용세가요? 굳이 따지자면, 사패천을 견제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팽선문이 묻자 한태상은 선선히 웃으며 답했다.
“그야, 그게 더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겠소.”
“확실…하다고?”
“모용세가가 사패천을 상대하는 동안 후방을 급습한다고 해서 사패천을 무너트릴지는 미지수요. 하지만 사패천이 모용세가를 전면에서 공격하는 동안 우리가 모용세가의 후방을 공격하면 모용세가는 필히 멸문할 수밖에 없겠지.”
“무슨…….”
“어째서 사패천이 모용세가를 급습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소. 다만, 사파라는 족속들이 철저히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모용세가에서 무언가 취할 게 있으니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오. 그렇다면, 모용세가를 멸하는 것만으로 사파의 세력을 줄이고 사패천이 얻을 잠재적 이득을 줄일 수 있으니 손해 볼 게 전혀 없는 장사 아니겠소?”
“…….”
팽선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충 나랑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한태상은 그것을 극찬으로 받아들였는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를 가리켜 군략에선 진화타겁(趁火打劫)이라 칭하는 것이지.”
불이 난 틈에 때려잡는다!
어떻게 하면 뒤통수를 잘 후려갈길 수 있을까 하는 발상이 극에 이르니 군략이 되는구나 싶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마땅히 틀린 말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말마따나, 사파 놈들 상대할 때 비겁한 방법이 어디 있고 정의로운 방법이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사파라는 족속들이고, 자고로 독물을 잡을 땐 독물보다 더욱 지독해져야 하는 법이다.
“흐음…….”
팽선문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하는지 영 불편한 표정을 지어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렵군. 해서, 어찌하자는 것이오?”
“팽 장로께서도 본인의 의견에 찬성해 주는 것이오?”
“아직 찬성표를 던지기는 어렵고… 상세한 계책이 있다면 듣고 결정하겠소.”
일단 반대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자세히 들어봐야 알겠다며 경청의 자세를 보이는 팽선문의 모습에 모두의 이목은 한태상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본인의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의해 주실 것이오. 배신자인 모용세가나, 현 무림의 정기와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패천이나 토벌해야 하기는 매한가지. 그러니 두 세력 다 토벌하는 것은 분명 옳은 행동일 것이오.”
그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역시, 선동과 날조에 한평생을 바쳐온 놈 답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놈이었다.
“잠깐, 질문이 있소.”
그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모용세가와 정천맹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의견에는 찬동하오. 하지만 지형상으로 모용세가의 위치는 중원의 동북방인 요령. 이미 사패천이 그들을 둘러싼 형국이라면 우리가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가다가 되려 모용세가를 도와주는 꼴이 되지 않겠소?”
그야말로 일리 있는 의문 제기.
누가 들어도 타당한 의문이지만… 어째서일까?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미리 맞춰 놓은 대사를 짜고 치며 주고받는다는 느낌?
정파 놈들 수작에는 누구보다 조예가 깊은 이 몸의 생각으로 이건 분명 개수작이 확실했다.
“타당한 의견이오.”
그리고, 그 악취의 주범인 한태상이 던져진 의문을 가볍게 긍정했다.
“사패천은 악독하고 사특한 사파들 중에서도 정점에 이른 이들. 그들이 결코 포위망을 허술하게 구성하지는 않았겠지.”
“잘 아시는구려.”
“물론. 그래서, 우리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포위망을 뚫으려 하오.”
“결사대?”
“그렇소.”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태상의 어조에 묘한 힘이 느껴졌다.
“결사대가 해줄 것은 정면 대결이 아닌 후방 교란과 암살. 다행히 사패천이 눈에 띄게 모용세가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러니까,
“따라서 이 작전은 독과 암기에 능한 이들이 맡아줘야 하는바.”
한태상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당가에서 이 결사대 임무를 맡아주었으면 하오.”